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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52화 (252/963)

252화. 동풍(凍風)의 시간 (2)

“캬, 좋구만!”

모용우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피로가 많이 쌓였을 터인데, 그리 술을 마셔도 괜찮은 겐가?”

“뭐 어때? 꼬박 이틀은 더 쉴 텐데. 그리고 몸만 쉰다고 다가 아니야. 정신적 피로도 탈탈 털어 내야지.”

“연제답구먼.”

떨떠름했던 모용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여하간 잘 돌아왔네. 기실, 워낙에 위험천만한 임무인지라 멀쩡히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어.”

모용우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특출나게 매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목소리에는 언제나 진심이 담겨 있었고, 말투에는 상대를 향한 기본적인 공경이 배어 있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도 나지만, 형님도 형님이구만?”

“음?”

“무종지벽을 돌파했다더니, 과연 대단한 기도야.”

모용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커허험! 소문내지 말라 했는데, 어떻게 얘기가 그리 퍼져 버렸다네.”

“소문나면 또 어때? 좋은 일은 사방팔방 알려야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느 정도는.”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일은 숨기고, 나쁜 일은 더더욱 숨겨야 하는 것이 무림 아니던가.”

“호오? 그건 또 형님답지 않은 발언이군.”

“글쎄…… 그저 예전보다는 현실을 좀 더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연제가 따로 임무를 떠나고, 내 나름대로 맹 내 사정을 자세히 둘러보았다네.”

“호오? 그래서, 형님이 보는 무림맹은 어땠어?”

“다소 거친 표현을 써도 이해해 주게.”

“물론이지.”

“개판이더군.”

거친 표현이라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적나라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모용우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그 표정에 떠오른 것은 진심 어린 실망과 걱정, 그리고 분노였다.

“솔직히, 관심을 두기 전까지는 몰랐네. 어쩌면 나 역시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나 연제가 떠나고 난 이후, 어떻게든 홀로 버텨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꽤 공격적으로 탐색해 보았네.”

“그랬더니 개판이더라?”

“그렇더군.”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최소 절반 이상이 화합이란 가면을 쓴 채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더라, 이 말일세.”

딱히 누구를 지칭하지 않아도 그 절반 이상의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 연호정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맹의 수뇌부들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봉공들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절반 이상이라…… 그래, 잘 봤군.”

“문제는 봉공들만이 아닐세. 그들이 수장으로 있는 문파, 혹은 무림세가의 자제들 역시 협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네.”

“살점 하나 물어뜯겠답시고 여기저기 눈치나 보는 작자들이 많아. 그런 작자들을 수장으로 세웠으니, 휘하 문도들이 뭘 배웠겠나.”

“가장 실망스러운 게 뭔 줄 아는가?”

“음?”

모용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중 누구도 형님만큼 독하지는 않다는 것이네.”

“…….”

“모르겠네. 어쩌면 나 역시 아직까지도 형님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걸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섭지.”

연호정이 술잔을 들었다.

“무서운 양반이지. 단점도 분명 있지만, 형님 말마따나 독하고 똑똑한 양반이라 자신의 단점을 대부분 지워 버릴 능력이 돼.”

“그렇다네.”

연호정이 모용우의 잔을 채워 주었다.

연호정 옆에 앉은 묵비는 조용히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의 얘기를 경청했다. 끼어들 만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이러한 대화를 들으며 배우는 것이 많았다.

“표정이 안 좋은 이유가 있었구만? 좋은 일은 숨기고 나쁜 일은 더더욱 숨겨라……. 왜? 주변에서 형님을 보는 시선이 영 아니꼬웠던 모양이지?”

모용우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 쪼가리처럼 변했다.

“대놓고 시비를 거는 자들도 많더군.”

“심장에 철판을 깔았구만. 감히 무종지벽을 돌파한 천재 고수한테 대놓고 시비를 걸어?”

“연제.”

“농담 아니야. 사실이잖아?”

답답한 얼굴로 술잔을 비운 모용우가 한숨 쉬듯 토로했다.

“진짜 무서운 자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지. 하지만 어지간한 사람도 제 눈빛은 숨기지 못하는 법일세.”

“맞는 말이야.”

“기분 탓일는지도 모르겠네만, 순수하게 기뻐해 주는 사람은 본군의 군병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순수하게 기뻐해 줘? 누가 그럴 수 있겠어. 연맹이랍시고 모였지만, 동시에 우리는 저마다 경쟁 관계에 있어. 본인 문파나 가문에서 난 천재라면 모를까,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은 몇 없는 게 당연하지.”

“연제도 그랬나?”

“뭘?”

“연제는 진즉에 무종지벽을 돌파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애써 쉬쉬하고는 있지만, 이미 연제는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네.”

“그런 건 신경 써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군.”

“신경이 안 써지던가?”

“신경을 쓰고 말고를 떠나서, 그럴 시간조차 없었어.”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연호정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정쟁이 되었든, 무공 수련이 되었든.

‘참 대단하구나.’

막상 이런 대답을 들으니, 그는 연호정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애써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야. 주변의 평가에 진심으로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설령 알고 있다 한들 매 순간 그것에 몰두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그러한 강한 몰입이 연제의 성취에 한층 박차를 가해 주었는지도 모르지.’

