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고백 (5)
휘이이이이잉!
눈보라가 몰아쳤다.
기세를 보아하니 내일까지 이어질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지는 눈발에 앞도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탁! 탁!
창가가 연신 들썩거렸다.
오늘 잠은 다 잤다고 생각하며, 연호정은 광룡부의 부신을 쓰다듬었다.
우우우웅.
주인의 마음을 아는 건지, 광룡부가 기이한 울음을 토해 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느냐?”
연호정이 광룡부를 놓고 일어섰다.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마.”
“예.”
문이 열리고, 연위가 들어왔다.
잠시 방 안을 둘러본 그가 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당에 들른 것 같지는 않구나. 그렇다고 안에서 밥을 먹은 것 같지도 않고.”
“예.”
연위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보따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럴 줄 알고 먹을 것 좀 싸 왔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비아는?”
“밥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바로 자겠다고 하던데요.”
“그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끼리 먹자꾸나. 나도 허기가 지는구나.”
그가 탁자 위에 보따리를 풀었다.
삶은 돼지고기와 잘 발라진 닭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이 추워서 다 식어 버렸지만, 은은한 향이 아직도 올라왔다.
“술 있느냐?”
“예.”
연호정이 구석 선반에서 술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연위가 잔을 내밀었다.
“한잔 따라 보거라.”
연호정이 공손하게 잔을 채웠다.
가만히 잔을 내려다보던 연위가 그대로 잔을 비웠다.
연위가 단번에 잔을 비우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기분이 좋을 때가 아니면, 언제나 두 번에 걸쳐 나눠 마시던 그였다.
“꽤 독하구나.”
“백주니까요.”
“너도 한잔해라.”
“감사합니다.”
연위가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잔을 받은 연호정이 마찬가지로 단번에 잔을 비웠다.
빈속에 술을 마시니 식도부터 위장이 금세 뜨거워졌다. 한순간 취기가 훅 오르더니,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제갈 군사께서 많이 놀라신 모양이다.”
“그러셨겠지요.”
“새외에 그런 세력이 있었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하물며 그중 하나만 해도 능히 중원을 전복시킬 정도의 힘을 갖추었다……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야.”
“힘을 갖춘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을 어떻게 쓰느냐지요.”
“어떻게 쓰느냐…… 그래, 맞는 말이다.”
광신삼교의 존재는 연위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음교, 신화교, 그리고 광혈교.
그중 사음교가 묵룡부를 지원하고 있었다니, 이래서 정보력이 좋아도 항시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설마하니 새외에서 중원 북부를 우회하여 남부에 손을 뻗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그 자금력.
묵룡부라는 초거대 단체를 지원할 정도의 자금력이라면, 능히 무림맹의 자금력에 필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연위가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걸 보면, 영원한 평화란 앞으로도 영영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새삼 실감하게 된다.”
“어디까지를 평화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물론 그렇겠지.”
연호정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진정 하고 싶으신 말씀은 광신삼교에 관한 게 아니라는 걸.
바로 자신에 관한 얘기라는 걸.
“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혼란과 격정으로 물든 그의 눈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고 그윽했다.
“네가 고백한 그 말…… 네가 기나긴 인생을 살다 돌아왔다는 그 말.”
“…….”
“적어도 그 말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이 애비에게, 그리고 비아에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아들이 어디선가 머리를 다친 것은 아닌지, 혹은…… 짓궂은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이해합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지금껏 말씀드리지 않으려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연위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들의 저 씁쓸한 웃음, 공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가슴이 미어졌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연위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 쓸데없는 말로 또 자식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큰애는 속이 좁다. 적에게만큼은.
큰애는 속이 넓다. 제 사람들에게만큼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아비인 자신이 배신해도 절대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이해하려 애쓸 것이고, 종국에는 이해하고야 말 것이다.
연위는 탄식을 터트렸다.
‘아직도 호정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큰아들을 믿었다. 큰아들만이 아니라 둘째도, 그리고 묵비도 믿었다.
그 믿음에 정도가 있다면, 그는 큰애를 더 강하게 믿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큰애에게 주는 만큼의 신뢰를 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가.’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 이 시대, 이 생생한 현실이 아들에게는 과거라니? 본디 세상이 이리 흘러갈 게 아니었다니?
본래의 역사대로라면, 구주명가와 모용세가가 합심하여 연가를 멸문시켰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야화(野話)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비로운 얘기였다.
‘아무리 자식을 신뢰해도 이런 이야기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해 보면.’
문득 연위는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한창 제사를 모시던 그때, 사이가 그렇게 안 좋던 동생을 부둥켜안던 첫째의 모습을.
