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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59화 (259/963)

259화. 불의 발견 (3)

다음 날.

“이 자리에 서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단상 위에 올라선 연호정이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멸사군이 도열해 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살벌한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연호정이 자신의 옆에 있는 제갈아연을 보았다.

“잘 쉬었냐?”

제갈아연이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작게 말했다.

“이틀을 내리 잤어.”

“지금은 좀 괜찮고?”

“괜찮아 보이냐.”

“아니.”

“알면서 왜 물어?”

“알지만 정신 좀 차리라고. 눈에서 암기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킁.”

하긴, 간만에 멸사군 소속 모든 인원이 모인 자리였다. 피곤하다고 티를 낼 만한 자리는 아닌 것이다.

연호정이 도열한 군병들에게 말했다.

“밥들은 다 먹었지?”

“예!”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연무장을 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연호정조차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릴 정도였다.

‘뭐야, 이놈들.’

목소리에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그 감정 중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기대감이었다.

연호정이 없는 동안, 그들은 묵비와 함께 살 떨리는 수련을 지속했다. 단순히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게 아니라, 말을 몰고 산길을 내달리며 편을 갈라 산악전을 벌이기도 했다.

중상을 입은 사람이 생길 정도로 치열한 수련의 연속이었다. 그런 상처를 입고도 밤이 되면 서로의 잘한 점과 못한 점 등을 토론했으며, 그다음 수련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몸에 익혔다.

묵비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녀는 강자였지만, 중원 무공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깊지 않았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가끔 보여 주는 안목은 탁월했으나, 이 많은 군병의 무공을 하나하나 봐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그녀가 멸사군을 제대로 훈련시키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바로 실전과 결속이었다.

‘잘 다져졌어.’

연호정 자신이 살 떨리는 임무로 고생했다면, 멸사군 역시 목숨을 걸고 수련했다.

‘이제야 진짜 한 몸 같아 보이는군.’

워낙 손발을 많이 맞춰 와서 그런지, 이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뭘 해야 할지를 안다.

하지만 임무를 떠나기 전에는 이 정도의 군기(軍氣)가 없었다.

“묵 부장.”

군병들 가장 앞에 서 있던 묵비가 고개를 들었다.

“네.”

“새삼 고생 많았어.”

“네.”

군기는 철저하지만, 그래도 묵비는 묵비였다. 그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도 연호정을 특별 취급해 주지 않았다.

그게 바로 멸사군이었다. 어중간한 게 아니라, 멸사군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오랜만에 모였지만 좋은 안주에 술이나 한잔하기에는 햇살이 너무 좋지? 오늘은 그간 너희 개인의 무(武)가 얼마나 늘었는지 점검이나 해 보자고.”

군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으로 집단의 기량은 늘었지만, 개인의 기량이 얼마나 늘었는지는 그들 스스로도 몰랐다.

이제 와 멸사군장, 이미 후기지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한 초절정고수가 무공을 봐준다니, 실로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팽만호부터 앞으로!”

“흐음. 열기가 상당하구만.”

멸사군의 전용 훈련장이 가까워지자 추운 겨울 공기가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대장이 와서 그런지 활기가 다르군. 과연 대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이지.”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던 제갈문호.

곧이어 그는, 일대의 공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음?’

후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매서운 살기가 실려 있었다.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살기라니? 다른 어디도 아닌 무림맹에서?

파아악!

단숨에 훈련장을 향해 신법을 펼친 제갈문호.

그때였다.

쾅!

“크아악!”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검사 하나가 하늘을 날아 훈련장 벽에 처박혔다.

쿠웅!

낙법을 구사할 새도 없었다.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한 검사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꿈틀거렸다.

“이건 뭐.”

입을 떡 벌린 채 검사를 보던 제갈문호가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도끼를 견봉에 걸친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검기(劍技)는 엄청 날카로워졌는데, 왜 전에는 안 보이던 허점이 이렇게 늘었어?”