연호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래서 탁상공론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머리로는 이해해도,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야. 형님도 이제 세상이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군.”

“알고는 있었네. 체감도 했었지.”

“흠. 하기야, 가문에서 그런 수모를 겪은 데다 절강지부에서도 별의별 일을 다 겪었을 테니까.”

“그렇다네. 그래서 나 자신에게도 크게 실망했네.”

“실망?”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새삼 실망할 것도 없는 문제로 실망하고 답답해하고 있었으니,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도 실망할 수밖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실망의 연속이구만.”

“그러게나 말일세.”

“한잔해.”

“좋지.”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탕마군 훈련은 어땠어?”

“다들 잘 따라와 주더군.”

“그러게.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제는 정말 어엿한 수장의 기질이 보이고 있어.”

“그, 그런가?”

“그래. 수장이라고 혼자 잘나서 발전한다던가? 수하들의 변화는 수장도 변화시키는 법이야. 은연중에 풍기는 위압감이 꽤 대단해.”

모용우가 입맛을 다셨다.

“낯부끄러운 칭찬은 그만두게. 그리고 그건, 오히려 나보다 묵 부장이 더한 것 같군.”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묵비는 깜짝 놀랐다.

“저, 저요?”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한 달 전쯤 지나가듯 뵈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소. 과거에 뵈었던 그분이 아니더이다.”

“아…….”

“연제의 공백을 홀로 메우시다니, 진심으로 탄복했소. 멸사군의 군병들은 하나같이 개성적이라던데, 고생이 많았을 듯하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고생은 별로 없었어요. 다들 잘 따라와 줘서…….”

“하하.”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묵비나 모용우나 천성이 선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니, 상대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깊게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모용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어.”

“부디 들려주게.”

“미리 말하지만, 너무 충격은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간 일어났던 일, 가감 없이 솔직하게 얘기해 줄 테니까.”

“…….”

“내 얘기도, 그리고 모용군에 관한 얘기도 다 해 줄게.”

평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연호정이 이리 경고까지 하는 걸 보면, 정말 상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모용우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말해 주게.”

연호정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실무조가 침투했던 때부터 시작해 모용군이 호남으로 들어온 일, 지휘권자와 실무조장이 만나 나누었던 얘기, 어떻게 해서 양천의 신임을 얻었는지는 물론 정보를 빼 온 과정까지도.

모용우와 묵비는 얘기를 듣는 내내 탄성을 질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연호정이 어떻게 양천에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번 임무에 임했는지를 절절히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은 생각보다 풍부한 언어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그 상황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연호정이 모용군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잠시 후.

“…….”

모용우의 얼굴이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다.

묵묵히 그의 얼굴을 보던 연호정은 말없이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모용우가 신음을 흘렸다.

“……형님께서, 정녕 그런 짓을 하셨단 말인가.”

“그래.”

“사실인가?”

“사실이다.”

가감 없이 솔직하게 얘기하겠다고 했다.

연호정은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모용우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되물어 보는 것은, 그만큼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결국 모용우가 탄식을 터트렸다.

“대체 어쩌자고 그러시는지 모르겠구나. 내 형님을 이해하려고 해도,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다!”

토해 내는 목소리에 온갖 감정이 묻어 나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려고 들지 마.”

“하지만!”

“사람이면 그런 짓을 이해하면 안 되지.”

“……!”

“형님이 그를 이해하는 순간, 형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를 이해하려 들지 말고, 형님이 아는 도덕과 윤리를 잘 지키도록 해.”

모용우가 이를 악물었다.

연호정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말하지. 내가 형님을 차기 무림맹주로 점찍은 것은 모용군의 심장에 칼을 박기 위해서가 아니야. 다른 누구보다도 형님이 가장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서지.”

“…….”

“그리고 내가 형님을 믿는 것은, 충분히 똑똑한데도 샛길로 빠져나가지 않는 그 올바른 삶의 방식 때문이다.”

모용우가 충혈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쉬운 길이라고 틀린 건 아니지만, 올바른 길이 있는데도 굳이 요령을 부릴 필요는 없어. 요령 피워서 얻은 재물은 언젠가 도둑맞기 마련이거든.”

“…….”

“절대 모용군처럼 되지는 마. 그럴 사람도 아니지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거칠게 잔을 비웠다.

“한 잔 더 주게.”

“얼마든지.”

모용우는 연거푸 네 잔의 술을 받아 마셨다.

그러고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깊게 숨을 내쉬는 모용우의 얼굴은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이내 히죽 웃었다.

“기분이 말이 아니지?”

“완전히 똥이라네.”

“거칠게 말해도 이해해 주라고 했지, 더러운 말을 해도 이해해 달라곤 안 했잖아?”

“말장난할 기분 아닐세.”

“말장난할 기분이 아니어도 칼부림할 기운은 있겠지?”

“뭐?”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운치가 좋은 자리 아냐? 한바탕 땀이나 흘리고 뭣 같은 기분 좀 털어 내. 땀 흘리고 나서 마시는 술이 또 맛이 좋거든.”

“…….”

“무종지벽을 돌파했다며? 어디 모용세가 칼질 맛 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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