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6)
“쿨럭!”
백서의 눈이 커졌다.
“부, 부주님.”
양천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흐릿한 그의 눈동자는 짙은 피로를 담고 있었다.
“……백서인가.”
“예, 부주님. 괜찮으십니까?”
양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몸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쓰러졌던 겐가?”
담담한 말투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절대자의 목소리였다. 백서는 비로소 자신의 주군이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렇습니다.”
“의원은 뭐라던가.”
“아직 정확한 원인을 알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흐음.”
“다만…….”
“말하게.”
잠시 입을 달싹이던 백서가 이내 다짐한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정보부장이 진맥한 바로는, 부주님의 흉부 상처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양천의 안광이 번뜩였다.
“내 흉부?”
“그렇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보부장에게도 부주님의 진맥을 맡긴 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구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원인을 밝히고자 한 백서의 노력이 기꺼웠다.
다만, 정보부장이 의원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 의외였다.
“정보부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양천이 백서를 바라보았다.
그답지 않게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놀랍게도 그 표정에는 얼핏 후회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양천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설명하게. 내가 쓰러지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푹 숙인 백서는 그간의 일을 가감 없이 얘기했다.
양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흑양, 그놈이?!”
“그렇습니다.”
놈이 아직 사음교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배신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정보부장은 자신이 흉부의 흉터 때문에 쓰러졌다고 말했단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를 떠나, 이 흉터는 사음교주의 음황신장(陰荒神掌)에 당한 상처였다. 그리고 흑양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탁탁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놈은 뇌옥에 가둬 두었는가?”
“그렇습니다. 다만 정보부장이 그를 잡는 과정에서 급박함을 느낀 모양입니다. 상당히 망가진 상태입니다.”
“살아만 있다면 되었다.”
양천이 상체를 세웠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대자의 기도에 백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살아만 있다면 되었지.”
“그리고…….”
백서가 이를 악물었다.
흑양이 배신자였다는 것도 큰 충격이었지만, 사실 더욱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정보부장이…… 사망한 것 같습니다.”
양천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설명하라. 상세히!”
* * *
“후욱.”
제갈아연이 숨을 몰아쉬었다.
파아악!
재빨리 옆으로 다가온 연호정이 그녀의 명문혈에 손을 올렸다.
우우우우웅.
현무기를 운용해 진기가 스며드는 통로를 만들고, 그 통로에는 청룡기를 쏟아부었다. 당장 심폐에 큰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거친 백호기보다는 청룡기가 보다 적합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우우웅.
제갈아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마워.”
“아니야.”
청룡기로 피로를 날리고 현무기로 탁기도 어느 정도 뽑아냈지만, 그것만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제갈아연만이 아니었다. 당상아는 물론 가득상과 패율도 상당량의 내공을 소모한 상황이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점점 바닥을 보이는 내공이 더 큰 문제였다.
“제기랄, 흥분하는 게 아니었는데.”
급박한 상황일수록 경직되어선 안 되는 법이었다. 제갈아연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너만 흥분했겠냐. 다들 흥분했지.”
“컹.”
“뭐야, 그 희한한 소리는.”
“할 말이 없어서.”
분위기를 풀어 보겠답시고 한 말이지만, 결국 수십 명의 양민이 죽은 상황이었다. 분위기가 쉽게 풀어질 리 없었다.
연호정이 가득상에게 물었다.
“강량은?”
“저기 달빛 걸린 봉우리 보이시오? 저기서 대기 중이오.”
“넉넉잡아 반 시진이면 만나겠군.”
연호정이 패율에게 물었다.
“선배님께서는 괜찮으시지요?”
“날 뭘로 보는 거냐. 사흘은 더 달릴 수 있다.”
“세 시진 안에는 상황이 끝날 겁니다.”
“사흘이라 하지 않았더냐.”
“알았다고요.”
패율이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어쨌거나 연호정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사 전체가 아수라장이 될 뻔했다. 고맙다고 입이 닳도록 말해도 모자랄 일이었다.
“당씨는?”
“괜찮아요.”
“확실히 여유 있어 보이는군. 체력이 좋아.”
당상아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녀 역시 쌓인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패율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창은?”
“놓고 왔습니다. 그래야 제 죽음을 믿을 것 같아서요.”
“음.”
연호정은 맨손으로도 충분히 강하다. 하지만 장병기를 들면 훨씬 더 강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거리도 벌렸고, 별문제 없는 이상 이 길로 반나절만 더 달리면 상황 종료입니다.”
“그게 문제지. 별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
“어떻게든 되겠지요.”
패율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든 된다? 연호정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우우웅.
연호정이 안력(眼力)을 틔웠다.
‘강량이 저기에 있단 말이지.’
호남 최북단 천자산(天子山) 인근이다.
천자산만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호북이다. 호북성에 들어서는 순간 묵룡부의 병력도 추적을 멈출 수밖에 없다.
“자, 조금만 더 기운 냅시다.”
파아아앙!
일행은 다시 달렸다.
약간의 휴식과 혼신의 힘을 다한 도주의 반복이었다. 속도는 충분했지만, 일행의 체력은 눈에 띄게 떨어져 갔다.
그렇게 또 얼마나 지났을까.
‘…….’
후미에서 달리던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선배님.”
“말해라.”
“혹시 모르니 후방이나 한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조원들을 이끌고 먼저 가십시오.”
순간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어두운 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심신이 지친 다른 일행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무음의 대화였다.
