소설리스트

흑백무제-268화 (268/963)

268화. 고백 (6)

다음날.

사악! 사악!

거대한 빗자루로 마당을 쓸던 연호정은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여어.”

털옷을 입은 묵비가 연호정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새벽 나절부터 뭐 하러 나왔어? 추우니까 들어가서 더 쉬어.”

“음흉한 인간.”

“뭣이라?”

묵비가 투덜거렸다.

“어쩐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더라니.”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믿어 주는 거냐?”

“안 믿으면 어쩔 거예요? 그렇다고 하는데 믿어야지.”

정말이지 간단하기 짝이 없는 결론이었다.

물론 이것으로 연호정을 향한 묵비의 신뢰가 연위보다도 더 깊다고 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차이는 철저히 성격 차이라고 봐야 옳았다.

“어땠어요?”

“뭐가?”

“그때의 나는 어땠냐고요.”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할 줄 아는 게 활질밖에 없는 벽창호였지. 나잇값도 못하고 진탕 취해서는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막 춤추고 그랬어, 너.”

“컥!”

묵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거짓말!”

“클클.”

“……아니었죠?”

“그랬던들 어떠하고, 아니었던들 또 어떠하냐. 중요한 건 지금의 너 아니겠냐?”

“똑바로 말해요.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몰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해.”

“역시 거짓말이잖아요!”

연호정이 낄낄 웃으며 빗자루질을 이어 갔다.

“흑도 최대 연합, 흑제성에는 오대신장(五大神將)이라는 직책이 있었어.”

“오대신장……?”

“흑제성주, 흑암제 휘하에서 활동하는 가장 강력한 고수들이었지. 개개인의 무공은 종사급, 그들 모두가 각 분야에서 천하제일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그 오대신장의 수장이자 최강의 무장(武將)이라 불리던 사람이 너였다.”

“……!”

“독보적인 궁술은 의심할 나위 없는 천하제일이었으며, 활을 들지 않아도 다른 오대신장을 상대로 박빙의 전투력을 자랑했던, 무공 한정으로는 흑제성의 이인자라 불렸던 사람. 그게 신궁(神弓) 묵비, 바로 너다.”

묵비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신궁이라니? 그 얼마나 위대한 별호인가. 연호정이 살아갔던 그 시대의 자신이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강자였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 강량도.”

“……?!”

“흑도제일검이라 불리며, 중원 무림에서 철혈의 검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검도(劍道)의 무적자가 바로 강량이다. 마찬가지로 오대신장의 일인이었지.”

묵비가 헛웃음을 지었다.

“강량도……?”

“당시 강호가 칭송하는 천하제일검은 모용군이었어.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무공으로는 모용군이 더 위지만, 검(劍)에 한해서만큼은 강량이 더 위다.’”

“엄청난 평가네요.”

“뭐 하나 빠진 놈처럼 보여도, 그 재능과 열정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어. 우리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오대신장에 꼽힌 이유가 있었다.”

“그때도 귀철검문은 멸문했나요?”

“그래. 그래서 놀랐다. 어쩌면 역사란, 그 흐름이 달라진다 한들 종국에는 같은 결과에 이르는 건가 하고 고민했었지.”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묵비가 구석에서 빗자루를 가져왔다.

“같이 해요.”

“그럼 고맙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눈을 쓸었다.

삭! 삭! 삭!

원체 요령이 좋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빗자루질 한 번에 쌓인 눈이 뭉텅이로 쓸려 나갔다.

연호정이 빗자루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기분 안 나쁘냐?”

“뭐가요? 지금껏 말 안 해 준 거요?”

“아니.”

“그럼요?”

“의도된 접근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냐.”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진짜 기분 안 나쁜 모양인데?”

“연 공자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더 시궁창에 처박혔을걸요? 그걸 생각하면 감히 기분 나쁘다는 소리 못 하죠.”

“얼씨구, 알긴 아네.”

묵비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랬구나.’

활짝 웃는 얼굴 뒤로, 그녀는 과거 연호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감정을 쉬이 드러낸 적이 없었지. 하지만 네게 감정이 아예 없진 않았어. 오히려 누구보다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무인이었지.’

‘난 네가 좋았다. 적어도 그때의 넌 너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길이 고통스러웠지만,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지.’

‘난 너의 과거를 몰랐다. 이럴 줄은 몰랐어. 하지만 이 이상을 알아보려는 건 오지랖일 뿐이겠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다만 난 끔찍한 미래가 될 과거를 고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의 나와는 다른 내가 필요한 법이지.’

예신합전이 끝나고 궁천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때, 얼굴 한번 본 적 없던 연호정은 그런 말을 했었다.

지극한 슬픔에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던 말이었다. 연호정은 마치 자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날 찾아왔던 거야.’

연호정을 보는 묵비의 눈이 아련해졌다.

‘그런데도 당신은 날 구슬리지 않았네요.’

진짜로 자신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만약 자신이 함께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정말 미련 없이 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연호정이었다.

과거에 깊은 연을 맺은 사람이라도 결코 강제하지 않았다. 그저 제안했고, 개인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런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섭섭하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은혜를 입은 사람은 나야.’

연호정은 자신에게 가족을 선물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보다, 자신을 가족처럼 대해 준 게 천배, 만 배는 더 고마웠다.

“후우, 허리가 쑤시는구먼.”

