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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45화 (245/963)

245화. 부활의 시간 (1)

“현재 사혼조 두 개 병력이 모용가의 특작 부대로 추정되는 고수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한 개 조는 북부, 한 개 조는 동부로 퇴로를 차단하며 진입 중입니다.”

백서의 보고를 듣는 양천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귀로는 백서의 보고를 듣고, 눈으로는 엎드려 있는 환사를 노려보는 그였다.

백서가 말을 이었다.

“현재 십이지신 다섯 개 부대는 모용가의 병력과 접전, 청호와 수룡, 광견은 모용가주와 전투 중입니다. 보고로는 모용가주의 무공이 특출난지라 싸움의 난황이 예상…….”

“자네의 죄를 아는가?”

백서는 보고를 멈추었다.

양천의 말은 백서가 아닌 환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환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 주시옵소서.”

양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백서가 자네들을 정보부장과 함께 보낸 것은 단순히 그를 보좌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네. 혹 최악의 상황이 터져도, 반드시 그만은 살리라는 뜻이었어.”

“…….”

“한데 그를 살리기는커녕 정신을 잃고 수하의 등에 업혀 와?”

환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죽여 주시옵소서.”

그로서는 죽여 달란 말 외엔 할 말이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환사를 노려보던 양천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상세히 보고하라.”

환사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상황을 보고했다.

그의 보고는 언제나 명확했다.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 시선으로 사건을 전달하는 게 환사 최대의 장점이었다.

환사의 보고를 전부 들은 양천은 나직이 탄식을 토했다.

“이놈아…….”

정보부장 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어조, 다소 긴장한 얼굴, 하지만 열정과 지혜로 번뜩이는 눈빛.

어지간한 일은 전부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놈이다. 그 거친 성정을 갖고도, 부내 수뇌부들이 위화감을 느낄지 모르니 같은 문파 소속원들은 나중에 데려오겠다며 한 발 물러설 줄도 아는 놈이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정말이지 평생에 다시 없을 인재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이 이 양천에게 잠룡(潛龍)을 안겨 주나 싶었더니, 느닷없이 몰려온 먹구름이 아직 싹도 틔워 보지 못한 용을 잡아갔도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참으로 원통하구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인가.”

처음에는, 아주 잠시나마 녀석이 다른 단체의 세작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 어떤 단체가 그런 천재를 세작으로 보낼 것이며, 나아가 숨어든 조직의 문제점을 뿌리부터 뜯어고치려 들겠는가.

오히려 자신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아부를 떨었으면 떨었지, 조직 개편도와 무림맹으로 향하는 상단의 자금까지 털어서 바칠 리가 없다.

그런 기특한 인재가 싹도 틔워 보기 전에 싸움에 휘말려 죽고 말았다.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모용군.”

푸스스스.

양천의 손에 닿은 팔걸이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감히 본부를 건드렸단 말이지.”

와중에 더 화가 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모용세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

홀로 독야청청할 거라면 모용이든 소림이든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박살을 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무림맹의 기둥 중 하나를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다.

만일 묵룡부의 힘이 무림맹과 일전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면, 지금 즉시 전력을 보내 모용세가를 쓸어 버렸을 텐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모용군은 본부를 건드렸어. 그 말은 놈들이 우리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뜻.’

그때, 환사가 말했다.

“부주님.”

“무엇이냐.”

“저를…… 모용세가로 파견해 주십시오.”

“뭐라?”

“본디 죽었어야 할 사람은 정보부장이 아니라 접니다. 하지만 정보부장이 죽었고, 오히려 제가 살아남았습니다.”

환사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 냉정하기로 유명한 환사의 두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비록 짧은 인연이었으나, 정보부장의 능력과 인품은 능히 본부의 기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만한 인재가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어찌 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

“저승 가는 길, 홀로 보내지 않겠습니다. 부디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

묵묵히 환사를 노려보던 양천이 버럭 소리쳤다.

“닥치거라!”

“…….”

“네놈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정보부장은 본인이 아니라 네놈을 살렸다! 그 말인즉슨, 네놈의 어깨 위에 정보부장의 목숨도 얹혀 있다는 뜻과 같다!”

환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양천이 손을 저었다.

“거처로 돌아가 자숙하라. 내 특별히 이번 일의 죄를 묻지는 않을 것이니, 진정 본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하도록.”

“……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이 조치는 양천의 그릇이 결코 작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총애하는 수하라 해도, 아무 죄도 묻지 않고 자숙게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환사가 나가자 양천이 백서에게 물었다.

“모용군은 본부의 존재를 알고 있었네.”

“그렇습니다.”

정보부장에 관한 얘기는 애써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양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모용군이 알고 있다는 것은, 무림맹 역시 본부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네.”

백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의 존재를 알았다면, 굳이 모용세가 측 병력을 따로 빼서 입구만 폭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건드릴 거면 작정하고 건드렸을 것이고, 지켜볼 생각이었다면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이 맞네.”

애써 냉정을 찾으려 했지만,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보부장마저 잃은 판국이다. 제아무리 양천이라도 평소와 같은 안목을 보여 줄 순 없었다.

“하지만 말일세,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네.”

