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56화 (256/963)

256화. 동풍(凍風)의 시간 (6)

“형님.”

“오랜만이구나.”

웃으며 모용우를 보던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내, 봉공회의에서 네가 무종지벽을 돌파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솔직히 긴가민가하였거늘, 진정 무종지벽을 돌파했구나!”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다 형님 덕분입니다. 건곤무해가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어찌 무종지벽을 돌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놈아, 무종지벽이 고작 무공의 수준에 따라 넘을 수 있는 경지였다면 천하에 초절정고수가 넘치도록 많았을 것이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흡족했다.

“장하다. 참으로 장해. 내 너를 믿고야 있었다만, 이렇게 빨리 발전할 줄은 몰랐다. 과연 내 동생답구나.”

들어서 아는 것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법이다.

모용군은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모용우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 모용군을 보며, 모용우는 형용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형님.’

연호정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들통날 거짓말 따위 늘어놓아 봤자, 신뢰만 잃을 뿐이니까.

그렇다면, 형님은 정말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뜻이다.

‘대체 어디까지 가시려는 겁니까.’

무림 고위급 인사 중 제 이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사람이 어디 모용군 하나뿐이겠는가.

심지어 모용군은 권력을 위해 피를 나눈 형제들까지도 내친 냉혈한이었다. 막내인 자신은 절강지부로 귀양을 보낸 것에 가까웠지만, 나머지 형제들은 하나같이 죽거나 비참한 꼴을 당했다.

모용군은 그런 사람이다. 모용우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용군을 몰아내고 모용세가를 정도(正道)의 가문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모용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누리지 못했던 형제간의 우애에 취해, 투명하게 봐야 할 것을 못 본 것이다.’

새삼 모용군을 탓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형님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저도 제대로 할 것입니다, 형님.’

씁쓸함으로 가득했던 모용우의 눈빛에 강단이 어렸다.

‘저 역시 이 진흙탕 싸움에, 서슴없이 발을 들일 각오가 되었습니다.’

그때, 모용군이 물었다.

“음? 한데 어째 표정이 영 좋지 않구나. 혹 어디가 아픈 것이냐?”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형님의 얼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윤리와 도덕조차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제 사람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흔쾌히 내줄 수 있는 사람.

모용우는 고개를 숙였다. 차마 형님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형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이제야 안도했습니다.”

“하하하! 이놈아, 그래도 우형(愚兄)이 어디 가서 쉽게 당할 만큼 만만한 사람은 아니니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모용군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비록 딸이 동생과의 만남으로 망가졌지만, 이 무뚝뚝한 동생이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

양천과의 거래를 위해 딸까지 내놓은 판국이었다. 자신과 손을 잡은 사람이야 많았지만, 이렇게 진실되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더 소중했다.

그리고 더 긴장이 되었다.

‘너의 걱정 가득한 진심을 내 어찌 모르겠느냐. 그러나 혈육조차 믿지 않는 나란 짐승의 천성이, 너의 그 진심을 마냥 순수하게 볼 수 있도록 놔두질 않는구나.’

모용우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 줄 것이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다.

성천십삼좌의 공격보다도 무서운 것이 믿고 있던 자의 배신이다. 모용군은 모용우를 향한 신뢰가 짙어질수록, 동시에 그를 향한 긴장을 조였다.

“그나저나, 동생이 무종지벽을 돌파하여 희대의 고수가 되었거늘 축배가 없어서야 쓰겠느냐. 간만에 한잔하자꾸나.”

“여로에 피곤하실 텐데…….”

“허허, 제아무리 피곤하다 한들 이 생생한 기쁨의 순간을 그냥 넘길 수 있겠느냐? 혹, 따로 일이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 넘치는 그 미소는 형제를 향한 진심 어린 애정과 대의를 향한 각오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오히려 제가 먼저 한잔 청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하하! 좋다! 한잔하자!”

잠시 후,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모용군이 모용우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내 자세히는 알아보지 못했다만, 맹 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후기지수에 대한 평이 완전히 바뀌었더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명가의 대공자가 뇌옥에 갇힌 후,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는 일룡삼봉(一龍三鳳)으로 축소되었다. 말하자면, 네 명의 청춘 남녀들이야말로 차세대 무림을 이끌어 갈 최고의 젊은이들이라 인정받은 것이지.”

모용우가 담담히 말했다.

“그 말에는 어폐가 있군요. 당대 최연소로 무종지벽을 돌파한 멸사군장이 있잖습니까.”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산호장 연호정, 멸사군장이 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연호정의 존재에 경악하면서도 그를 경계한다. 그처럼 규격을 벗어날 정도로 뛰어난 자는 찬사보다 질투를 받게 마련이니까.”

“그렇지요.”

이미 직접 겪어 본 바였다. 모용우가 고소를 지었다.

모용군이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규격 외의 천재가 또 한 번 무림을 뒤흔들었다. 그게 바로 너다.”

“사실, 연 군장과 비견될 만한 일은 아닙니다. 저와 연 군장의 나이 차이는…….”

“중요한 것은 연호정이나 너나, 아직은 후기지수(後起之秀)라는 틀에 묶여 있다는 것이지.”

모용군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가 어렸다.

“상식을 초월한 천재가 한 명 탄생하면 사람들은 경계하고 질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천재가 복수(複數)가 될 때, 세인들은 비로소 인정하고야 말지.”

“그렇군요.”

“호신쌍위(虎神雙位).”

“예?”

