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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60화 (260/963)

260화. 불의 발견 (4)

“이렇게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지?”

“그렇군요.”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제갈문호가 손사래를 쳤다.

“고생이야 자네가 많았지. 천하의 투왕을 속여 그 많은 정보를 빼내다니, 자네가 아니면 누가 있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나.”

제갈아연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같이 고생했거든요?”

“안 봐도 훤하다, 이놈아. 가서 연 군장 발목이나 안 잡았으면 다행이었겠다.”

“아버지!”

제갈문호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연이가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하하, 아네. 누구 하나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테지.”

“그렇지요.”

“그나저나, 멸사군은 정말 대단하더군.”

“예?”

제갈문호가 감탄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휴식을 취하는 군병들. 저마다 표정이 진지한 걸로 보아 조금 전의 대련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없는 동안, 묵비 부장이 꽤 실전적인 훈련을 시켰다고 들었네. 하지만 다들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임할 줄은 몰랐지 뭔가.”

“하하.”

“아무리 실전 같은 승부라도 그만한 살초들을 주고받다니, 내 진정 깜짝 놀랐네. 그러다 누구 하나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섣부른 말일 수도 있지만, 승부에 임하는 자세만큼은 무림맹 전체에서 멸사군을 따라올 집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어!”

“까딱 잘못하면 목숨 날아가는 건 순간이지요. 저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으니, 오히려 적당히 하는 건 군병들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 군장에 그 군병이로군. 감탄했네.”

“아닙니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연호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해서, 예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

“……음.”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모용군 때문입니까?”

“그렇다네.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지.”

“말씀하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제갈문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묵룡부에서 탈취한 정보, 이게 다인가?”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정보의 일부를 숨겼다고 생각하십니까?”

“딱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네. 다만, 정보들을 분석해 본 결과 정보의 질이 워낙 중구난방이어서 말이야.”

제갈문호가 오해 말라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질 떨어지는 정보만 있었다는 건 아닐세. 직접 침투하여 탈취하지 않았다면, 족히 몇 년은 몰랐을 정보들이 수두룩하더군. 자네는 분명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어.”

“한데 어찌 그 이외의 정보가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글쎄…….”

제갈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네. 다만, 자네라면 이보다 더 큰 건수를 가져올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네.”

“절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허허, 그럴 수도 있지.”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자네를 의심하는 건 아닐세. 그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물어본 것뿐이야. 괜히 심란케 했다면 내 사과함세.”

“아닙니다.”

물론 무림맹에 전달하지 않은 정보가 있긴 있었다.

바로 광신삼교, 그중에서도 사음교와 관련된 정보였다.

‘조만간 아버지께,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려야 할 거야.’

연호정은 제갈문호의 눈을 주시했다.

지식과 지혜로 가득한 학자의 눈빛. 그 안에는 강호의 미래를 향한 걱정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강한 열정이 깃들어 있었다.

‘군사님께도 말씀드려야 한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이 정보를 공유한 순간 우리끼리만 아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연호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자네가 그리 말하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지지.”

“다만, 흑도에 관해 또 다른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 만한 사람과 친분을 나누었습니다.”

“음?”

제갈문호가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요. 그게, 음…… 어쨌든 저도 멸사군 소속이니까요.”

“……?”

“정이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죄송해요. 하긴, 며칠 쓰러져 있느라고 말할 기회도 없긴 했지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귀철검문이 멸문했다는 소식, 들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아, 물론 들었네. 꽤 되었지, 아마?”

“예.”

“한데 귀철검문이 왜?”

“검문은 멸문했지만, 생존자가 하나 있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생존자라면 설마, 검문의 후계자를 말함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일세. 실무조를 파견한 후 줄곧 호남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모용가주가 떠나기 전, 둘이서 그 부분에 대해 논의했었다네.”

“그러셨군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설마 자네……?”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엄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귀철검문의 후계자, 강량을 데리고 왔습니다.”

“……!”

제갈문호의 표정이 돌변했다.

가만히 연호정을 주시하던 제갈문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 줄 모르지는 않을 테지?”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도 데려왔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묵룡부라는 공공의 적이 있으니까요.”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귀철검문이 의문의 고수들에 의해 멸문했다고 들었네. 정확한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양천의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네.”

“과연 대단하십니다.”

“그래, 살아남은 검문의 후계자로서 누구보다도 묵룡부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우리 무림맹 역시 적이 아니던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강량을 맹으로 들인 것은 분명 위험한 짓이지만, 동시에 그가 우리를 적으로 돌릴 거라 판단했다면 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자네의 안목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아네. 또한 무림맹의 군사로서, 멸사군장의 능력과 실적을 신뢰하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닐세.”

