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동풍(凍風)의 시간 (5)
“그랬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뭐, 그답긴 합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뱀 같은 자다. 귀환하자마자 회의를 열더니만 대뜸 분위기를 흐리려 하다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 아니더냐.”
“모난 돌이 정을 맞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저도 생각 없이 날뛰긴 했지요.”
“그리 생각하지 말거라. 정녕 천하의 대의를 위해 모였다면, 차후 무림의 동량이 될 후기지수를 보며 씁쓸해할지언정 물어뜯으려 해서는 아니 되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적어도 백도의 어른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위가 탄식을 토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상을 꿈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법이다. 현실은 인정하되, 언제나 더 나은 길을 모색해야 발전이 있는 법 아니겠느냐.”
이게 바로 연위와 모용우의 차이였다.
모용우는 현실을 인정하는 단계에 있었고, 연위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상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연호정은 아버지의 사상에 동감했다.
‘그렇습니다. 당장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해서 현실에 안주해 버리면, 결국 매몰될 뿐이지요.’
연호정 역시 연위와 같았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자였다. 언제나 다음을 생각했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다.
물론 방식의 차이는 컸지만.
“어찌 되었든, 모용군이 그런 식으로 보고를 올렸군요.”
“그래.”
연위가 눈을 빛냈다.
“자, 이제 들어 보도록 하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용군이 어떤 협잡으로 너희를 못살게 굴었는지 내 속속들이 들어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그때였다.
‘……?!’
연호정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연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이럴 줄은 몰랐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먼저 찾아오다니, 참으로 대책 없는 자로다.”
연호정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대책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것저것 다 싸 들고 왔는지는 만나 보면 알겠지요.”
연호정의 시선이 향한 창밖.
파군각 대문 너머에서 모용군이 걸어오고 있었다.
* * *
“흐음.”
모용군이 방을 둘러보았다.
“아주 단출하군. 침상 하나에 탁자와 의자, 그리고 병장기뿐이라.”
“그 이상 필요한 게 없소.”
“자네답군. 언뜻 황량해 보이지만 꼭 필요한 것만 구비해 놓았어.”
“그렇소.”
“도자기라도 하나 놓지 그러나?”
“내가 심미안이 없는 편이라. 돈도 돈이고.”
“쯧,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다치지 않고 잘 돌아오셨구려.”
모용군이 마주 웃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는 정말 꼼짝없이 당하는 줄 알았지 뭔가?”
“그러게 잘하시지 그랬소.”
“이 이상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 건가? 섭섭하군.”
“재미없는 농담이외다.”
“하하하!”
모용군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연가주께서는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겐가? 급하게 나가시더구만.”
“비위가 좋은 편이시긴 한데, 나 정도는 아니라서 말이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한테 냄새라도 나나?”
상당히 여유로운 대응이었다. 자존심 강한 모용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연호정은 그런 모용군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먼저 찾아왔다?’
모용군은 상대를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드는 데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모용군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또 다른 자존심이었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법이며, 정치에서 아쉬운 쪽은 자연스레 약자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용군은 언제나 강자였다. 과거, 안휘혈궁 건으로 먼저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그때의 모용군은 연호정을 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힘 싸움이 가능한 정치 숙적.
그런 숙적에게 처음으로 먼저 찾아왔다. 이번만큼은 연호정도 모용군의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한데 자네, 너무하는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전에 내가 좋은 술을 대접하지 않았나. 내 비록 기별도 없이 왔지만, 차 한 잔도 내어 주지 않을 셈인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기다리시오.”
잠시 후, 연호정이 술 두 병과 술잔 두 개를 가져왔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주(火酒)?”
“이해해 주시오.”
“내 어지간하면 이런 말 안 하는데, 돈이 있으면 좀 쓰게. 아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네.”
“다른 데에 많이 쏟아붓고 있소.”
“허어.”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지. 한 잔 주게.”
연호정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모용군 역시 연호정의 잔을 채웠다.
“자, 시원하게 들이켜 보세나.”
동시에 잔을 비운 두 사람.
담담한 연호정과는 달리 모용군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독하군. 향도 이상하고.”
“익숙해지면 마실 만하오. 싼 맛에 취하기 좋지.”
“또 있나?”
“많소. 열댓 병 사다 놨으니까…….”
“내게 전해 주지 않은 정보, 분명 더 있을 텐데.”
뜬금없이 임무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보?”
“그렇다네. 자네가 분명 말하지 않았는가. 시간 좀 끌어 달라고. 극비 정보를 빼내 오겠다고 하였어.”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똑똑하신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 알잖소? 당신 뒤통수 한 대 날리기 위한 계책의 일부였다는 거.”
“흐음.”
“그런데도 이리 멀쩡히 살아 돌아오셨다……. 사실, 양천이 직접 움직였을 거라 예상했는데 말이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그랬군.’
이놈은 분명 거기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양천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대로 자신을 묻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까지 내다본 게 분명했다.
‘괴물 같은 놈.’
정말 무서운 놈이 아닌가.
