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66화 (266/963)

266화. 고백 (4)

“이걸로 드시겠소?”

“네, 군장님.”

“……지금은 사석이오.”

“알겠습니다.”

모용우가 당상아의 잔을 채워 주었다.

당상아는 그대로 잔을 비웠다. 애초에 상대에게 술을 따라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용우가 어색하게 자신의 잔을 채웠다.

당상아는 가만히 앉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 잔 마셨으면 따라 줄 만도 할 텐데, 아무 말도 없었다.

꽤 당황스러운 순간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모용우는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고개를 돌리거나 술을 마시진 않았다.

“한 잔 더 받으시겠소?”

“좋죠.”

잔을 받은 당상아는, 이번만큼은 먼저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다.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 어인 일로 내게 술을 사 달라 하셨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물어보시오.”

“아시죠? 두 분 가주님께서 저희를 짝지어 주려 하셨던 거요.”

서로 알고는 있었지만 대놓고 언급한 적은 없던 사항을 꺼냈다.

당돌하다면 당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소.”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당상아가 웃으며 말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솔직히, 조금은 당황하실 줄 알았거든요.”

“충분히 당황했소. 표를 내지 않으려는 것일 뿐.”

“표 내셔도 돼요. 그게 뭐, 창피한 일은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 쉽게 진심을 보여 주지 않소이다.”

날카롭다.

무덤덤한 얼굴로 그런 말을 뱉으니, 당상아는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맞는 말씀이세요. 놀랍네요.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분이셨군요.”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친분을 나눌 시간은 없었지만, 어쨌건 나는 탕마군의 군장이오. 그 긴 시간 동안 군병들과 함께하다 보면 바보라도 배우는 게 있기 마련 아니겠소.”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아버지인 당관과의 일을 겪은 후,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 성장한 것 같았다.

자신감 넘치는 그 미소에 아직 확실한 주관은 없었지만, 앞으로 더 크게 빛날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해서, 그 부분에 관한 얘기를 하러 오셨소?”

“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해야 했을 대화라고 생각하오.”

“맞아요. 그래서 왔어요.”

“해서, 무엇을 물어보고자 하시오?”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실력 좋은 군병이라고 생각하오.”

아직 여인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서로 엮일 일이 없으면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당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모용 군장님을 출중한 실력을 지닌 상관이라고 생각해요.”

“후한 평가 고맙소.”

“저희 혼사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모용우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진지함이 절로 묻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보여 주려고 꾸민 모습 따위가 아니었다.

당상아는 그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용우의 됨됨이를.

‘적어도 이런 자리에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일부러 낮게 평가해서 그 정도다. 있는 그대로의 느낌만 보면, 진중하고 바른 남자임을 절로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당 소저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소만, 나는 애정 없는 혼사는 반대요.”

“그런가요?”

“그렇소. 누군가는 내 말을 배부른 소리라고 비웃을 수도 있소.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아니오? 인생의 동반자와 남은 수십 년을 함께할 텐데, 애정 없는 사람과 함께할 순 없소이다.”

“…….”

“서로를 위해 주며 살아도 더 못 해 준 것이 아쉬워 하루하루 후회할 것 같소. 평생 쏟을 그 사랑과 열정을, 연정도 없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지 않소.”

“…….”

“애초에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오.”

모용우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언제나 진심이었다. 진심이 아닌 관계에선 선을 긋고, 진심으로 얽힌 관계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사람이었다.

한 조직의 수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순진한 품성이었다. 당상아는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모용우의 언행에 내심 놀랐다.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대답이 되었소?”

“충분히요.”

“만족했다니 다행이오.”

당상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으시나요?”

“안 그래도 물어볼 참이었소. 당 소저께서는 이 혼사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오?”

“안 여쭤보셨다면 조금 서글플 뻔했네요.”

“그럴 리가. 나 역시 사내요. 상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소.”

정말이지 솔직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인 앞에서, 이렇게까지 진솔하게 말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상아는 그런 모용우의 품성이 마음에 들었다.

“연정을 품은 사내와 혼인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 그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그럼?”

“내 인생은 오로지 나만이 책임질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개척해 봐야지요.”

“음.”

“직접 찾아볼 거예요. 제 배필이 될 사람을요. 그래서 마음에 든다 싶으면, 저는 뒤를 생각하지 않고 손을 내밀 거예요.”

당상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얼마 전에야 깨달았거든요.”

“…….”

“평생을 참고 억누르면서 지냈어요.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제 인생의 주인공은 오로지 저만 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무대를 최대한 화려하게 장식해 봐야지요.”

당찬 여성이구나.

모용우는 당상아의 변화에 놀라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당상아를 봤을 때, 그녀는 이렇지 않았다. 오히려 소심한 쪽에 가까웠고, 혹여 주변에 피해를 줄까 무서워 연신 눈치나 보기 바빴었다.