[붙었냐?]
[그렇습니다.]
[강하냐?]
[끊어 놓지 않으면 힘들 것 같습니다.]
[제기랄.]
패율은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전하려 했다.
그때, 연호정이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원들을 부탁드립니다.]
[…….]
[실무조장으로서의 명령입니다.]
패율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펄럭!
자신의 피풍의를 벗어 연호정에게 던져 준 패율이 짧고 강하게 외쳤다.
“가자!”
파아악.
세 사람이 패율의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웃으며 그들을 보던 연호정은, 문득 제갈아연과 눈이 마주쳤다.
제갈아연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쳐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연호정이 왜 후방을 살피겠다는 건지 깨달은 것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사박.
그렇게 연호정의 시야에서 일행 모두가 사라졌다.
파아아악!
오던 방향으로 몸을 돌린 연호정이 폭발적인 움직임으로 쏘아져 나갔다.
‘저기다.’
참백단의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이십 리가 넘는 거리가 벌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즉.
‘저놈들은 먼저 출발한 참백단을 한참 앞질러서 올 정도로 실력이 좋다는 것.’
연호정이 숨을 가볍게 들이쉬었다.
“역시 세상일 쉬운 게 하나도 없구만.”
스르르르.
부드럽게 자세를 푼 연호정이 사신기를 잠재우고 벽라진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우우우우웅.
대기와 공명하는 벽라진기. 맑은 하늘처럼 푸르른 기운이 그의 동공에 자리 잡았다.
‘여기다. 여기로 와라.’
휘이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
대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넓게 퍼져서 다가오던 고수들이 일순 한 점을 향해 송곳처럼 뾰족한 대형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대형이 노리는 지점은 바로 연호정이 있는 곳이었다.
‘미안하지만 천자산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거야.’
펄럭!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 주작기로 태워 버린 그가 패율의 피풍의를 걸쳤다.
두건으로 코 위를 가리자 연호정의 표정이 반 이상 가려졌다.
“후우우.”
천천히 숨을 내쉬며 힘을 푸는 연호정.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박.
어두운 산길, 누군가가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호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호흡을 뱉고 있었다. 내가고수의 호흡은 평범한 사람보다 더 길고 탄탄하지만, 연호정의 호흡은 그중에서도 유독 길었다.
사박, 사박.
달리 위협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어둠 속에서 삼십여 명의 고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물었다.
“묵룡부의 입구 붕괴, 참백단 삼 대와 사 대를 몰살시킨 의문의 고수. 모용세가와 모종의 관계가 의심되는 수상한 자들.”
“…….”
“다른 일행은 어디에 있느냐?”
그때, 연호정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우우우우웅.
몸 전체를 에워싼 벽라진기가 더 강렬하고 화려한 청색 빛무리를 뿌렸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일행은 어디…….”
그때, 연호정의 호흡이 멈추었다.
“흡!”
퍼어어어억!
입을 열었던 자의 머리통이 산산이 조각났다.
빛살처럼 거리를 좁혀 단번에 머리통을 부숴 버린 연호정, 이미 그의 두 눈은 산중대왕의 위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르르르릉.
연호정의 입에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청호의 포효와는 차원이 다른 마수(魔獸)의 울음소리였다.
“죽여라!”
파아아악!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빠르다.’
대장을 죽였는데도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느껴지는 기도가 그러했다.
게다가 이 낭비 없는 움직임.
‘사혼조(死魂組)인가?’
묵룡부의 암살 전문조.
살인귀 집단인 참백단과는 차원이 다른 병력이다. 묵룡부 내에서도 필살(必殺)의 의지를 보여 주는 죽음의 부대가 바로 사혼조였다.
그리고 사혼조가 출격했다는 뜻은?
‘양천이 깨어났다!’
휘이이잉! 콰아앙!
호왕구벽세의 폭발적인 일격이 사혼조원 셋을 날려 버렸다.
소리만 들으면 무슨 화탄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위력적인 권격이었지만, 정작 뒤로 날아간 세 사람은 잠시 비틀거렸을 뿐 죽지는 않았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파아아악!
협봉검 네 자루가 절묘한 위치에서 쏘아졌다.
한데 검에 실린 살기가 너무 흐릿했다. 이게 진짜 죽이려고 휘두른 검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파라라라락!
피풍의가 화려하게 펄럭이며 네 자루의 협봉검을 모조리 피해 냈다.
연호정의 두 다리가 풍차처럼 휘둘러졌다.
파바바박!
한 방씩 총 네 번을 가격했지만, 정작 죽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사혼조원들이 곧바로 붙어서 경력(勁力)을 분산시킨 것이다.
‘이런.’
힘을 분산하는 능력이 기가 막힐 정도로 뛰어난 놈들이었다. 일대일이라면 못 해도 세 합 안에 승부를 낼 자신이 있지만, 숫자가 많아질수록 처리하기가 기하급수적으로 힘들어지는 놈들이었다.
“빌어먹을, 싸움이 길어지겠군.”
어쩔 수 없다. 일행을 위해서, 임무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놈들을 쓰러트려야만 했다.
‘이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그때는 진짜 양천이 나설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나섰을 수도.’
연호정의 볼이 씰룩거렸다.
‘이왕이면 모용군한테 가라!’
화르르르륵!
주작기가 솟구치며 극살의 무공, 홍염육살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퍼어엉!
그 시각.
멸사군이 천자산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