“탕마군장 모용우를 건곤호장(乾坤虎將)이라 부르며 당대 후기지수 최강의 검사(劍士)라 하고, 멸사군장 연호정을 벽산호장(碧山虎將)이라 일컬으며 당대 후기지수 최강의 전사(戰士)라 한다.”

“벌써 그런 별호가 붙었습니까?”

“무림맹 안에서 도는 소문이다. 맹원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나기 시작했으니, 조만간 천하 전체에 그 대단한 명성이 퍼질 것이다.”

모용군이 재차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그 드높은 자리에 연호정이 함께 선 것은 마땅치 않다만, 네가 무림 최고가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쏘냐.”

건곤호장 모용우.

그리고 벽산호장 연호정.

무림맹 최초의 유군 부대의 대장 둘이 나란히 강호 최정상 후기지수로 불리게 되었다. 모용우는 괜스레 기분이 얼떨떨해진 것을 느꼈다.

“너무 거창하군요. 제 무공은 아직 연 군장에 비해 손색이 있습니다.”

“안다. 연호정, 그놈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나 네 재능과 노력이 그리도 출중하니, 조만간 연호정에 뒤지지 않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지요.”

“또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다. 네 무공이 연호정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는 하나, 이미 같은 급으로 엮이고 있다. 결국 사람들은 너희 둘을 동격으로 여길 것이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저를 어찌 보는지를 떠나,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그저 정진하고 또 정진할 수밖에요.”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너 역시 알 것이다. 소문이나 명성이란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때마침 내년에 무림맹주 선거가 열린다.”

“……!”

“그런 때에 네가 최강의 후기지수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으니, 나 또한 네 덕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제 명성이 형님께 도움이 된다니,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크하하하! 이놈아, 그저 그렇다는 말이다. 내게, 그리고 본가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네게 가장 좋을 일이다.”

모용군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았다. 정말 고생 많았어. 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감사합니다.”

모용우는 알고 있었다. 충분한 능력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형님은 결코 자신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자랑스럽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사한 평가다.

그러나 모용우는 더 이상 모용군의 진심 어린 칭찬과 흡족한 표정에 흔들리지 않았다.

“형님.”

“말하거라.”

“이제 형님께서 돌아오셨으니 무림맹이 또 한 차례 흔들리겠군요.”

“허허허, 나라는 존재 하나로 맹이 흔들려 준다면야 그 또한 자랑스러워할 일이지.”

“게다가 형님 말마따나, 내년에 무림맹주 선거가 시작됩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형님께서 맹주 선거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셨다는 것만은 압니다.”

“물론 그랬다만.”

모용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저 역시 본격적으로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어떤 일이라도 맡겨 주십시오. 그게 무슨 일이든, 적어도 형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비로소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일 각오를 한 모용우.

그런 동생의 각오를 생생하게 느끼며, 모용군은 마음이 한층 더 뿌듯해졌다.

“안 그래도 네게 맡기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 * *

쉬이이이익!

묵직한 강검(强劍)이 허공을 가르는 속도가 몹시도 빨랐다.

경쾌함마저 느껴지는 검법이었다. 내공을 실어 검경(劍勁)을 발산하거나 일정한 틀에 묶인 초식은 아니었지만, 속도와 무게감만으로도 무서운 검결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부족해.’

강량의 얼굴에 초조함이 일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족해.’

무림맹으로 들어온 후, 꼬박 하루를 거처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엄청나게 긴장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맹의 고위급 인사와 친분을 맺었다 한들, 그는 흑도제일의 명문가 출신 후기지수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평생을 적이라 생각했던 단체, 말하자면 적지의 핵심부로 들어온 셈이었다.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강량은 천성적으로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긴장했다고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떨고 있을 만큼 소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무(武)였다.

‘그는 달랐다.’

근래 들어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던 무(武)는 단연코 연호정의 무공이었다.

같은 검법을 쓰는 패율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비단 무공의 수준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천고의 절학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야. 그러나 정작 초식을 쓰지 않아도, 적시에 도끼를 휘둘러 적을 죽이거나 밀쳐 내는 등 전장(戰場)을 휘어잡았다.’

강량의 얼굴이 붉어졌다.

단순히 몸이 힘들어서만은 아닌 듯했다.

‘그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에도 싸움을 지배하고 있었다.’

검법을 쓰는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닮고 싶었다.

그 단호함과 병기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리고 어떻게 해야 싸움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아는 궁극의 안목.

연호정은 강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대단한 싸움꾼이자 무사였고, 동시에 전사였다.

퍼억!

두툼한 검날이 꽤 굵은 나무 한 그루를 반으로 쪼갰다.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멍청한 놈아. 도끼처럼 찍어서 쪼개지 말고 베어서 쪼개란 말이다.”

스스로를 향한 비판이었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제대로 집중을 못 한 거야. 하지만 그 또한 내 기량의 일부다. 변명할 필요 없어.’

한 차례 숨을 크게 몰아쉰 강량이 재차 자세를 잡았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어떻습니까, 아버지?”

“흐음.”

“꽤 괜찮지 않습니까?”

“꽤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만.”

“그 정도입니까?”

“너는 사람을 평할 때 너무 박한 감이 있다. 맹 내 후기지수 중 기량이 뛰어난 자들이 많지만, 저 청년만큼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강량이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곳에는 연호정과 연위가 서 있었다.

“헉! 다, 당신?”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좀 바보 같기는 합니다.”

“이놈, 면전에 대고 그 무슨 말이냐.”

가볍게 연호정을 타박한 연위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반갑네. 호정의 애비일세.”

“……예에?”

“당대 벽산연가의 가주, 연위라고 하네.”

강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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