그리고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던 첫째의 모습을.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그때 본 첫째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했다. 아마도 연위의 인생에 있어 그처럼 놀라운 순간은 찾기 힘들 것이다.
‘언제나 날 피해 다녔던 첫째가,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볼 줄은 몰랐다.’
첫째의 떨리는 눈빛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환희, 슬픔, 분노, 절망, 동정, 사랑 등등.
눈에 깃든 감정은 상상 가능한 감정들의 총합이었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담길 정도의 경험은 상상키 어렵다.
아들은, 바로 그 상상하기 어려운 경험을 뚫고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도.’
제사 때 이후, 첫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더는 자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죽은 아내와 비슷한 이해심을 보여 주었다. 무공의 성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며, 어디서도 배우기 힘든 기가 막힌 안목으로 대국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안목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당연하다. 평생을 강호에서 구른 노강호의 안목도 그 정도로 깊고 날카롭긴 힘들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했다.
아직 약관에 이르지도 못한 어린 청년의 안목이 그리도 날카롭다?
당연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믿어 버리면 편한 것을, 굳이 왜 의심해야 한단 말인가? 상대를 의심하는 것도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연위는 아들을 상대로 피곤을 느끼고 싶지도, 의심하고 싶지도,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 그는 아들을 남처럼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들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믿어 버렸다.
그것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은 넘겨 버린 채.
연위가 눈을 감았다.
“비연심법의 성취가 폭발적으로 늘었었지.”
“……예.”
“본가 오대신공의 구결을 어릴 적부터 전부 외우고 있었다고도 했다.”
“그랬습니다.”
“태경 총관, 그 배신자를 잡으며 명가부터 뒤흔들겠다고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했었지.”
연위가 다시 눈을 뜨고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명가가 본가를 공격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더냐?”
“공격할 것도 알았고, 나아가 복수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
“시선을 달리해서 보면, 제게 있어 명가는 광신삼교보다도 죽일 놈들입니다. 놈들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요.”
연위가 재차 탄식을 터트렸다.
아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란 바로 가족일 것이다.
‘이놈.’
연위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 하나를 믿기가 그리 힘들었더냐?’
아들은 진실을, 진심을 말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족의 목숨을 입에 올리고 있잖은가? 그가 아는 아들은, 가족까지 언급하며 농담을 할 만큼 막돼먹은 애가 아니었다.
한데 자신은 왜 아들이 어렵사리 토해 낸 진심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가.
예전처럼, 아들의 신들린 안목과 폭발적으로 성장한 무공을 보며 비로소 지닌 바 재능이 개화하고 있다 믿었을 때처럼.
그저 그때처럼 믿으면 되는 것을 왜 이리 아들을 추궁하고 있는 것인가.
“……허허허.”
연위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헛살았구나. 내가 참으로 헛살았어.”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네가 내게 죄송할 게 무엇이 있단 말이냐?”
“……언제나 말씀은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아버지를 믿지 못한 것은 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에야 이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라 저의 문제입니다. 그리 자책하실 것 없습…….”
“아니, 나는 헛살았다.”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눈에 크나큰 떨림이 일었다.
“헛살았지. 예전처럼, 좀 전에 네가 한 말도 널 믿듯 믿으면 그만인데, 고작 그게 뭐라고 이리도 고뇌하고 있었단 말이냐.”
연호정이 놀란 눈으로 연위를 보았다.
“아버지.”
“생각해 보면…… 그래, 그간 너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더더욱 널 이해했어야 했다. 네가 보여 준 무공과 안목은, 정녕 네 나이 때에 보여 줄 만한 경지가 아니야.”
“…….”
“그리고 네가 기나긴 인생을 살다 돌아왔다는 것도, 기실 믿고 안 믿고를 따질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연위가 연호정의 손을 잡았다.
“호정아.”
“……예.”
“고생 많았다.”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본가가 멸문하고 세상에 홀로 나가, 저 독한 흑도의 무뢰배들 속에서 이 악물고 버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 것이냐. 필경 이 애비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
“네 기억 속의 나는, 도저히 부모라 부를 수 없는 천하의 망종이었을 것이다. 그런 애비를, 다시 과거로 돌아와 하나하나 이해해 주기란 정녕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괜스레 아버지의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이 말을 하기까지 네가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어했을지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내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 이제야 자식을 이해한다 생각했거늘 아직도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호정아.”
연호정이 고개를 들었다.
연위의 얼굴에 대견함이 떠올랐다.
“잘 돌아왔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어.”
연호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천하에서 가장 사악한 자조차도 공포에 떨게 하는 흑도 역사상 최강의 고수일지라도, 결국 혈육의 정 앞에서는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연호정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탁자 위로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