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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53화 (253/963)

253화. 동풍(凍風)의 시간 (3)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거칠게 흔들었다.

쿵!

땅을 찍은 광룡부가 강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모용우는 새삼 광룡부가 주는 위압감에 혀를 내둘렀다.

“전에 봤을 때도 생각했네만, 그런 병기를 쥐고 휘두르다니 정말 대단하구먼.”

“손에 익으면 이만한 놈도 없어.”

“무게가 팔십 근이 넘는다고 했던가?”

“그렇지.”

“사람 하나를 쥐고 휘두르는 격이구먼.”

웃으며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의 표정이 일순 무심하게 변했다.

후우우우웅.

묵직한 바람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밀어 냈다.

‘저거다.’

모용우는 한순간 바람의 질이 달라진 걸 느꼈다.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바람이었다. 호방함이 느껴지는 그 바람 속에, 야수의 송곳니가 번뜩이고 있었다.

“자네가 익힌 무공, 사신무(四神武)라고 했던가?”

“맞아.”

“들어 본 적이 없는 무공이군.”

“천고의 절학임에도 명성을 날리지 못한 채 스러져 버린 무공은 많아.”

“하긴, 그도 그렇지.”

스르륵.

모용우가 자세를 낮추었다.

많이 낮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체를 살짝 수그리고, 왼발을 일 보 정도 뒤로 뺀 것이 전부였다.

화아아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바뀌었군.’

자세를 바꾸자 기질도 달라졌다. 가만히 서 있을 때는 고고한 학자와도 같았던 기세가, 자세를 낮추고 검병에 손을 올리는 순간 강철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기도로 변모한 것이다.

그 기질의 변화가 몹시 부드러웠다.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면 알아채기 힘들었을 정도로.

‘여러모로 나와는 달라.’

연호정의 변화는 급작스럽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했다.

쓰는 병기나 본인의 성향처럼, 사신무 역시 빠르고 강력한 기세로 싸움이 벌어지기 전부터 상대를 압박한다. 그래서 그의 무공은 일견 거칠어 보이기도 했다.

모용우는 달랐다.

잔잔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거세기로는 누구 못지않았다.

‘모용군의 무공은 가주지학이 아니다. 전생에서도, 그리고 이번에 내 죽음을 위장할 때 보여 준 무공도 세상에 알려진 모용가의 무공이 아니었어.’

뇌기(雷氣)를 운용하는 무공은 전 무림을 뒤져도 찾아보기 어렵다.

모용군이 익힌 무공이 바로 그러했다. 파괴적인 뇌기를 운용해, 섬전처럼 빠르고 막강한 위력을 내는 무공인 것이다.

‘즉,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모용세가의 정통 무공과 겨뤄 보는 것이로군.’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미있어.’

주작기를 뽑아내지 않았음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용세가의 무공, 그것도 가주지학과의 한판 승부였다.

“자, 그럼.”

연호정이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시작할까.”

“언제든지.”

파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호정이 돌진했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빨라! 그리고…….’

위협적이다.

사냥감을 포착한 야수처럼 달려드는데, 엄청난 속도가 무색하게 그 표정은 무심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두 눈이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투명하다. 그 눈빛에, 모용우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새 연호정이 모용우의 일 장 거리 앞까지 도달했다.

‘왔다!’

번쩍!

진격의 발검이다.

건곤팔극심법의 강력한 내공을 기반으로 뽑아내는 신속(神速)의 발검(拔劍)이었다. 묵직한 탕마대검이 어떤 쾌검보다도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그때였다.

콰앙!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던 연호정의 발밑에서 폭발적인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회피?!’

사아아아악!

발검으로 내친 검격이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묵직한 진각으로 충격파를 터트린 연호정은 어느새 모용우의 검격을 피해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첫수부터 상식을 초월하는 움직임이었다. 비단 이런 식의 비무에선 가볍게 손속을 나누는 것이 상식이거늘,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온 것도 모자라 정면 승부를 피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지어.’

모용우가 고개를 쳐들었다.

‘도끼가 아니다!’

연호정이 좌장(左掌)을 내질렀다.

퍼엉!

모용우의 자세가 한층 더 낮아졌다.

‘무서운 장법!’

쏟아져 내려오는 장력의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창졸지간 펼쳐 낸 것이 분명한데도, 막지 않았다면 뼈가 부러졌을 만큼 막강했다.