“…….”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노로 타오르는 두 눈. 백서는 십 년이 넘도록 양천을 모시면서, 그가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용군이 지금 어디에 있다고?”

* * *

“후우, 후우.”

일행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강량이 말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비록 흑도 출신이지만 강량은 무척이나 깍듯했다. 어쨌거나 앞으로 함께할 사이니만큼, 자신보다 연장자에겐 그만한 대우를 해 주겠다는 뜻이리라.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한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저쪽에서 들리는 폭음은……?”

“거지.”

패율이 가득상에게 물었다.

“천자산만 넘으면 된다고 했지?”

“헉헉, 그렇습니다.”

가득상이 호흡을 고르며 물었다.

“하지만 선배님, 정말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물론이다.”

“실무조장이 남아서 적들과 교전 중입니다!”

“그래서, 도우러 가자는 말이냐?”

가득상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 공자만 놔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때, 제갈아연이 말했다.

“공사 구분을 똑바로 하세요, 후개.”

모두가 놀라서 제갈아연을 보았다.

제갈아연의 호흡 역시 무척이나 거칠었다. 그러나 거친 호흡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차가웠다.

“실무조장은 남을 만하니까 남은 겁니다. 우리가 도움이 되었다면 애초에 홀로 떨어질 생각도 안 했을 거예요.”

“하, 하지만…….”

“지금 실무조장을 도우러 가는 것은 오히려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 나아가 이번 임무에 지장을 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미 임무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아군을 두고 가는 것은 오히려……!”

“이보세요!”

서슬 퍼런 목소리에 가득상이 흠칫했다.

제갈아연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우리라고 실무조장을 돕고 싶지 않은 줄 알아요? 유난 떨지 마세요. 오히려 후개보다 더 절실한 사람도 있어요.”

“…….”

“나도, 그리고 당신도 약해요. 약자가 주제넘게 강자를 구하러 간다? 그렇게 죽고 싶어요?”

“…….”

“정 그렇게 죽고 싶으면 이 자리에서 칼을 물고 엎어지세요. 죽으러 가는 이유에 남을 이용하지 말란 말이에요.”

살벌하다면 살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제갈아연 역시, 아니 오히려 그녀가 가장 절실하다는 것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어떻게든 다독이고 있다는 걸.

흔들리는 눈으로 제갈아연을 보던 가득상이 고개를 숙였다.

“……괜한 말로 심기를 흐트러트렸소이다. 사과하겠소.”

제갈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후개가 얼마나 화가 나는지.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해요.”

“소저의 말이 옳소.”

제갈아연이 패율을 보며 물었다.

“지원 요청 시간과 지원 병력의 마지막 연락 시기를 보면, 대략 한 시진만 더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힘들어도 쉬지 않고 출발하는 게 더 낫겠어요.”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네.”

파아악!

그렇게 일행이 신법을 펼쳤다.

고요한 숲속, 거친 숨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조심스레 일행의 눈치를 살피던 강량이 패율에게 물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나마 가장 멀쩡한 사람이라서 그에게 물은 것이었다. 패율 역시 호흡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개중에선 가장 안정적이었다.

패율이 말했다.

“설명하기 복잡하다. 얘기는 나중에 그놈에게 듣도록.”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알겠습니다.”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산봉우리에서 꼬박 하루 반나절을 기다렸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안 보이고 일행만 와서 함께 이동 중이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그러나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강량이 놀란 눈으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지칠 정도라니.’

이 중 가장 약한 제갈아연만 해도 언뜻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특히나 자신을 데리고 장원으로 향할 때 보여 줬던 눈치와 진법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무공보다도 대단한 힘이었다. 즉,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비범하기 그지없는 인재라는 것이다.

그런 자들이 이렇게까지 피폐해지다니.

‘묵룡부…….’

강량의 얼굴이 흐려졌다.

‘묵룡부가 그렇게나 강한 조직이었던가.’

연호정이 왜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단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을 겪어 보지 않았다면, 아직도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괜찮아.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강량이 입술을 깨물었다.

‘힘이 필요해. 누구보다도 강해질 때까지,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지 반 시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옵니다.”

“안다.”

패율이 제갈아연을 돌아보았다.

제갈아연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드리워졌다.

“한 시진은 걸릴 거라더니, 뭐가 이렇게 빨라?”

두두두두두두.

산천이 떨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이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졌다. 거의 절정고수의 신법 못지않은 속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앙!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강량의 입이 떡 벌어졌다.

히히히히힝!

수십 마리의 군마가 용음(龍吟)을 토해 내며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저, 저게 뭐야?!”

제갈아연의 눈에 격동이 깃들었다.

“멸사군!”

그때였다.

파아아아악!

등에 활을 건 누군가가 제갈아연의 옷깃을 잡고 그대로 끌어 올렸다.

“묵 부장!”

“이랴!”

콰르르르릉!

오십 기의 기마가 일행을 그대로 통과했다.

기마에 탄 무인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거칠게 말을 몰 뿐이었다.

그들의 상관, 멸사군장을 구하러 가는 길.

무섭도록 달아오른 그들의 살기가 거센 폭풍이 되어 천자산을 뒤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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