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동풍(凍風)의 시간 (1)
멸사군과 실무조는 안전하게 귀환했다.
이번 임무는 비밀리에 진행된 터라 일반 무사들은 그들의 귀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수뇌부들은 달랐다. 그들은 실무조의 무사 귀환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그들이 임무를 성공리에 달성한 것에 크게 만족했다.
하기야 사전 정보가 지극히 적은 적진으로 침투하여 내부 정보를 빼 오는 일이었다. 초일류 세작을 보내도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일을 실무조 몇 명이 해 냈으니, 이는 능히 쾌거라 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연호정 일행이 무림맹으로 귀환했다.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접어들던 시기에 출정했던 실무조가 귀환한 지금.
어느새 대별산의 산자락에는 시린 겨울바람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 * *
“이놈.”
연위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서신 보낼 정신이 없었느냐?”
농담처럼 건네는 말이었다. 서신은커녕 정보 문서 하나 보내기도 힘든 작전지에서 별 탈 없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연호정은 유쾌하게 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귀찮게 구는 벌레들이 하도 많아서 말입니다. 몇 번이나 적긴 했지만, 감시의 눈길이 심해 차마 보낼 수가 없었지요.”
“말은 잘한다, 이놈.”
“누구 아들인데요.”
“다친 곳은 없느냐?”
“물론입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연위가 성큼성큼 다가와 연호정의 양어깨를 꽉 쥐었다.
“잘 돌아왔어. 참으로 다행이야.”
연호정의 얼굴에도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깃들었다.
아버지가 이리 기뻐하시는 건 자신이 임무에 성공해서가 아니었다. 아들이 몸 성히 돌아온 것 자체가 기쁜 것이다. 설령 임무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반응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연호정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긴장 가득한 생활을 이어 가다가 마침내 편히 마음을 놓아도 될 가족을 만나니 기분이 몹시 편안했다.
연위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눈치 보면서 살긴 했던 모양이다.”
“예?”
“네 발전 속도라면, 지금쯤 이 애비에 비해 별 부족함이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출정 전과 크게 다르진 않구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디 가셔서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는 거 아시지요? 제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이룬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 아닙니까?”
“이놈이 못 본 새에 자만심만 늘었구나.”
“현실을 인정하자는 거지요.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매일 수련에 힘썼더라도 언감생심 어찌 아버지의 발끝에나마 도달했겠습니까.”
“허! 이제는 아부까지?”
“아부라니요. 아버지께서 이룩하신 경지는 능히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실제로 연위의 무공 역시 연호정이 회귀한 이후 크게 발전했다. 연호정은 아버지의 기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잔잔하고 은밀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연위의 무공이 퇴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폭발적으로 성장한 연위의 진기가 응축될 대로 응축되어, 외부로 발산하는 기운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긴.’
워낙 바빠서 수련할 시간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출정 전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는 또 달랐다. 아버지라고 바쁘지 않으셨을 리가 없을 터, 그런 와중에도 무도(武道)에 참오하신 것이다.
연호정의 표정이 서서히 진지해졌다.
‘확실히 반성하긴 해야 해.’
이번 임무는 실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무공 수련은커녕 잠조차도 제대로 자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결국 다 핑계일 따름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랬다면 임무에 지장이 갔겠지만.
‘뭐가 되었든 수련할 시간이 전혀 없지는 않았어. 중요한 임무라고 빈 시간을 날린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다.’
앞으로 싸워야 할 상대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걸 생각하면, 자신이 너무 여유를 부린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더 조이자. 이런 정신머리로는 안 돼.’
굳어진 아들의 표정을 본 연위가 무안한 듯 말했다.
“그저 농을 한 것뿐이다. 네가 맡은 임무가 얼마나 위험하고 중요한 것인데, 수련할 틈이나 있었겠느냐. 마음에 두지 말아라.”
연호정이 굳은 표정을 풀었다.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분명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어요. 앞날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좀 더 바쁘게 살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지나치게 긴장하며 사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어찌 되었든 임무 중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이니, 요 며칠 간은 푹 쉬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도록 하거라.”
“물론 그래야지요. 다시 달리려면, 제대로 쉬어 줘야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거면 되었다.”
웃으며 연위를 보던 연호정의 표정이 재차 굳어졌다.
“그리고 아버지.”
“그래.”
“모용군에 대해서…….”
“그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이에 관한 일이, 지금 당장 설명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더냐?”
“……물론 그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그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어차피 우리에게 할 말과 맹에 올린 보고서가 같은 내용일 리는 없을 터, 급박한 일이 아니라면 네가 충분히 쉰 이후에 들어도 될 것 같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생각은 말고, 당분간은 푹 쉬도록 해라. 고생 많았다.”
연호정이 마주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 * *
연위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긴 했지만, 실제로 심신이 지치기는 한 모양이었다.
푹 씻고 거처로 가 누운 연호정은 다음 날 석양이 드리워질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거의 열세 시진을 내리 자 버린 것이다.
“……멍하군.”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푹 자 본 게 얼마 만이야.”
꼬르륵.
밀린 잠을 다 자고 일어나니 곧장 배가 고팠다.
정말이지 솔직한 몸이 아닌가. 연호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유우웅! 퍽!
일 층으로 내려와 마당으로 향하니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연호정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피유우우웅! 퍼어억!
나뭇가지가 공기를 찢는 소리는 그야말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음.”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성과는 있구나.”