첫수부터 허초, 허초에서 이어지는 공격도 도끼가 아닌 장법이다.

비로소 모용우는 이 싸움의 성격을 깨달았다.

이건 평범한 비무가 아니라 실전을 방불케 하는 진짜 싸움이었다.

파바바박!

연호정이 자연스레 모용우의 후방으로 넘어갔다.

놀랍게도, 후방으로 넘어가는 그 잠깐 새에 세 번의 각법을 뻗어 냈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요혈을 노려 오는 각법의 날카로움이 가히 신기(神技)에 이르러 있었다.

퍼퍼펑!

모용우의 수공(手功) 역시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막기 어려운 삼단 각법을 모조리 쳐 낸 것이다.

싸움의 성격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몸의 반응 속도가 달라진다. 연호정이 달리 연호정이 아니라면, 모용우 역시 달리 모용우가 아닌 것이다.

쾅! 터어어엉!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연호정이 탄력적인 보법으로 전진했다.

화아아아악!

몸도, 병장기도 가까워지지 않았는데, 빗장뼈부터 옆구리까지가 통째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기백, 야수의 살기였다.

모용우가 탕마대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엉!

광룡부의 창대와 탕마대검이 부딪치며 귀청을 떨어 울리는 굉음을 토해 냈다.

‘무겁다!’

한 번의 격돌이 남긴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순간적으로 탕마검을 놓칠 뻔했다. 내공을 조금만 덜 쏟아부었다면 호구가 찢어졌을 것이다.

‘도끼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야! 연제의 힘 자체가 차원이 달라!’

그때, 연호정이 폭풍 같은 맹타를 퍼부었다.

쩌저저저저정!

모용우가 연신 뒤로 물러나며 검막(劍幕)을 둘러쳤다.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검막이 광룡부의 도끼날에 닿는 순간 산산이 찢어졌다. 불똥을 튀기며 사라지는 무형의 검막, 모용우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이런!’

콰르르릉!

도끼날이 땅거죽을 뒤집으며 하단에서 상단으로 올라왔다.

한가롭게 구경할 때는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저 도끼의 움직임은 이해 불가의 영역에 있었다. 얼마나 힘이 세고 내공이 깊으면 팔십 근이 넘는 중병기를 쾌검처럼 휘두를 수 있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모용우가 힘차게 검을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큭!’

모용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섭구나!’

제아무리 무거운 병기라도 아래에서 올려 친 상황이었다. 그에 맞서 혼신의 힘을 다한 참격으로 내리쳤거늘, 힘에서 밀린 것도 모자라 몸 전체가 허공에 떠 버렸다.

진격의 보법이 만들어 내는 괴력의 무공이었다.

화아아아악!

마침내 모용우는 볼 수 있었다.

번쩍! 번쩍!

새하얀 백색의 바람이 연호정의 전신을 둘러싸는 순간, 그의 두 눈이 실제 범의 그것처럼 샛노랗게 번뜩였다.

쾅! 쾅! 콰앙!

백호군림의 삼 보 전진이다.

일 보, 일 보를 내디딜 때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걸음걸음이 그 자체로 진각이나 다름없었다. 허공에 떠 있는데도 내부가 진탕되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크허어어엉!

아릿하게 들려오는 대호의 포효.

백호공, 호왕구벽세가 그 잔혹한 아가리를 벌렸다.

쩌저저저정! 콰앙!

“으윽!”

기어이 신음을 흘리는 모용우였다.

‘이런!’

지금까지의 공격은 죄다 몸풀기에 불과했단 말인가?

호왕구벽세의 일초를 막았을 뿐인데 전신의 관절이 어긋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맞서는 것 자체가 손해일 만큼 흉포한 무공이었다. 조금이라도 잘못 막았다간 그 즉시 내상을 입을 것 같았다.

‘하지만.’

뒤로 한참이나 물러선 모용우.

후우우우웅.

탕마대검에 어린 푸르른 진기가 웅혼한 기파를 발산해 냈다.

호흡 한 번 돌릴 수 있는 시간, 그 소중한 시간으로 마침내 모용세가의 가주지검(家主之劍)인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를 꺼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번쩍!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백호군림의 일 보로 삼 장 거리를 좁혔는데, 어느새 모용우가 그보다도 빨리 접근해 왔다.

