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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58화 (258/963)

258화. 불의 발견 (2)

파군각에서의 식사 자리는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연위 덕분이었다. 연위는 평소와 달리 말수가 많았고, 연호정은 그런 아버지께 평소처럼 반응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묵비 역시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간간이 대화에 참여했다. 처음엔 어색하게 밥술을 뜨던 강량도 차츰 분위기에 익숙해진 듯 편안한 심정으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반 시진에 달한 식사가 끝났다.

“어제보다 더 춥군요. 정말 겨울이 오긴 왔나 봅니다.”

가볍게 입김을 부니 허연 김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게 사는 사람에게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흐르지. 나아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한 해가 지나가는 속도도 빨라지게 마련이다.”

연호정은 연위의 말에 깊게 공감했다.

사신무를 연성하고 무림에 나와 흑도에 투신했다. 어느덧 돌아보니 자신은 흑제성을 세웠고, 무림인들은 흑제성주인 자신을 흑암제라는 별호로 부르며 두려워했다.

정말이지 시간이 언제 그리 후딱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심지어 과거로 회귀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또 정신없이 흘러가 버렸다.

‘참 많은 일이 있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말이야.’

연위가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괜찮은 청년이더구나.”

“예?”

“강량이란 아이 말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경험이 적은 게 문제입니다만, 그래도 우직하고 신의가 있는 놈입니다.”

“그래 보이더구나.”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이 그리 쏟아지더니, 오늘은 온종일 하늘이 맑았다. 반짝이는 별들이 무척 아름다웠다.

“어찌 말해 주지 않았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그 청년이 귀철검문의 후계자였다는 것 말이다.”

“제가 그랬나요?”

연위가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

“그 아이의 부모와 형제가 죽고 소속 문파가 멸문했다는 말만 들었다. 직접 소개하기 전까지, 나는 그 아이가 흑도 출신인 줄 몰랐어.”

“제가 깜빡 잊은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원체 바쁘게 사는 아들이지만, 이런 일로 실수할 리가 없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녀석은 괜찮은 놈입니다. 흑도 출신이라고 하여 다 사악한 인간 말종만 있는 건 아니지요.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귀철검문은 우리 백도와 걷는 길이 다를 뿐, 호방한 성정으로 이름이 높았더랬다.”

“알고 있습니다.”

“이 애비를 시험해 보고 싶었느냐?”

연호정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시험할 사람이 따로 있지, 어찌 아버지를 시험하겠습니까.”

“하면 반응을 보고 싶었다는 말 정도로 순화해 보면 어떠냐?”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피식 웃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잘 드러내지 않았지. 하지만 자식이 부모를 속인다고 한들 어떤 부모가 자식의 속내를 모르겠느냐.”

“그렇습니까?”

“내 비록 널 지나치게 엄하게 키운 감은 있었다만, 그렇다고 네게서 눈을 돌린 적은 없었다.”

“…….”

“물론, 너의 느닷없는 변화에 크게 당황한 적은 있지만 말이다.”

느닷없는 변화란 바로 회귀한 그 순간을 뜻하는 것이리라.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그렇게 들으니, 어째 저도 알기 쉬운 놈 같습니다.”

“네가 진심을 보여 준 대상은 다 그리 생각할 것이다.”

정확한 안목이었다.

연호정이 작정하고 속이려 들면 누구라도 속여 넘길 수 있다. 천하의 투왕 양천도 연호정의 감쪽같은 연기에 홀딱 속아 넘어가지 않았는가.

다만 그것은 필요에 한한 경우일 뿐, 연호정 역시 어지간해선 타인을 속이려 들지 않는다.

차라리 대놓고 박살을 낸다면 모를까.

“아버지.”

“그래.”

“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성질머리 급하고 배배 꼬인 놈입니다.”

“배배 꼬였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다만.”

“뭐, 그게 그거죠.”

“허허.”

“하지만 성격 더러운 저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파벌과 문파로 적아(敵我)를 구분할 순 있지만, 같은 소속이라도 사람의 본성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요.”

연위의 얼굴에 흡족함이 어렸다.

“장하구나. 이 애비는 그것을 깨닫는데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허비했다. 너는 나보다 수년은 빠른 셈이다.”

연호정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만일 그가 사신무를 연성하지 않았다면, 흑도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흑제성을 세우고 백도 무림과 한판 승부를 겨뤄 보지 않았다면, 영영 고정 관념에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대단하신 겁니다.’

연호정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마음의 소리를 억지로 삼켰다.

“흑도 출신이라고 다 나쁜 사람인 건 아닙니다. 반대로, 백도 출신이라고 다 협의가 넘치는 것도 아니지요.”

“물론이다.”

“그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제가 어떤 별종들과 친분을 나눌지 모릅니다. 흑도 출신일 수도 있고, 삼류 무관의 자제일 수도 있으며, 점쟁이나 거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연호정이 다소 떨리는 눈으로 연위를 직시했다.

“그래도 제 친구들을, 저 강량처럼 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연위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애비는 저 강량이란 아이와 제대로 된 친분을 나누지 못했다.”

“…….”

“그러나, 강량도 비아와 같이 대할 것이다. 지금껏 보기론 능히 사귀어 볼 만한 아이 같다만, 세상일이란 또 모르는 법이다.”

“…….”