“끄으응!”

꿈틀거리던 윤호가 기어이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안색은 창백했고, 호흡은 무척이나 가팔랐다. 일어서긴 힘든 상태인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연호정이 한옆에 앉아 있던 옥청을 바라보았다.

옥청이 긴장한 얼굴로 일어났다.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스르릉.

부드럽게 검을 뽑아 든 옥청이 진기를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무당을 대표하는 검, 송문고검(松紋古劍)에 푸른빛이 어렸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오호?’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옥청,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맑고 깊어져 있었다.

긴장은 했으되 몸에 힘이 과하게 실리진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완전히 푼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긴장 상태였다.

‘이놈 봐라?’

송문고검에서 피어오르는 혼원기(混元氣)가 고요한 바다처럼 웅장하고 깊은 느낌을 주었다. 과거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뭔가가 달라진 진기였다.

기(氣)란 곧 의념에 따라 움직이며, 집중력에 따라 성질마저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옥청의 혼원기도 그러했다. 과거의 혼원기가 한없이 깊은 이치로 오롯이 구도(求道)를 향해 있었다면, 지금의 혼원기는 완전한 무도(武道)를 위해 살벌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실, 멸사군병 중 실력이 명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 꼽자면 대표적으로 옥청을 들 수 있었다.

성천십삼좌 중 일인, 검선(劍仙) 탁무자의 제자라면 강호 어디에서도 어른 대접을 받을 만한 배분이다. 한데 그만한 배분과 무공으로 연호정의 일초를 받아 내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화이부실(華而不實)이 따로 없었다.

지금의 옥청은 더 이상 그때의 옥청이 아니었다.

‘목적을 달리한 것만으로도 진기의 성질을 바꿔 버렸다. 그렇다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봐.”

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접근하는 옥청.

땅을 박차는 발끝의 움직임이 놀랍도록 경쾌했다. 동시에 관절의 유연성은 엄청나게 뛰어났다.

‘탈력(脫力)!’

옥청이 검을 휘둘렀다.

번쩍!

부드럽게 원을 그린다 싶은 순간, 어느새 직선으로 전면을 가른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쩌어어엉!

광룡부의 창대를 타고 흐르는 진동이 굉장했다.

옥청은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연호정의 무공은 규격 외다. 시작부터 당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퉁! 투퉁!

옥청의 몸이 잔영을 남기며 연호정의 후측방에서 나타났다.

시선을 교란하는 움직임, 무척이나 뛰어난 보법이었다. 두어 달 전에는 보지 못했던 탄력적인 움직임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진기의 성질이 달라졌다고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게 아니야. 하체와 복부를 엄청나게 단련시켜 놨군.’

연호정은 뒤를 보지도 않고 광룡부를 휘둘렀다.

찌이이이이잉!

굉장한 한 수였다.

비할 데 없는 중병인 광룡부가, 송문고검이 그려 내는 태극의 문양을 따라 자연스레 옆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기가 막힌 이화접목(移花接木)의 한 수였다. 형식에 얽매여 동작만 그럴듯했던 과거의 검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비로소 검술(劍術)을 넘어 검법(劍法)다운 검법을 쓰기 시작한 옥청. 이것이 바로 무당파의 대표 절학, 태극혜검(太極慧劍)이었다.

후우웅!

광룡부를 받아넘겼다고 또다시 검을 쓰진 않는다.

재차 검을 휘두르기 위해선 동작에 빈틈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법. 옥청의 좌수(左手)에서 푸른빛 광채가 터졌다.

콰앙!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무당파의 장법, 사상풍뢰장(四象風雷掌)이었다. 무당의 무공답지 않게 막강한 화력으로 일격필살을 노리는 장법이 찰나지간 펼쳐진 것이다.

“좋군.”

물론 연호정은 풍뢰장에 당하지 않았다.