두 사람의 병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쩌저저저정! 콰르르릉!

도끼와 검이 부딪치며 튕겨 나간 충격파가 땅거죽을 뒤집고 주변 나무에 끔찍한 상처를 만들어 냈다.

쩌엉! 쩌어엉! 쩌어어엉!

모용우가 이를 악물었다.

건곤백팔검해, 유기상현(柳氣相顯)의 검초로 광룡부의 위력을 상쇄시켰다.

실제로 광룡부의 참격이 약해지나 싶었더니만, 이 무서운 동생은 곧장 연환격을 포기하고 일격필살의 공격을 가해 왔다.

콰아앙!

엄청나게 무거운 일격이었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단순한 도끼질인데, 묘하게도 피할 수가 없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건곤의 내공, 명장이 혼을 실어 빚은 희대의 보검 탕마대검, 거기에 철저하게 단련된 모용우의 신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쪼개졌을 정도로 살벌한 위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쩌어엉! 콰앙! 퍼어어엉!

동작이 크고 위협적인 일격필살의 무공을 구사하면서도, 순간순간 투로(套路)를 바꾸며 미묘한 변초를 선보였다.

방어 자체가 버거운 공격이었지만, 애초에 어딜 방어해야 하는지조차 파악이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웠다.

백전노장도 혀를 내두를 기상천외한 공격이었다. 초식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인지, 호왕구벽세를 구사하면서도 틈틈이 장법과 각법을 뻗어 오감을 교란하고, 결정적인 순간 파괴적인 도끼질로 상대의 힘을 깎아 냈다.

‘대단해.’

연신 뒤로 밀리는 모용우.

반격은커녕 막아 내는 것도 벅차다. 진짜 승부를 낼 결심을 한 연호정의 무공은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

‘건곤무해를 보고 싶다고 했지만, 애초에 펼칠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있다.’

억울하진 않았다. 오히려 연호정의 그러한 전투술에 감탄이 나왔다.

‘싸움의 천재…… 게다가 매 순간 내 약점을 절묘하게 공략해 오고 있으니, 호흡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가 없구나.’

쩌저저저정!

시커먼 창대와 용형의 도끼날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누적되는 충격, 사지에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내상은 없었지만, 지금 상태로도 하루는 꼬박 앓아누울 정도의 충격이 쌓였다.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번쩍! 콰아앙!

광룡부가 모용우의 왼발 반 치 옆에 박혔다.

“……흐음.”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을 감고 자세를 풀었다……. 뭐야? 포기야?”

다시 눈을 뜬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포기고 자시고, 이건 완전히 불계패(不計敗)일세.”

“어떻게든 반격할 줄 알았더니.”

“연제. 반격은커녕 방어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몰아쳤으면서 그런 말이 나오나?”

“작정하고 몰아치면 기가 막힌 수라도 꺼내 들 줄 알았지.”

“……실망시켜서 미안하구만.”

“무슨 말씀을. 실망은 안 했어. 그냥 형님도 사람이구나, 싶었지.”

“응?”

쩌억!

땅에서 광룡부를 뽑아낸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강해. 공격의 무거움은 당연히 내가 위였지만, 순간의 날카로움만큼은 형님도 나에 비해 뒤지지 않는군.”

“도저히 칭찬으로 들리진 않네만.”

“초반 접근 시의 속도도 일품이었어. 솔직히 그 순간만큼은 깜짝 놀랐지 뭐야.”

“진심인가?”

“진심이야. 그래서 안타까워.”

“……?”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무종지벽에 올랐지만, 아직 제 무공을 수습하지 않았군. 그러니 그만한 능력을 갖추고도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지.”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술이나 더 마시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형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나중에 시간 나면 또 보자고.”

“여, 연제!”

“이것만 알아 둬. 나비가 껍데기를 벗고 날개를 펼 때, 맹수가 먹잇감을 잡고 숨통을 끊었다고 확신할 때. 바로 그때가 제일 위험한 순간이라는 걸.”

“……!”

“가지고 있던 걸 제대로 수습하지 않으면 무종지벽의 초입에서 몇 년이고 썩을 수도 있어.”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가던 연호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형님.”

“……말씀하시게.”

“곧 모용군이 돌아올 거야.”

“……!”

“그가 무엇을 챙겨서 돌아왔는지, 잘 확인해 보도록 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