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5)
콰르릉!
폭음과 함께 시커먼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번쩍! 번쩍!
구름 곳곳을 누비는 뇌기(雷氣)가 위협적인 광채를 뿜어냈다.
재차 공격에 들어가려던 청호는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무척이나 탄력적인 움직임이었지만, 이미 그의 육체는 한계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이럴 수가.’
야수처럼 흉흉한 살기로 가득하던 청호의 두 눈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육대세가의 가주가 이 정도로 강했던가?!’
모용군의 무공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대단했다.
십이지신 중 최연장자이자 양천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백서의 무공은 능히 육대세가의 가주에 필적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른 십이지신 중 백서의 무위에 근접한 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축(丑)과 진(辰), 미(未), 그리고 자신인 인(寅)이 그러했다.
‘다르다.’
청호가 자세를 낮추었다.
‘실제 육대세가 가주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 하지만 모용가주의 무공은, 그중에서도 특출난 수준인 것이 분명해.’
파아아아악!
먼지구름이 반으로 갈라지며 한 줄기 푸른 뇌광(雷光)이 수룡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이익!”
콰릉!
수룡의 소매를 스치고 지나간 뇌전의 검격이 제법 큼직한 바위를 매끈하게 반으로 쪼갰다.
회피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청호와 광견보다도 뛰어난 자가 수룡이었다. 그런 수룡이 반격은커녕 피하기만 급급했을 정도로 검격의 위력과 속도가 대단했다.
‘대체 뭐냐.’
파아아앙!
먹잇감을 발견한 범처럼 뛰어든 청호가 호철조(虎鐵爪)를 휘둘렀다.
‘대체 그 무공은 뭐냐고!’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콰앙!
“큭!”
울컥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간 청호의 몸에 시퍼런 전광이 부서지듯 비산했다.
서둘러 일어나려던 청호가 갑자기 상체를 숙였다.
“우웨에엑!”
대량의 토혈이었다.
철판도 우습게 갈라 버리는 호철조가 모용군의 내공 방벽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오히려 가볍게 내친 장력에 내상을 입은 건 청호였다.
‘무서운!’
세상에 이런 무공도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모용군이 인상을 찡그렸다.
“참으로 성가신 것들이로고. 다른 건 몰라도 끈질긴 것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나.”
청호는 체력이 좋았고, 수룡은 회피가 좋았으며, 광견은 허점을 노리는 눈이 좋았다.
만일 상고의 절학, 뇌정공(雷霆功)과 무정천뢰식(無情天雷式)을 연성하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일대일 결전이라면 가주지학(家主之學)인 건곤무해(乾坤武解) 역시 뇌정공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난전에서는 뇌기(雷氣) 그 자체로 적에게 심리적 위협을 줄 수 있었다.
모용군이 초절정고수 셋을 상대하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유였다.
‘생각 외로 잘 버티는군.’
모용군은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이 정도면 되었으려나.’
어느새 붉게 물든 석양이 서서히 어둠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실무조도 묵룡부의 영향권에서 상당 부분 벗어났으리라.
‘연호정.’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수를 써도 내가 뒤를 맡아 줄 걸 알고 있었다…… 허!’
대체 어떤 놈들을 포섭해서 묵룡부에 타격을 가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기야 작정하면 사람 모으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본가와 묵룡부를 원수지간으로 만들겠다?’
참으로 대담한 놈이 아닌가.
이전에도 몇 번 감탄했던 적이 있지만, 정말 이번의 이 공격만큼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애초에 자신을 속일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호남 본가의 영향력을 줄여 버리겠다, 이건가?’
이 정도 술수로 모용세가가 무너질 리 없다는 것쯤은 연호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모용세가의 힘이 묵룡부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당장은 묵룡부가 모용세가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모용세가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무림맹을 향한 선전 포고나 다를 바 없다. 힘이 비등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묵룡부는 절대 무리수를 둘 수 없다.
다만 모용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묵룡부에 타격을 가했으니, 묵룡부 역시 모용세가를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되면 모용세가는 지금까지처럼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없다. 묵룡부가 어디서 치고 들어올지를 항상 계산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만에 하나’라는 불안감을 심어 주는 것.
모용세가 정도의 규모를 가진 대문파는 그것만으로도 큰 제약과 피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말이야.’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로는 휘청거리지 않는다네.’
묵룡부와는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사이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다만, 하나 의아한 점이 있었다.
‘놈도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할까?’
거기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말 여기서 끝인가? 아니면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이 또 들어올 것인가?
“개 같은 자식.”
광견이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감히 본부를 습격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모용군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글쎄다. 어차피 정(正)과 사(邪)는 양립하기 어려운 사이거늘, 새삼스러울 게 있겠느냐?”
“이 새끼!”
“하기야 묵룡부가 사라지든 본가가 사라지든, 그거야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닌 듯싶구나.”
지이이이잉!
모용군의 검신에서 무서운 뇌기(雷氣)가 방출되었다. 지금껏 구사했던 것보다 두 배는 더 강력한 힘이었다.
그 광경을 본 세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모용군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 다 묻어 버릴 생각이니까.”
그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수룡이 외쳤다.
“피해라!”
번쩍!
