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부활의 시간 (5)
촤르르르륵! 철컹!
절묘한 손놀림으로 교룡쇄를 회수한 연호정이 재빨리 군마에 올랐다.
군마가 앞다리를 쳐들며 환호하듯 울부짖었다.
히히히힝!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화려한 울음이었다.
주인 없이 수 개월간 황야를 질주했던 군마였다. 이제야 비로소 주인을 태워 하나가 되니, 토해내는 울음에 드높은 자부심과 환희가 묻어났다.
“군장님!”
“형님!”
연호정을 부르는 군병들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모두 북쪽으로!”
멸사군병들의 눈빛이 즉시 바뀌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진동하는 듯한 벽산호장의 명령이었다. 반가움 가득했던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비장해졌다.
콰앙!
연호정이 앞서 달리니, 순식간에 대형을 갖춘 멸사군이 그 뒤를 따랐다.
쿠르르릉!
오십 기 군마의 말발굽에 박살 난 돌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후욱.’
마술(馬術)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어두운 산길에서 말을 모는 것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연호정은 내상까지 입은 상황이었다. 무시하고 전투에 임할 정도는 되었지만, 아무래도 평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청룡기를 끌어 올려 간장 능력을 극도로 활성화시켰다.
끊임없이 피로를 날리는 상생의 진기였다. 거기에 청룡목기(靑龍木氣)를 끌어와 심장의 주작화기(朱雀火氣)를 더 강하게 불살랐다.
목생화(木生火)의 이치, 또 다른 전투를 위해 신체의 부담을 뒤로하고 폭발적인 힘을 끌어내는 것이다.
울컥! 울컥!
터질 듯 박동하는 심장.
강제로 심박출량을 올리며 전신 근육에 잔뜩 날을 세웠다.
우우우우웅!
시커먼 창대를 타고 흐르는 주작기가 백색의 도끼날에 맺히며 휘황찬란한 광채를 뿜었다.
당장이라도 일격을 쳐 낼 기세였다. 선두에 선 연호정의 투기(鬪氣)가 불꽃이 되어 주위를 달구니, 자연스레 멸사군의 투기도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연 공자.”
묵비가 연호정의 옆에 가까이 붙었다.
연호정이 전방을 주시하며 말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다. 꽤 위험할 뻔했어.”
“뭘요.”
묵비의 얼굴에도 긴장이 드리워졌다.
“한데 이렇게 급할 이유가 있어요? 물론 후속 병력의 추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건 알지만…….”
“참백단.”
“네?”
“참백단이라고, 저들과 부딪치기 전에 우릴 추격하던 놈들이 있었다. 거리가 벌어진 만큼 추격을 포기했다 여겼는데, 저놈들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
그때, 묵비 뒤에 타고 있던 제갈아연이 말했다.
“우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럴 확률이 높아.”
사혼조는 각 서른 명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조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대(對) 고수전(高手戰)에 특화된 이들로, 숫자가 많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기동성과 손발이 척척 맞는 호흡, 그리고 목표물에 대한 철저한 조사였다.
참백단은 달랐다.
그들은 흑도에서도 살인을 밥 먹듯이 한 살인귀들을 모아 만든 전투 부대였다. 전투 방식과 전술이 다를 뿐, 집요함은 사혼조와 비교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우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어. 아마 호남 최북단, 어쩌면 호북 남부까지도 치고 올라올 수 있다. 하물며 양천까지 깨어난 이상, 무슨 수를 써서든 우릴 잡으려 들 거야.”
제갈아연의 얼굴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먼저 간 사람들이 위험해!”
“북부라고는 하지만 그 경계선은 지극히 넓어. 만날 확률보다 지나쳤을 확률이 더 높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참백단이 우회하여 일행의 앞을 막았다면…….”
연호정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렸다.
“피로에 지친 실무조는 절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을 거야. 체력 안배를 위해 천자산 북부에서 휴식이라도 취했다간, 우회해서 돌아온 참백단과 마주칠 확률이 더더욱 높아지겠지.”
묵비가 외쳤다.
“속도를 올려라!”
히히히힝!
멸사군의 이동 속도가 가일층 빨라졌다.
“그래도 안심인 건…….”
연호정이 힐끔 뒤를 바라보곤, 피식 웃었다.
“애들 훈련 제대로 시켜 놨네? 군기가 바짝 들었어.”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군기만 는 건 아니죠.”
“그러게. 대형을 모으고 찢는 일련의 과정이 엄청나게 빠르고 부드러워졌더군. 게다가 개개인의 무공 역시 훨씬 더 실전적으로 변했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공을 치하했다.
“고생 많았다.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보다는 실무조가 훨씬 더 어려웠겠죠.”
“그건 그래. 그나저나, 창술은 언제 익힌 거야?”
“아버님께서 마상 전투를 치르려면 궁술 외의 무공을 하나 더 익히는 게 낫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네. 그렇다고 검을 익히기엔 뭣하고, 장창보다는 단창이 더 다루기 수월해서 익혔죠. 얼마 안 됐어요.”
“얼마 안 된 것치고는 투로(套路)를 제대로 밟고 있던데.”
“아버님께서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어요.”
연위가 직접 가르쳤다면 대충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배운 지도 얼마 안 된 단창술로 사혼조장의 공격을 여유 있게 튕겨 낸 묵비의 재능과 감각도 가히 기가 막힌 것이었다. 하나의 병기를 달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익혔으니, 다른 병기를 익히는 속도도 빨랐던 것이리라.
물론 화살과 창은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필요가 없다면 모를까, 능력이 되어서 다룰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하기야 권각 백타와 궁술의 거리감은 너무 차이가 나는 감이 있었어.”
제갈아연이 외쳤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해! 지금은 달리는 데에 집중하자구!”
“아, 실례.”
