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불의 발견 (1)
“부주님. 모용가 측에서 보낸 손님이 당도하였습니다.”
태사의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양천이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예.”
쿠구구궁!
문이 열리며 작고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쁘지 않군.’
방년에 이른 나이라고 들었다.
그 나이를 생각하면 상당한 무공을 쌓은 셈이었다. 불세출의 천재라 할 정도도 아니고 실전을 겪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명문가 출신 아니랄까 봐 일신의 무공이 제법 봐줄 만은 했다.
사박.
계단 끝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에 은근한 긴장이 묻어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까마득하게 어린 후기지수가 당대 강호의 전설이라는 성천십삼좌의 일인과 만나는 자리였다.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으리라.
‘역시 다르구나.’
양천의 얼굴에 씁쓸함이 일었다.
‘정, 그만한 녀석은 달리 없었어.’
정의 발소리는 그 울림부터가 달랐다.
긴장이 없지는 않았지만,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당당한 위기(威氣)를 뿜어냈었다. 마치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절대자라도 된 양, 타국의 제왕을 만나러 가는 거인처럼 강렬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제아무리 일신의 무력이 대단하다 한들, 성천십삼좌를 대면하는데 그 정도 배포를 보여 줄 사람은 천하에 몇 없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은 잘 키우면 십 년 내로 천하를 논할 거인으로 성장할 게 분명한 천재였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는 여아는 십 년은커녕 삼십 년을 가르쳐도 천하를 논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모용군과의 연계를 위한 교각 역할을 할 아이였다. 온전한 자신의 사람이 아니니 딱히 실망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그만큼 정이 준 인상이 강렬했다는 뜻이리라.
“모용세가의 모용연화가 흑도의 제왕께 인사드립니다.”
양천이 눈을 떴다.
태사의 아래, 붉은 융단 위에 엎드려 절을 올리는 가냘픈 여인이 있었다.
‘그래도.’
목소리에서 침착함이 묻어 나온다.
긴장은 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아이였다. 정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보면 저 아이 역시 뛰어나다는 평을 들을 만한 인재이리라.
가만히 모용연화를 내려다보던 양천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모용연화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흠.’
아름다운 외모는 둘째였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계집아이의 눈빛이 제법 당당했다. 흑백이 또렷한 눈빛 속에는 일말의 기대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과연, 제 입으로 뛰어난 자식이라 말한 이유가 있었군.’
사람은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다.
눈빛이 생각보다 더 괜찮다. 정에 대한 아쉬움이 커서 그렇지, 직접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간의 사정은 네 애비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믿겠다.”
모용연화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부족한 역량이나마 묵룡부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괜스레 장난기가 발동했다.
“혹, 이 말도 들었느냐? 네 애비가 조금이라도 수상쩍게 행동할 경우, 너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천하의 투왕 양천이 하는 말이었다. 결코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저 역시 백도 무림의 후기지수로서 나름의 인정을 받았던 인재입니다. 그런 것은 듣지 않아도 알지요.”
“호오.”
모용연화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양천을 보았다.
나름대로 억제하고 있지만, 양천의 존재감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모용연화는 그의 눈을 당당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부주님께서 저를 어찌 보실지는 모르겠으나, 저 역시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온 길입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고 묘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올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하냐?”
“그렇습니다.”
“궁금하구나. 네 애비가 널 어떻게 설득했을지.”
“설득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께서 저를 필요로 하니, 저 역시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네 말마따나 이곳은 네 묘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이다. 겁이 나지 않았느냐?”
“목숨을 걸고 왔으니,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오호?”
모용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애써 짓는 미소. 이마엔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양천은 그녀의 그 어설픈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로에 고생이 많았다. 다시 부를 때까지 거처에서 쉬도록 하라.”
“감사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라 하였지?”
“연화, 모용연화라 합니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모용연화가 공손히 절을 올리고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양천이 턱을 괴었다.
“……백도에는 인재가 참 많군.”
* * *
벽산연가.
오십여 년 전 혜성처럼 나타난 강호의 명문가로서, 세력은 작았지만 지닌바 무용과 협기(俠氣)가 천하를 논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무림세가였다.
백도든 흑도든, 무림은 본디 보수적이고 타인의 평가에 박하다.
그런 무림에서 불과 반백 년도 안 되어 강호 최정상 무림세가로 이름을 떨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당연히 흑도에서도 벽산연가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백도의 신흥강자란 곧 흑도의 새로운 적이라는 뜻이니까.
그리고 강량은 흑도제일을 논하는 명문가의 후계자였다. 당연히 연가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듣기는 했지만.’
연호정은 자신이 무림맹 멸사군의 군장이자 벽산연가의 자제라고 말했다. 무림맹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연가주와도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소문만 무성하던 연가의 가주와 실제로 마주하게 된 심경은 필설로 형용키 어려웠다.
‘판관검 연위. 강동 최강의 검사이자 연가의 귀신 같은 검객들을 이끄는 수장!’