그랬던 그녀는 이제 없었다. 아직은 조금 불안해 보였지만, 자신만의 확고부동한 원칙을 세운 여장부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말이죠.”

당상아가 장난꾸러기처럼 히죽 웃었다.

“일단은 군장님부터 알아보려고요.”

모용우가 눈을 끔뻑였다.

“나, 나를?”

“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소?”

“물론 저는 배필을 못 찾아서 미친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탕마군장 모용우는 능히 천하제일의 기재라 할 만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과찬이오.”

“과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커험.”

“그래서 한번 살펴보려고요.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인지. 그러다가 혹 군장님께 연심을 품게 되면, 그때는 앞뒤 안 가릴 수도 있어요.”

모용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당돌함도 이 정도면 무섭다. 일반 양민들보다 무림인들이 훨씬 개방적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중원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성상. 당상아의 그런 모습은 모용우에게도 몹시 신선하게 다가왔다.

당상아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정말 당황하신 것 같은데요?”

“크게 당황했소.”

“그저 솔직한 제 마음을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무례했다면 사과드릴게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오히려 당 소저의 그런 솔직한 면을 본받고 싶구려.”

“모용 군장님도 솔직하신데요.”

긴장감 넘쳤던 대화가 꽤 화기애애하게 전환됐다.

“그나저나, 하나 여쭤봐도 돼요?”

“무엇을 말이오?”

당상아가 턱을 쓰다듬었다.

“대체 연 군장님하고는 어떤 사이에요?”

모용우가 눈을 끔뻑였다.

“그건 어찌 묻소?”

“저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연가와 모용세가가 꽤 날 선 대립 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한데 저번에 봤던 두 분 사이는 상당히 좋았던 것 같아서요.”

“그렇게 보였소?”

“네.”

가만히 당상아를 보던 모용우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니오. 그저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있을 뿐.”

“흐음, 그런가요?”

“그렇소.”

“……알겠어요.”

당상아가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더 주세요. 아, 이번에는 제가 먼저 따라 드릴까요?”

“감사히 받겠소.”

당상아가 따라 주는 술을 받으며, 모용우는 생각했다.

‘더 조심해야겠군.’

확실히 긴장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당상아의 안목이 유독 날카로울 수도 있지만, 그녀보다 안목 좋고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은 무림맹에 널리고 널렸다.

‘의지할 곳이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래서 연제와의 사이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것인가?’

그건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처럼 연호정을 대하다가는 언제고 일이 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연호정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상아가 다른 사람에게 허튼소리를 뱉을 인물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아직 가만히 놔두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이상 선을 넘어선 안 된다.

‘조심하는 것으로는 안 돼.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해.’

모용우가 당상아를 주시했다.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 주인공은 오로지 나만이 될 수 있다…….’

그녀와의 대화에서 배운 게 컸다.

가만히 당상아를 바라보던 모용우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엥? 가, 갑자기요?”

“당 소저 덕분에 크게 깨달은 게 있소. 그대에게 말해 줄 순 없지만, 그대가 아니었다면 훗날 실수할 뻔했소이다.”

당상아가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거창하게 말씀하시니까 당황스러운데요.”

모용우가 잔을 들었다.

“한잔합시다.”

“그래요. 킁, 근데 궁금하네. 뭘 깨달으셨는데요?”

“비밀이오.”

“비밀 많은 남자는 매력 없다고 누가 그러던데요.”

“매력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소.”

시원하게 잔을 비운 모용우가 창가를 바라보았다.

‘연제. 정말이지, 이 못난 형 때문에 자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구만.’

오늘따라 연호정이 보고 싶었다.

* * *

“후우, 이번 겨울은 정말 보통이 아니군. 앞으로 두 달도 넘게 남았는데, 이러다 사고라도 나겠어.”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턴 제갈문호가 방문을 두들겼다.

“나요.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뭐지?

제갈문호는 내심 의아했다. 들려오는 연위의 목소리가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드르륵.

제갈문호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생각보다 늦어져서 미안하오. 처리할 일이 많아서.”

“괜찮소.”

연호정과 묵비가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랄 게 무에 있겠는가. 앉으시게.”

“예.”

그렇게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제갈문호가 세 사람의 얼굴을 살폈다.

‘……흐음.’

의아함이 무서운 속도로 증폭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분위기가 상당히 칙칙하다.

묵비의 얼굴에는 반신반의한 기색이 역력했고, 연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잔뜩 굳어져 있었다.

반면 연호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눈은 다소 충혈되어 있었다.

제갈문호가 헛기침을 했다.

“허험! 어쨌건 서로가 바쁠 텐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네만.”

“좋습니다.”

“그래, 이제 말해 주게. 자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에 관해서.”

연호정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광신삼교(狂信三敎)라는 단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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