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불의 발견 (6)
휘이이이잉!
석양이 지고, 어느새 세상이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하늘은 당관의 마음에 드리워진 어둠만큼이나 새까맸다.
“……고작 그거냐?”
“음?”
당관이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고작 나와 모용가주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불러낸 것이렷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당신은 스스로를 너무 고평가하는 경향이 있소.”
“뭐?”
“독과 암기는 무섭지. 하지만 우리 모두가 무림맹에 있소. 무림맹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한, 독과 암기보다도 무서운 게 바로 이거요.”
연호정이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아시겠소? 당신이 그 독과 암기로 날 죽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오. 설령 날 죽인다 해도 당가는 수장을 잃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머리를 쓰는 자들은 그렇지 않소.”
“…….”
“그들은 머리 하나로 천하를 조종하오. 그리고 모용군 역시, 잔머리라고 평가하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운 안목으로 자신의 당파는 물론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소이다.”
“그따위 애들 소꿉장난 같은 짓은…….”
“틀렸소.”
연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 말마따나 이건 소꿉장난이오. 그러나 애들의 소꿉장난은 해가 지면 끝나지만, 어른들의 소꿉장난은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이 나오.”
“……!”
“내가 모용군을 주시하고, 또한 두려워하는 이유요. 그래서 그와 대립하는 것이고, 어떻게든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게지.”
“그래서.”
당관이 날카롭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그런 놈과 손잡지 말고 이만 사천으로 돌아가라?”
“그럼 죽소.”
“뭣이?!”
“당신, 모용군과의 연수를 끊고 사천으로 돌아가면 당가는 멸문지화를 금치 못할 것이오.”
느닷없이 엄청난 얘기가 튀어나왔다.
당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로군.”
“내 말이 그 말이오. 정말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이미 진흙탕에 발을 들인 자가 몸 성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양반이오.”
“……!!”
“모용군이 죽거나 몰락하기 전까지, 우리의 소꿉놀이는 끝나지 않소이다.”
죽일 듯 연호정을 노려보던 당관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 말했다.
“쓸데없이 말이 길구나. 본론을 말하라.”
“당파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공공대사와 함께하시구려.”
“……뭐라?”
설마하니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당관은 내심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왕이면 우리 쪽에 붙어 달라 말하고 싶소만, 사실 우리나 당신이나 서로를 믿지 않잖소. 그렇다고 사천으로 돌아가면, 모용군은 어떻게든 당가를 무림공적으로 몰아 불태워 버릴 것이오.”
“그걸 어찌 확신하느냐?”
“내 손에서 벗어난 칼은 언제고 나를 해할 수 있으니까.”
“…….”
“보시오. 모용군과 손을 잡았으면서도 아직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잖소?”
당관의 볼이 씰룩거렸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공공대사에게 가시오. 가서 그분을 도와주시구려. 당신도 알겠지만, 공공대사의 불심과 협의는 강호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오.”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애먼 짓 그만하고, 그와 함께하시구려.”
“……웃기는군.”
“나도 우습소. 이렇게까지 말귀를 못 알아먹을 줄이야.”
“모용군 그자가 범인으로 나를 지목할 거라고?”
“아마도?”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부분에 대한 확실한 설명 없이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연호정은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냐?”
“받으시오.”
연호정이 손수건을 던졌다.
우우웅.
강력한 내공을 타고 날아간 손수건이 당관의 손에 잡혔다.
“뭐 하자는 수작이냐?”
“손수건을 잘 보시오.”
당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순간 그가 움찔했다.
‘이 냄새는?’
연호정이 말했다.
“꽤 옅지만 상당한 농도가 아니오?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것 같아 당상아 군병에게 자문을 구했소. 그랬더니 그녀가 뭐라 한 줄 아시오?”
“……청음독(淸陰毒).”
“역시 잘 아시는군. 그렇소. 당상아 군병도 똑같이 말하더이다.”
당관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믿을 수 없다. 청음독은 본가 극독 중 하나야. 네놈은 대체 어디서 이 독을 얻은 것이냐?”
“소문의 근원지에서.”
“뭐?”
“모용군이 밑 작업을 시작한 무림맹 외성의 어느 객잔에서 추출한 독이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아직도 독기가 남아 있더군.”
“……!!”
“당상아 군병이 그럽디다. 청음독은 그 자체로 사람을 해하진 않는다고. 그러나 당가의 삼양공(三陽功)을 익힌 자의 내공에 반응하여, 언제든 중독사하게 만들 수 있다고 들었소.”
당관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아시겠소? 그 독을 살포한 자는 혹시라도 조사가 진행될 경우, 꼬리를 자르기 위해 부하에게 그 독을 살포했다고 볼 수 있소.”
“…….”
“한데 말이오. 모용군이 삼양공을 익혔소?”
“…….”
“아니지. 삼양공을 기반으로 한 무공을 익힌 자는 바로 당신과 당상아 군병 둘뿐이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하면 당상아 군병이 이걸 뿌렸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이다.”
당관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상아가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당가 내부에서 청음독을 훔쳐 낼 수는 없다.
그것은 당관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당가 비전의 극독들은 온갖 기관 장치와 진법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래 훔친다는 것은 성천십삼좌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당상아는 어릴 적 말고는 청음독을 접한 적이 없었다. 그럼 이 독이, 오로지 당가에서만 만들 수 있는 이 물건이 어떻게 외부로 유출되었을까?
“모용군의 짓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도 그가 어떻게 이 독을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그가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하겠소이까?”