강량이 침을 삼켰다.
“뭐 해?”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먼저 인사를 건넸으면, 너 역시 인사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냐?”
강량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강량이라 합니다. 저는…….”
잠시 망설이던 강량이 이내 눈을 감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흑도제일의 검문(劍門), 귀철검문의 후계자이자 귀혈(鬼血)을 품은 유일무이한 생존자입니다. 연가의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본디 자신의 소속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이 정도 거인과 마주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소속을 숨기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나 마찬가지였다.
나아가, 자존심 문제도 있었다.
‘내 비록 멸문한 검문의 후계자이나, 자부심만큼은 죽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나올까.
과연 협의의 상징이라는 벽산연가의 가주는 흑도제일검문의 후계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여로에 고생이 많았네.”
강량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들어 연위를 보았다.
강동제일검호의 표정은 몹시 담담했다.
“그간의 얘기는 대충 들었네.”
“…….”
“부모와 형제를 잃은 심정, 내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네. 다만 내 아들을 통해 이리 연이 닿았으니, 비록 내 집은 아니네만 우리 거처에서 편하게 지냈으면 싶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검문주께서 아드님을 제대로 가르치셨군. 이리 탄탄한 기본기를 익힌 후기지수는 몇 본 적이 없었어. 큰애도 자네만큼은 아닐세.”
연호정이 툴툴거렸다.
“그건 좀 자존심 상하는 말인데요.”
“시끄럽다. 그렇게 술독에 빠져 살았는데 기본기가 탄탄할 수가 있겠느냐?”
“이왕이면 검(劍)을 잊기 위한 고행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말은 잘하는구나.”
연위가 쩍 갈라진 나무를 보았다.
“잡념이 많은 것 같군. 그럴 때는 수련도 좋지만, 푹 쉬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네.”
“……예? 아! 예에.”
“애꿎은 나무는 그만 괴롭히고 거처로 가세나. 밥도 안 먹은 것 같은데, 배부터 채우세.”
“아! 저,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 더 수련을…….”
“연장자가 아닌 검도(劍道) 선배로서 하는 조언일세. 자네의 내공은 안정적인 흐름보다 폭발적인 출력을 우선으로 하는 것 같은데, 그리 불안한 상태로 휘둘러 봤자 감만 망가질 것일세.”
“……!”
연위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애비가 먼저 가서 숙수에게 말해 놓겠다. 함께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연위가 몸을 돌려 파군각으로 향했다.
강량은 멍하니 연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세상사에 통달한 선비의 그것과 같았다.
“뭐 해?”
깜짝 놀란 강량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시큰둥한 얼굴로 검을 가리켰다.
“칼집에 칼 심어, 인마. 여기 대충 정리하고 가자고.”
“……어떻게 된 거요?”
“뭐가?”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질 않은 모양이었다. 강량이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저리 담담하실 수 있소?”
“아버지?”
“그렇소.”
“이거 웃기는 놈일세. 그럼 긴장할 건 또 뭐야? 네깟 실력으로 덤벼 봤자 일 초면 개박살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귀철검문의 후계자요.”
“그래서 뭐?”
“흑도제일을 논하던 검문이 바로 귀철검문이란 말이오.”
“아, 어쩌라고!”
“벽산연가에게 있어 귀철검문은 명백한 적이 아니오?”
“너, 나 모르는 새에 본가 사람한테 칼침 놓은 적 있냐?”
“없소! 지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소! 흑도와 백도는 명백한 적이오! 비록 멸문했다지만, 연 공자 아버님의 태도는 너무……!”
“담담하다고?”
“그렇소!”
연호정이 고개를 삐딱하게 꼬았다.
“담담하면 안 되나?”
“……?!”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테니 미리 말해 주는데, 우리 아버지는 상당히 답답한 분이다.”
“……에?”
“말하자면 격식을 따지는 분이란 말이다. 예법을 지키지 않으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시기도 하고, 심지어 강호에 나간 아들이 일이 바빠서 서신을 못 보내도 호통을 치시지.”
“컥!”
“그래도 내가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
“사람을 대하실 때는 언제나 진심인 분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소문 따위에 현혹되지 않고, 그 사람의 본질을 보고 파악하시는 분이란 말이다.”
강량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다. 말이 쉽지,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믿는다. 그리고 나는 너를 무림맹으로 데리고 들어왔어. 네가 흑도든 아니든, 널 존중할 이유는 그걸로 충분해.”
“…….”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정리나 해, 이 새끼야. 그새를 못 참고 박살을 내 놨네, 썅.”
연호정이 투덜거리며 뜯겨 나간 잡초와 부서진 나뭇조각들을 숲으로 던졌다.
강량은 흔들리는 눈으로 연위의 뒷모습을 좇았다. 어느새 연위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본다.’
연호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해, 인마! 빨리 안 치워?!”
“헉! 아, 알았소.”
강량이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양 후다닥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