튕겨 나간 광룡부를 왼손으로 잡아채고, 오른손으로 풍뢰장을 막음과 동시에 옥청의 손을 꽉 쥐었다.

“정말 많이 늘었어.”

연호정이 그대로 머리를 휘둘렀다.

퍼억!

“큭!”

옥청의 이마에서 피가 터졌다.

서로의 손이 잡힌 근거리에서 박치기를 구사했다. 근래에는 시정잡배들도 잘 쓰지 않는 우악스러운 한 수였다.

천하의 벽산호장이 이토록 야만스러운 수법을 쓸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옥청은 당황하지 않았다.

솨아아악!

재차 이마를 노리려던 연호정은 재빨리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옥청의 검이 고간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걱!

날카로운 고검에 장포 밑단이 잘려 나갔다.

연호정의 눈이 불을 뿜었다.

터엉!

물러남과 동시에 폭발적인 질주였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한 연호정이 온몸으로 옥청을 들이받았다.

콰앙!

“크윽!”

엄청난 일격이었다.

굴러떨어지는 바위와 정면으로 충돌한 것 같았다. 삼 장이나 날아간 옥청이 재빨리 제운종을 펼쳐 자세를 잡았다.

후욱!

어느새 광룡부를 양손으로 쥐고 날아오른 연호정이 옥청이 선 자리를 힘차게 내리찍었다.

옥청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콰아아앙!

막강한 일격에 연무장 바닥이 갈라졌다.

푸스스스스.

자욱하게 번지던 먼지구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주르르륵.

상단으로 치켜 올라간 송문고검이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내려앉았다. 검날과 광룡부의 경력 여파 때문인지 옥청의 좌측 어깨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목숨은 구했다. 반으로 갈라 버릴 작정으로 내리친 광룡부를 태극혜검으로 흘려 낸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쩌억!

땅에 박힌 광룡부를 뽑아 든 연호정이 말했다.

“여기까지.”

“후욱!”

옥청이 숨을 몰아쉬었다.

“대련, 감사드립니다.”

부상이 꽤 심했지만, 옥청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심지어 어깨에서 흐르던 핏물도 서서히 멎고 있었다. 치솟는 혼원기로 지혈을 시작한 것이다.

대련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무인으로서 자세를 물 흐르듯 보여 준 그였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잘 봤나?”

군병들은 멍하니 옥청을 보았다. 그간 함께 수련해 온 그들도 옥청의 실력이 이렇게까지 늘었는지 몰랐던 것이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하나를 얻기 위해선 하나를 버려야 하는 법이라 했다. 하지만 실전의 묘리를 얻으려다 자신이 익힌 무공의 본질을 잊는 것은 주객전도(主客顚倒)라고밖에 할 수 없어.”

“…….”

“너희 모두 지극히 실전적인 무공을 구사하더군. 하지만 그만큼 실수도 많았다. 그러나 옥청은 아니었어. 옥청은 무당 무공의 근본 위에 실전 감각을 덧씌워 자신만의 무도(武道)를 이뤄 냈다.”

“…….”

“이것이 바로 연무(鍊武)와 실전(實戰)의 합일이다. 모두 고생한 건 잘 알지만, 너희의 본질을 잊은 것은 실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야.”

군병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옥청을 보았다.

“옥청.”

“예, 군장님.”

“고생했다. 정말 인상적이었어.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하면, 조만간 폭발적인 성장의 순간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옥청이 미소를 지었다.

“군장님 덕분입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네가 고생한 게 왜 내 덕분이냐.”

그가 묵비에게 말했다.

“애들 잠시 쉬게 좀 해.”

“네. 어? 근데 어디 가시게요?”

“응.”

연호정이 연무장 너머 대문을 보았다.

제갈문호가 감탄 어린 얼굴로 이곳을 보고 있었다.

“미친 망나니 건으로 오신 모양이야. 슬슬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했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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