홍련궁으로 쏘아 낸 나뭇가지가 벽을 뚫었다. 실로 대단한 기예였다.
그리고 더 대단한 것은, 그 나뭇가지가 속이 텅 빈 썩은 나뭇가지였다는 것이다.
푸스스.
벽에 박혔던 나뭇가지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잘 제어해 둔 내공이 풀린 것이다.
묵비의 얼굴에 뿌듯함이 어렸다.
“이 정도 내공 운용이면…….”
“엄청나네.”
“컥!”
깜짝 놀란 묵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연호정이 평상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요?”
“방금.”
“기척 좀 내고 다녀요!”
“기척 낼 거 다 냈다. 내공 아깝게 뭐 하러 기척을 죽이겠어?”
“아…….”
“집중력이 더 좋아진 모양이군. 확실히 많이 늘었어.”
묵비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아직 멀었어요. 단계를 밟고 있기는 한데, 무종지벽을 돌파하기에는 아직…….”
“호오? 진심이었나 보지? 무종지벽을 돌파하겠다던 거.”
“당연하죠. 말했잖아요? 최소한 연 공자와 대등한 경지에 올라가겠다고.”
“그 독한 사혼조 놈들 머리통을 코웃음 치면서 날려 대던데 뭘.”
“크흠.”
“전투 효율은 이미 나와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확실히 궁술이 무섭긴 무섭더라.”
“그건 궁술의 특성일 뿐이지 내가 강한 게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아버진데, 너도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뒤통수에 칼 맞는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법이니까요.”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고, 밥은 먹었냐?”
“아직이요.”
“잘됐네. 수련 끝났으면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럴까요?”
그렇게 두 남녀는 파군각을 나서 맹 내 식당으로 향했다.
무림맹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저녁 시간이기도 했고, 날씨가 추워진 탓에 무사들도 이전만큼 활발히 오가진 않았던 것이다.
묵비가 히죽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음? 뭐가?”
“같이 밥 먹으러 가는 거요. 무림맹 식당, 그립지 않았어요?”
연호정이 피로에 찌든 얼굴로 투덜거렸다.
“무림맹 성벽에 난 들풀조차도 그립더라. 젠장. 어떻게든 성공은 했다만, 역시 그런 임무는 내 성질머리랑은 영 안 맞더라.”
“그런 것치고는 결과가 너무 좋다고 하던걸요?”
“고작 나 정도에 털릴 정도니, 묵룡부가 얼마나 빈틈이 많은 조직이란 소리겠냐.”
“신종 자랑 방법이에요?”
“어.”
“재수 없어.”
“눈깔을 확.”
묵비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보니 묵비도 출정 전과 꽤 달라진 것 같았다. 그때보다 더 밝아졌다고 해야 할까.
‘보기 좋군.’
천성은 바뀌지 않겠지만, 기쁠 땐 웃는 거고 슬플 땐 우는 거다. 그게 사람 사는 거 아니겠는가.
이제 묵비도 한결 사람답게 보였다. 연호정은 그녀의 변화를 진심으로 반겼다.
“그나저나 위에서는 안 부르나요? 보고서는 올렸지만, 그래도 그간의 상황을 따로 보고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막아 주신다고 하더라. 사흘 뒤 봉공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시더라고. 그때 보고하면 돼.”
“화급을 다투는 일은 아닌 모양이죠?”
“당장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한시가 급한 일일 수도 있고, 다소 느긋해도 괜찮은 일일 수도 있다.
그 전에, 지휘권자인 모용군이 아직 귀맹하지 않은 상황이다. 실무조장인 연호정보다는 모용군이 보고를 올리는 게 더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이다.
그 얘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모용군이 떠올랐다.
‘이 정도로 죽을 만큼 만만한 양반은 아니지.’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언제 귀환할지 궁금하군. 귀환 시간에 따라 당신이 뭘 얻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모용군이 죽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이성이 아닌 직감이었다. 이 정도 분란으로 죽을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애를 먹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에 빠진 연호정.
가만히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묵비가 다소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거 알아요?”
“혹시 그거 모른다. 뭔데?”
“탕마군장이요.”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나쁜 일은 아니고요. 오히려 그 사람한테는 엄청 기쁜 일이 생겼죠.”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모용 군장이 무종지벽을 돌파했어요.”
“뭐?!”
정말이지 깜짝 놀랄 일이었다.
“대체 언제?”
“저희 출정하기 전날이었을 거예요. 모용 군장 측에서는 일부러 소문을 막은 모양인데, 그게 막는다고 막아지나요? 탕마군 소속 군병들의 입방정 덕에 금세 무림맹 전체에 소문이 퍼졌어요.”
“허어!”
연호정의 얼굴에 솔직한 감탄이 일었다.
“고작 몇 달 안 본 새에 벌써 거기까지 도달했단 말이야? 정말 대단한데?”
“그러게요.”
묵비의 얼굴이 다소 시무룩해졌다. 자신 역시 일차 목표를 무종지벽에 두고 있는데, 정작 다른 사람이 올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자니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은 연신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봤구만. 각 잡고 단련하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무종지벽을……. 클클, 정말 앞날이 기대되는 양반이라니까.”
그때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한 사람을 보며 묵비가 투덜거렸다.
“앞날이 기대되는지는 모르겠고, 전생에 호랑이였던 건 분명하네요.”
“잉?”
“제 말 하니까 오잖아요, 저기.”
연호정이 묵비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모용우가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흠, 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니 어째 김이 팍 새는 기분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