제갈문호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만약 그 사실을 저쪽에서 알게 되면, 자네는 물론 연가주께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될 걸세.”

강량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떠나, 그가 흑도 출신인 것만으로도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될 거란 뜻이었다.

“자네도 알잖는가. 모용가주가 얼마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었다.

“그가 이쪽을 건드리면, 이쪽에서도 그에게 선물해 줄 폭탄이 있거든요.”

“……!”

“물증은 없습니다만, 물증이야 만들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이쪽이 알고 있다는 걸 슬슬 흘려 주기만 해도 감히 쓸데없는 짓을 못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물론, 저는 어지간하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을 겁니다. 이건 최후의 한 수로 묵혀 둘 생각이라서요.”

최후의 한 수.

꽤 섬뜩하고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한 말이었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솔직한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그 폭탄이 무엇인가?”

“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사나흘 후, 제가 연락을 드리면 저희 거처로 와 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마 밤중일 듯합니다만.”

“……?”

“아버지께도 따로 말씀드릴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연호정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깊은 눈으로 연호정의 표정을 살피던 제갈문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오늘 안고 가는 이 의문, 그날엔 말끔히 풀어 줄 거라고 믿음세.”

“감사합니다.”

“다만 귀철검문의 후계자, 당분간 잘 관리해 주게.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말이야.”

“차라리 그 녀석도 멸사군에 들이는 게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멸사군에?”

“그렇습니다.”

“……흐음,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지.”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 부분, 더는 얘기하지 않음세.”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꽤 부드럽게 넘어갔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무림맹 군사 입장에서 보면, 연호정의 돌발 행동을 이렇게 무마시켜 준 것 자체가 파격이랄 수 있었다.

“말이 괜히 길어졌군.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세.”

“말씀하십시오.”

“그 전에, 하나만 묻고 싶네.”

“무엇을 말입니까?”

제갈문호가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는 누가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뜬금없이 엄청나게 무거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연호정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그것을 어찌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개인적인 궁금증일세.”

“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설령 생각해 둔 사람이 있을지언정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일입니다.”

강량이 무림맹으로 들어온 것보다도 훨씬 위험천만한 주제다. 연호정이 괜히 긴장한 게 아니었다.

“그렇구만. 그래, 이해하네. 그렇다면 하나만 더 물어봄세.”

“……?”

“자네는 자네 부친, 연가주께서 맹주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연호정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서는 그럴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건 나도 아네.”

“더하여 자식으로서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는 맹주 감이 아니십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번뜩였다.

아버지는 맹주가 될 감이 아니다? 사이 좋은 부자지간에서 나오기 힘든 말이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가?”

“능력을 떠나, 맹주라는 옷에 맞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흐음.”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아버지께서는 봉공으로 남으시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대답, 잘 들었네.”

“한데 그 질문은 어찌?”

“하면 다른 사람은 어떤가?”

“예?”

“이를테면 공공대사라든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공공대사님이라면 맹주가 되셔도 여론이 들끓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한데, 그러한 질문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아무래도 모용가주가 밑 작업을 시작한 것 같아서 말일세.”

“예?”

“누군가 사석에서 공공대사가 무림맹주에 적격이라는 얘기를 꺼냈다네.”

“……!”

“문제는…….”

“공공대사가 맹주 감이라는 소문만 남고, 정작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는 것이로군요.”

“역시 자네와는 대화하기가 편하군.”

제갈문호가 차로 목을 축였다.

“그 발언이 나온 이후, 맹 내부의 시선이 공공대사에게 쏠리기 시작했네. 처음 그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네만,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더구만.”

“여론 조장이라.”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군입니까?”

“소문의 근원지를 아무리 찾아도 그 발언이 누구 입에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더군.”

“…….”

“그래서 난 모용군이라고 생각하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은 모용군 때문에 홍역을 제법 앓았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이 그의 짓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네.”

제갈문호가 빙긋 웃었다.

“해서, 자네는 모용군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럴 리가요.”

연호정도 씨익 웃었다.

“시기가 꽤 이르잖습니까? 모용군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확신을 못 하겠군.”

“그렇다면 찔러 봐야겠지요.”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네.”

“잘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시겠는가?”

연호정이 광룡부를 놓아둔 채 일어났다.

“직접적인 공격은 좀 그렇고, 돌아서 찔러 보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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