묵룡부에서 어떻게 나올지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지 않은 이상 그런 계책을 낼 수가 없다.
‘대체 이놈, 정체가 뭔가?’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연호정은 이상할 정도로 흑도 무림에 익숙했다. 옆에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의 대응과 십이지신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비록 흑도의 무뢰배들이지만, 그들 역시 한 단체의 수뇌부급이다. 특히 양천은 백도의 어떤 고수보다도 압도적인 무공과 안목의 소유자였다.
연호정은 고작 몇 번의 만남으로 양천의 신임을 얻었고, 묵룡부 최고 중책 중 한자리를 꿰찼다.
양천의 성격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면 언감생심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이 위험할 테니까.
‘이놈은 조직도를 만들던 그 순간부터 정보부장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을 가졌어.’
연호정은 흑도의 정보원들을 끌어들여 이목을 집중시키고, 당상아의 존재를 각인시켜 흥미를 유발했으며, 양천과 직접 만나 도박판 위에 조직 개편도를 올려놓았다.
그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이었겠지만, 동시에 자신이 중책을 맡을 것임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놈에게는 들켜선 안 될 물증이란 것이 있어.’
그것은 직감이었다.
연호정이 모용군의 생존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면, 모용군 역시 연호정이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우친 것이다.
그간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의 한계를 가늠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무엇을 노리는지, 무엇을 숨기는지를 샅샅이 파헤치는 식의 승부로 접어든 것이다.
“그래서, 이미 모든 정보를 넘겼다?”
“극비 정보를 따로 빼낼 이유가 없잖소?”
“또 모르지. 사업 관련 문서라도 가져갔을지. 경제 관련 문서라면 그 자체로 보물 중의 보물, 묵룡부가 눈독 들이는 걸 연가가 미리 선점한다면 큰돈을 벌 수도 있는 것이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진심일세. 물론 자네 배포를 생각하면 그런 잔망스러운 짓을 할까 싶긴 하네만.”
“잘 보셨소.”
“설마하니, 이번 임무의 지휘권자이자 모용세가의 가주를 죽이려 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모용군의 눈이 차가워졌다.
“내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나? 아닐세. 나는 선을 넘지 않았어. 하지만 자네는 다르더군. 자네는 이번에 분명 선을 넘었다네.”
“그런 추상적인 얘기는 사양이오. 분명한 것은, 당신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고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뿐.”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 생각하시오? 미안하지만,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은 미처 전부 드러내지 못한 발톱뿐이외다.”
“…….”
“발톱 두어 개로 찢어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멀쩡히 잘 살아 돌아오셨소. 하니 어쩌겠소? 남은 발톱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드는 수밖에.”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흙탕 싸움으로 가자?”
“언제는 우리 싸움이 깨끗했소이까?”
“적어도 암묵적인 규칙은 있었지.”
“먼저 규칙을 깬 건 당신이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네.”
“그러니 이제부터는 조금 더 긴장하시구려. 언제 어디서 도끼로 찍어 버릴지 모르니까.”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잔을 두들겼다.
“잔이 비었네.”
연호정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수법, 상당히 인상적이었네. 같은 수법에 또 당할 내가 아니니, 다음부터는 조금 더 획기적인 계책을 깔아 두어야 할 것일세.”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더럽게 싸우는 판에 획기적인 계책 따위는 필요치 않소.”
“호오, 그런가?”
“그리고 개싸움은 내 전문이외다.”
모용군이 잔을 들었다.
“한잔하세.”
찌이잉!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그대로 술을 비웠다.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접 잘 받았네. 자네 말마따나 몇 잔 마셔 보니 익숙해지는군.”
“화주의 매력이지.”
“별 영양가가 없는 대화였지만, 역시 자네와의 대화는 재미가 있어. 풀어졌던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해지는 것 같아 좋군.”
“뭐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오.”
“이보게, 호정.”
“말씀하시오.”
모용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정치가는 당한 걸 잊지 않는다네. 이번 한 수, 꽤나 아팠어. 제대로 갚아 줄 생각이니 준비 단단히 하고 기다리게.”
연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에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더이다. 더 잔혹하게 다뤄 줄 걸 그랬나 후회했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와 주니 차라리 고맙소.”
“자네는 참 여전하군.”
“그 말, 그대로 돌려주겠소.”
모용군이 몸을 돌렸다.
“이만 가겠네. 나중에 또 보세.”
“그럽시다.”
그렇게 모용군이 방을 나섰다.
가만히 술병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점차 멀어지는 모용군의 뒷모습,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마치 사람에게 들러붙은 귀신처럼 보였다.
“……만났군.”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인간, 양천을 만난 거야.”
더 놀라운 것은, 양천을 만나고도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분노에 눈이 먼 양천과 마주하고도 살아 돌아왔다……. 어떻게? 못해도 세 합이면 죽일 수 있는 약자를 투왕씩이나 되는 인간이 왜 살려 줬을까?”
답은 하나다.
“거래했군.”
연호정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래, 산산조각이 난 거래를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