“헛소리는 그만해라! 청음독이 어떤 독인 줄 아느냐?! 가주의 허락 없이는 설령 장로라도 출입이 불가능한 금지(禁地)에서……!”
“그럼 더더욱 확실한 함정이 되겠군. 누구도 훔쳐 올 수 없는 금지의 독이니, 범인이 당씨 말고 또 있겠소?”
“……!!”
당관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연호정의 눈이 칙칙해졌다.
“나는 모용군이 싫소. 그러나 그의 능력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소이다. 그는 원하는 게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야 마는 미치광이요.”
“…….”
“여유 부리다가 진짜로 그의 발판으로 전락하지 말고, 흐린 눈 좀 닦고 세상을 보시길 바라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멍하니 손수건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놈! 게 서지 못하겠느냐?”
연호정이 당관을 돌아보았다.
“내 볼일은 끝났소.”
“닥쳐라! 내 허락 없이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한 줌 핏물로 녹여 버릴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구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재차 몸을 돌려 걸어갔다.
진짜로 간다. 극도로 흥분한 당관의 협박에도 걸음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었다.
당관의 동공이 진한 녹색으로 물들었다.
“애송이 놈!”
피유우우우우웅!
무형의 지풍(指風)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지풍의 속도가 묵비의 화살보다도 더 빨랐다. 그야말로 빛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두 눈에 화광(火光)이 일었다.
퍼어어어엉! 화르르륵!
홍염의 일장(一掌)에 지풍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흩어진 지풍에 시뻘건 불길이 붙더니, 지풍에 실려 있던 극독이 그대로 불살라졌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막아?!’
흥분해서 독기를 제대로 싣지 못했다지만, 철판도 뚫어 버릴 위력의 지풍이었다. 그 지풍을 연호정은 맨손 육장으로 막아 낸 것이다.
심지어 양손도 아니고 한 손으로.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소.”
“……?!”
“이번 만남, 당상아 군병이 먼저 내게 부탁한 것이었소.”
“……뭐?”
“제아무리 골이 깊다 해도 부녀지간은 부녀지간이오. 당상아 군병은 아버지가 비참하게 몰락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하였소. 그래서 당신을 설득해 달라 내게 부탁한 거요.”
“……!!”
당관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그는 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출정 전에 이미 내놓은 목숨이랍니다. 거두어 가시려거든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기다리죠.’
웃으며 그리 말하곤 돌아서는 딸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냉정함 그 자체였다.
당관은 허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애비를 걱정해서 찾아왔거늘, 정작 부녀지간의 골은 더 깊어지기만 했다. 인형이니, 무공을 거두어 가니 흉측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 그리고 혼란.
한순간 힘이 빠져 하늘을 올려다보는 당관에게, 연호정이 말했다.
“혹시라도 모용군에게 따질 생각이라면, 둘만 있는 장소는 피하는 게 좋을 거요.”
“…….”
“따지려거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따지시오. 그래야 모용군도 헛소리를 못 할 테니.”
“……그것은 또 무슨 수작이냐.”
당관의 목소리가 유독 무기력하게 들렸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 임무에서 당상아 군병 덕을 조금 봤소.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 군병을 위해서 하는 말이니,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소.”
“…….”
“이만 가겠소.”
숲에서 벗어난 연호정이 파군각으로 길을 잡았다.
그때, 골목에서 당상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났나요?”
“그래.”
연호정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다고 해서 하긴 했다만, 정말 괜찮은 건가?”
“물론이죠.”
“…….”
“모용가주와의 동맹을 끊는 것이 결과적으로 아버지에게 이로운 길이라면, 당장의 혼란과 아픔은 감수해야지요.”
그렇다.
청음독을 뿌린 것은 바로 당상아였다. 그리고 당관을 만나 그의 화를 돋운 것 역시 미리 계획된 연출이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네.”
“군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시간은 좀 걸렸겠지만, 분명 방법을 찾았을 거야.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어.”
“군장님.”
“……말해.”
“이번 실무조 일을 하면서 제가 뭘 배웠는지 아세요?”
“…….”
“바로 시간의 중요성이에요.”
당상아가 쓰게 웃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저를 가문에서 내쫓으려 하고 계세요. 부모 자식 간의 애정을 이용하는 것 따위야 별 신경도 안 쓰인다고요.”
“…….”
“그냥, 이렇게 해서라도 아버지가 이 더러운 판에서 발을 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해요.”
가만히 당상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시간 있나?”
“네?”
“지금 시간 있냐고.”
“아, 네.”
“파군각으로 가자. 묵비도 아직 식사 전일 테니, 우리끼리 밥이나 먹자고.”
“저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가자.”
“……네.”
그렇게 두 사람이 파군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청음독 말이야. 그거 어디서 난 거야?”
“만들었는데요.”
“만들었다고? 당가 비전의 극독을?”
“저는 할아버지께 무공은 물론 독과 암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배웠거든요.”
“……암왕.”
“아버지는 아직도 모르실걸요. 몇 푼도 안 되는 약재를 배합해도 청음독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
“그냥 우리 부녀는 이렇게 살 운명인가 봐요. 어쩌면 영원히 서로를 이해 못 할지도 모르겠네요.”
* * *
다음 날 정오.
쾅!
화산파 장문인 용화진인, 남궁가주 남궁인, 공동파의 장문인인 등천교와 함께 식사 중이던 모용군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을 보며 깜짝 놀랐다.
“당가주?!”
“오오, 가주께서 오셨소?”
당관이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모용군을 노려보았다.
순간 모용군은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용화진인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자리에…….”
그때, 당관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공대사를 노리고 있다는 것, 사실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