쿠르르릉.
군마의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능히 절정고수의 신법에 비견될 만했다. 군마의 덩치와 달리기 힘든 산길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대단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고, 몇 개의 개울가를 뛰어넘었을 때였다.
‘음?’
연호정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병장기 소리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한 산세를 타고 흐르는 흉흉한 살기.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분명했다.
묵비가 외쳤다.
“연 공자!”
“알아! 속도를 더 올려!”
히히히힝!
지금껏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달린 군마들이다.
이 정도면 지칠 만도 할 텐데, 고삐를 쥐고 흔드니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속도 이전에 지구력만 봐도 여느 명마(名馬)의 수준을 한참이나 상회했다.
우우우우웅.
광룡부의 도끼날에 맺힌 주작기 위로 산중대왕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연호정이 양손으로 광룡부의 창대를 움켜쥐었다.
“으아압!”
콰아앙!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전진한다.
휘몰아치는 경파에 거목이 찢겨 날아가고 바위가 부서져 흩어졌다. 묵비와 군병들은 제각기 병장기를 휘둘러 시야를 막는 나무 파편과 돌멩이들을 마구 쳐내며 달렸다.
그리고 다시 이각.
“이 개자식들아!”
퍼퍼펑!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치는 장력에는 힘이 넘쳤다.
막강한 공력을 풀어 내는 장법의 구결이 실로 대단했다. 간간이 들리는 용음(龍吟)이 산봉우리를 뒤흔들 정도였다.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달리 항룡장으로도 불리는 개방 최고의 비기.
일타에 실린 파괴력은 물론 연환기로도 중원 정점을 달리는 장법이었다. 그 위력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개방에서도 방주와 후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연성하지 못한다는 개방제일의 무공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개만이 아니야.’
퍼어어억! 촤아아악!
부드럽고도 탄력적인 검격에 미친 살인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을 붉게 비추는 실전 검도의 강림이었다. 구대문파 중 가장 실전적인 무공을 보유했다는 점창파의 무공이 적들을 마구 유린했다.
퍼버버버벅!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방을 찢어발기는 비도술은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 평가를 비웃듯 비도에 스치기만 하면 적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갔다. 누가 봐도 비도에 독기(毒氣)가 가미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패율, 가득상, 당상아.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진산비기를 운용하는 그들이었다.
‘그 말인즉.’
콰아아앙!
선두에 달리던 연호정의 군마가 큼직한 바위를 박차고 허공을 날아올랐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
후우우우웅!
광룡부에 순백의 진기가 어렸다.
파아아악!
날아오른 군마를 박차고 더 높이 솟구친 연호정이 전장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콰아앙!
“크아아악!”
“아아악!”
대지를 찍은 도끼 주변으로 살벌한 경풍이 휘몰아쳤다.
그 경풍에 휩쓸린 참백단원 십여 명이 그대로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 광룡부로 펼쳐 내는 호왕구벽세였다.
‘오랜만이군.’
팔십 근 광룡부를 절묘하게 회전시켜 다가오는 참백단원을 횡으로 갈긴다.
퍼어어억!
말 그대로 베는 것이 아니라 후려쳐 날리는 일격이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진 참백단원이 날아가며 나무 하나를 부수고 쓰러졌다.
‘실로 오랜만이야.’
내상을 입었지만, 오히려 맨손으로 싸웠을 때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해진 것 같다.
콰앙!
전진일격, 백호군림보로 나아간 연호정이 광룡부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파괴력의 정점을 찍는다.
폭풍을 연상케 하는 투로, 적을 파괴하는 도끼날에 비상하는 주작화기가 실렸다. 무게감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호장의 무공에 참백단원 삼십여 명이 순식간에 도륙 났다.
가득상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연 공……!”
퍽!
“컥!”
“닥쳐라.”
가득상의 뒤통수를 친 건 패율이었다. 이미 자파의 무공을 구사하긴 했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실명을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연호정이 외쳤다.
“다 죽여라!”
“으아아아!”
멸사군이 들이닥치며 참백단원들을 매섭게 밀어붙다.
확실히 성장한 모습이었다. 따로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제각기 흩어져 적들을 공격하는데, 위력 이전에 전투 효율이 대단했다.
연호정이 재차 외쳤다.
“작전을 바꾸겠소! 눈에 보이는 모든 적을 섬멸하시오!”
백도 무림의 진산비기를 본 놈들이었다. 단 한 명도 살려 둘 수 없었다.
패율과 가득상, 당상아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간만에 살풀이 좀 하겠군.”
콰앙!
신들린 보법으로 접근한 패율이 이전보다 훨씬 더 살벌한 검격을 구사했다.
마음 놓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아군이 참전했다. 그것만으로도 기세가 일변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득상의 장법도, 당상아의 암기술도 한층 더 예리하고 정교해졌다.
본디 아군이란, 전우란 그런 것이다. 위기의 순간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힘이 넘치게 해 주는 존재.
“어, 무사했소?!”
그래도 몇 놈 해치우긴 한 모양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강량, 그의 검에도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다.
“괜찮나?”
“물론이오. 그나저나…….”
강량이 기가 질린 눈으로 광룡부를 응시했다.
“그게 당신 무기요?”
“그래.”
“그런 걸 휘두른다고?”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안 믿기면 구경이나 해.”
퍼어어엉!
불처럼 뜨거운 돌풍이 일 때마다 참백단원들이 무참하게 찢겨 날아갔다.
광룡부, 교룡쇄.
그리고 멸사군.
전우를 만나 힘이 넘치는 것은 실무조만이 아니었다. 연호정 역시 멸사군을 보며 지닌바 무공을 한계 없이 구현하고 있었다.
반 시진 뒤.
우회하여 급습한 참백단 구백팔십 명이 모조리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