“내 아들을 믿으니, 아들의 친구도 내 자식과 같이 여길 것이다. 그러나 관계에서 신뢰가 싹 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대화가 필요한 법이다.”

“압니다.”

“그래, 그것만 알아주면 되었다.”

연호정이 재차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들의 친구이니, 자신 역시 아들처럼 대하겠다.

그러나 연위도 사람이다. 아들의 친구인 것과 별개로, 그 자신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즉, 어떤 친구를 데려와도 받아는 주겠으나 아버지인 자신과의 시간도 필요하니, 그 부분만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결국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 연호정은 아버지의 말씀에 마음이 한결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연위가 평상에서 일어났다.

“더 지켜봐야겠다만, 네가 왜 저 아이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겠다. 물론 앞으로 함께 발전하기 위해선 제법 노력을 해야겠지.”

“그래야지요.”

“자잘한 부분은 이 애비가 도와주마. 물론, 저 아이가 가르침을 받겠다고 한다면 말이다.”

“강동제일고수 판관대협의 가르침입니다. 천하의 누가 있어서 그걸 거부하겠습니까?”

“말은 좋다, 이놈.”

연위가 옷깃을 여몄다.

“내공이 융통무애하여 어지간한 추위는 느껴지지도 않을 테지만, 찬 바람 너무 오래 쐬진 말거라.”

“알겠습니다.”

“이만 가마.”

연위가 파군각 대문으로 향했다. 봉공 업무로 따로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음?”

“사실…….”

연호정은 잠시 망설였다.

기실, 지금까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많았다. 아버지와의 유대가 깊어진 이후에도, 아버지의 성격상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실 것 같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믿어 주시는 것도 모자라, 한 명의 당당한 무사로서 인정해 주시는 지금이라면.

어떤 별종을 데리고 와도 아들처럼 대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눈곱만큼의 거짓도 없는 진심으로 그리 말씀해 주신 지금의 아버지라면.

그리고, 그간의 정쟁으로 지닌바 지혜를 능란하게 쓰기 시작한 연가의 가주라면.

그렇다면,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내게 따로 말할 것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가만히 아들의 얼굴을 살피던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네가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그 비밀은, 어쩌면 네가 가진 가장 큰 비밀일는지도 모른다.”

“알고 계셨습니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생각보다 알기 쉬운 녀석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란 한번 뱉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네 나름대로 고뇌가 있었겠지만, 그 비밀이 진정 너의 가장 큰 비밀이라면, 대상이 부모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오늘은 듣지 않겠다.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진정 이 애비한테 털어놓아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 때, 바로 그때 말해 주거라.”

연위는 그 말을 끝으로 파군각을 나섰다.

아버지가 나간 대문을 보던 연호정이 다시 평상에 앉았다.

“진정 털어놓아도 괜찮다는 확신이 들 때 말해라…….”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별이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그런 확신은 필요치 않습니다. 어떤 헛소리를 하더라도 믿어 주실 걸 압니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다만, 그걸 지금에야 알았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식은 부모에게 확신을 바랐다.

‘나도 멀었어.’

피비린내 가득한 아수라장을 뚫고 성장했지만, 결국 그게 전부다.

흑도의 제왕으로 군림했지만, 자신은 아직도 어렸다. 적어도 아버지 앞에선 신들린 무공도, 약점을 간파하는 전술안(戰術眼)도, 기가 막힌 계책도 필요치 않았다.

어쩌면 지금껏 자신이 아버지께 보여 주었던 모습들 대부분이, 내가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걸 자랑하려는 어린애의 치기 어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회.’

자신이 어떻게 회귀했는지, 하늘이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냈다면 왜 돌려보냈는지를 줄곧 궁금해했다.

지금까지는 중원이 불바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진정 그걸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라도 편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은 광신삼교나 구주명가를 막기 위함만이 아니라고.

그 자신에게 있어 가장 큰 가치, 바로 다시 찾게 된 가족과 나누지 못했던 신뢰를 쌓기 위함이라고.

“커험!”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강량이 나와 있었다.

“밥은 다 먹었냐?”

“그렇소.”

“묵비는?”

“누님께서 직접 치우겠다고 하셨소. 나더러는 이만 나가 보라고…….”

연호정이 뜨악한 얼굴로 말했다.

“누님?”

“그렇소.”

“묵비가 왜 네놈 누님이냐?”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분이더이다. 그럼 당연히 누님 아니오?”

……저거 생각보다 넉살 좋은데?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그래서 말이오.”

“하지 마.”

“연 공자는 내 은인인데다가, 나보다 한 살 많기도 하잖소.”

“하지 말라고.”

“그래서 그냥 형님이라고 부를 생각이오.”

연호정이 양팔을 벅벅 긁었다.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물론 흑암제 시절에도 강량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불렀지만, 이런 과정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떠나기 전까지 잘 부탁드리겠소.”

“알았으니까 형님이란 호칭은 집어치워.”

“싫소.”

내일 하늘이 무너진대도 형님이라 부를 기세였다. 한 번 하겠다 마음먹으면 죽어도 하고야 마는 그였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당분간은 여기서 푹 쉬고 있어.”

“어? 어디 가시오?”

“묵비와 여기저기 다닐 곳이 있어.”

“여기저기라니? 무림맹 안에서?”

“그래.”

연호정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은 그의 눈빛에 강량은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 나간 미친개가 슬슬 움직일 때가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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