시퍼런 검광이 거대한 초승달을 그리며 세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힘의 밀도, 참격의 속도, 내공 발산의 범위 등이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미리 피하려고 해도 검격이 짓쳐 들어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회피 자체가 어려웠다.
‘이런!’
청호의 얼굴에 낭패가 깃들었다.
‘그랬구나!’
이번 공격은 필살의 공격이다. 달리 말하면, 이 정도 검격을 구사하고 난 후에는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껏 모용군이 이 검을 펼치지 않은 것은 세 사람의 반응 속도를 대폭 깎아 놓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청호는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검격을 보면서도 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몸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청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는 소신의 불충을 용서……!’
그때였다.
파삭! 퍼어어어억!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무언가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청호가 눈을 떴다.
그와 광견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쥐새끼처럼 잘 피하던 놈이라 말이야. 저놈 하나를 잡았으니 싸움이 두 배는 더 쉬워지겠지.”
모용군이 검신을 두들기며 호흡을 골랐다. 청호의 짐작대로, 이 검격은 연달아 쓰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공 소모가 심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득은 있었다.
푸슉! 푸슉!
상체가 모조리 날아가 버린 수룡의 하반신이 피를 쭉쭉 뿜어내다가 이내 쓰러졌다.
참격이 아니라 자격(刺擊)이다. 애초에 모용군의 목표는 회피 기동에 능한 수룡이었던 것이다.
“……!!”
청호와 광견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네들은 도망치지 말게. 아니, 도망쳐서는 안 되지. 나는 자네들의 원수가 아닌가?”
파지지직.
모용군의 몸에서 위협적인 뇌기가 번져 나왔다.
폭발적인 일격을 내친 후라 잠시나마 내공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청호와 광견에게는 한층 더한 공포를 선사했다.
“자, 이차전을 시작해 볼까?”
청호가 이를 갈았다.
“광견.”
“……왜?”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다. 부로 돌아가서 지원 병력을 요청해라.”
“지랄하지 마라.”
“광견!”
“애초에 도망치는 게 가능할 것 같냐? 저 미친놈 내공 안 보여? 도망치는 순간 죽는다.”
광견이 으르렁거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해.”
청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여기서 끝을 보지.”
그때였다.
퍼어어엉!
저 멀리 서쪽 강가에서 폭음과 함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용세가의 병력과 십이지신 휘하 부대가 생사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은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이번의 폭음이 유독 컸다.
광견이 욕설을 뱉었다.
“이 개자식! 폭약까지 준비했냐?! 수치도 모르는 놈! 그래, 오늘 뒈지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 팔 한 짝은 가져가야…….”
말을 잇던 광견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용군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서쪽을 보는 그의 두 눈은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연?”
강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에 깔아 둔 모용가의 병력은 폭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폭약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저들은 퇴로 확보를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폭약‘씩’이나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무연은 다르다. 무연은 언제나 폭사(爆死)를 위한 소형 폭약을 가지고 다녔다.
‘정말 무연인가? 설마!’
무연은 은신술의 대가였다. 작정하고 인기척을 숨기면, 모용군조차도 기척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고수인 것이다.
그런 그가 당한 것일까? 왜? 어떻게?
앞으로 함께 해 나갈 일이 무궁무진한 놈이, 정말 여기서 죽었다고?
지이이이이잉!
무정한 검신(劍身) 위로 천뢰(天雷)가 내려앉았다.
“안 되겠군.”
모용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장난은 끝이다, 쓰레기들.”
번쩍!
뇌전의 검격이 청호와 광견을 그대로 휩쓸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모용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 *
두두두두두.
발굽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무려 오십에 가까운 군마(軍馬)들은 어느 한 마리도 예외 없이 대단한 위용을 뽐냈다. 온몸이 근육질인 데다가 한 번 땅을 박차면 삼 장 거리를 가볍게 넘나드는데, 뜀박질 자체에 탄력이 넘쳤다.
종(種)이 좋다고 이런 군마로 만들 수는 없다. 마체(馬體)에 알맞은 약재와 풍부한 먹이, 제때 달리게 해 주는 등 극도로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히히히히힝!
선두에서 달리던 군마가 용음(龍吟)과도 같은 울음을 터트렸다.
등에 아무도 태우지 않은 군마는 유독 크고 튼튼해 보였다. 목과 앞다리에는 창검에 찔린 상흔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전장 경험이 풍부한 기마인 듯했다.
“더 빨리!”
주인을 태우지 않은 기마 바로 옆.
등에 붉은 활을 맨 여인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반나절 거리가 남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곧장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녀의 외침에 뒤따라오던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외쳤다.
“존명!”
말발굽 소리마저 묻힐 정도로 우렁찬 대답.
내공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들 모두가 뛰어난 절학을 익힌 무림인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무림인이 아니었다.
어깨, 가슴, 팔뚝, 정강이 등에 경갑을 찬 그들의 모습은 이미 하나의 군대(軍隊)로서 완성되어 있었다. 제각기 투지가 엿보이는 두 눈은 백전노장의 여유와 강단을 동시에 품었고, 누구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는 기도는 거대한 군기(軍氣)로 화하여 대기를 뒤흔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남하하는 무림맹 소속 독립 유군.
당대 백도 무림 최고의 실전 부대, 멸사군의 질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