“팔십 근짜리 도끼도 붕붕 휘두르는 사람이 고작 이 정도로 엄살은.”

“내공 안 쓰고 있다.”

“……정말요?”

“응.”

“왜요?”

“그냥 훈련이지. 자세만 제대로 고정하면 허리랑 복부 단련에 좋거든.”

“…….”

“야, 그리고 무슨 눈 좀 쓸면서 내공까지 쓰냐. 내공 아깝게끔.”

그러고 보니 확실히 연호정의 자세는 절제되어 있었다.

노동이 아닌 수련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자세였다. 다만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자연스러웠다.

묵비가 혀를 내둘렀다.

“뭐 이런 때까지 수련하고 그래요?”

“이런 순간까지 수련의 일부로 녹여야 실력이 빨리 늘지.”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맞아. 이 정도로는 턱도 없지. 하지만 믿는 거지. 이런 순간순간들이 모이면, 훗날 적어도 한 계단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흐음.”

“뭐, 꼭 실력이 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긴장을 유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묵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도 난 그렇게는 안 살래요.”

“게으른 것.”

“내가 연 공자보다 연상이라는 거 잊지 않았죠?”

“난 성주였고, 넌 내 부하였거든?”

“어차피 내가 모르는 과거죠.”

“지금도 그렇잖아?”

“사석이잖아요?”

“몸뚱이는 젊어도, 나 오십 가까이 산 사람이야.”

“나이 많아서 좋겠네요. 근데 그거 허수(虛數)라고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

“현실을 살아요, 과거에 매몰되지 말고.”

“너, 어디 가서 사기 당할 일은 없겠다. 세상에, 그렇게 무던하고 순했던 사람이 지금은 혓바닥에 비수를 달고 있네.”

“연 공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연호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마주 웃던 묵비가 가볍게 물었다.

“지평이한테는 언제 말할 거예요?”

“지평이?”

“네. 나한테도 말했으니, 당연히 지평이한테도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글쎄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굳이 속이고 싶진 않아. 하지만 각 잡고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런가요?”

“응.”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한 새벽하늘, 쏟아지는 눈발이 어느새 눈에 띄게 약해져 있었다.

“어제 깨달았어. 이런 얘기는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가장 좋다는 걸.”

“흠.”

“물론 어제까지의 난 그걸 몰랐다. 내 딴에는 정말 큰 고민이었거든.”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내 과거를 고백하든 말든, 날 믿어 주는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을 거야. 그럼 나도 편하게 가도 되겠지.”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말은 좋네요.”

“아, 그리고 이제 귀찮아. 어제 적어도 닷새 치 할 말을 우다다다 쏟아 냈다고. 당분간은 성대를 닫아 놓고 싶단 말이다.”

“그런 것치곤 말이 너무 많은데요.”

“…….”

“얼씨구.”

“…….”

“절씨구.”

“…….”

“계속 그렇게 입 닫고 있을 거면 한 대 쳐도 돼요? 필요 없는 것 같은데.”

“안 돼.”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자연스럽게 가려고. 그게 좋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다.

하늘은 여전히 밤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동쪽 하늘에서부터 서서히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새벽부터 움직였더니 배고프다. 밥 먹을까?”

“좋죠.”

* * *

“후우.”

제갈문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광신삼교라……?”

들썩이는 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혼란으로 물들어 있었다.

‘왜 여태껏 그런 단체가 있는 줄 파악하지 못했을까.’

하긴, 중원도 아니고 새외다. 새외의 세력이 작정하고 힘을 숨기려 들었다면, 제아무리 무림맹의 정보력이 뛰어나도 잡아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무릇 사람이든 조직이든, 힘이 생기면 대외에 드러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도 닿아 있는 문제였다.

한데 그들은 그 거대한 힘과 자본력을 갖췄으면서도 철저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힘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력을 가진 집단. 그리고 그만한 인내력이 발휘되기 위해선 미래를 향한 확신이 필수인 만큼, 능력 좋은 지략가들도 많을 것이다.

‘실감이 안 가는군. 하지만…….’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연 군장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그가 품에서 잘 접힌 문서 몇 장을 꺼내 들었다.

바로 묵룡부에서 탈취한 극비 정보 문서였다. 그 문서에는 새외에서 묵룡부로 들어가는 자금의 흐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는 탕마멸사의 합군이 해치운 회랑단도 속해 있었다.

‘명백한 증거도 있어. 결국 광신삼교라는 게 실존한다고 확신해도 된다는 것인데.’

제갈문호는 답답한 듯 의자에 등을 묻었다.

“묵룡부를 지원할 정도면, 사음교란 곳의 힘은 아무리 못해도 무림맹에 필적할 것이다. 한데 그러한 조직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지간하면 적에 대한 대책을 금세 내어놓는 그였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심지어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모용군.”

제갈문호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권력에 미쳐도 정도가 있지, 어찌 양천과 손을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자가 정녕 선을 넘는구나!”

광신삼교에 대한 위협은, 솔직히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

하지만 모용군은 아니었다. 권력에 눈이 멀었어도 그 나름의 정의는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늘, 이제 보니 천하의 망종이 아닌가!

한참이나 씩씩거리던 제갈문호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 있는가.”

“예, 군사님.”

“연가주께 전하게. 군사가 잠시 보잔다고.”

“알겠습니다.”

제갈문호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드드드드.

살벌한 동풍에 창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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