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4)
‘……?!’
연호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뭐지?’
석양이 강렬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이제 반 시진 내로 세상이 어두워질 것이다. 이미 하늘 저편에 흐릿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기가 요동친다.’
조금만 더 가면 장사 인근이다.
한데 그곳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이상했다.
‘너무 부산스러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장사는 호남의 성도다. 날이 저물어도 사람이 많다. 아니, 유흥을 즐기고자 모인 사람들 때문에 더더욱 활기찰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사람이 많다고 풍기는 혼란이 아니었다.
캬아앗!
심장에 자리한 주작기(朱雀氣)가 거친 울음을 토해 냈다.
‘살기?!’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콰앙!
강력한 진각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직감한 연호정, 그간 임무 때문에 잠재워 두었던 모든 힘을 하나하나 일깨우기 시작했다.
츠츠츠!
최소의 내력으로 존재감을 죽인 채 달리던 연호정의 몸에서 불꽃 같은 기파가 휘몰아쳤다.
화르르륵!
깨어나는 주작기가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심박수가 올라가며 심박출량을 증가시키고, 뿜어진 혈액이 온몸을 휘돌며 전신의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후우우웅.
들이쉬는 백호기(白虎氣)가 폐장 능력을 극대화했다.
심폐 능력의 급격한 증대. 팔다리에 힘이 넘쳐흐르고 감각이 한층 예민해졌다. 대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했고 골육이 탄탄해졌으며, 온몸의 관절이 유연해졌다.
우우웅!
십 성에 이른 벽라진결이 신체가 받는 부담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주작기와 백호기는 천하제일을 논할 만큼 거칠기 짝이 없는지라, 벽라진기의 보호로도 근육의 피로를 완벽하게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때, 청룡기(靑龍氣)가 치솟았다.
치이이이익!
간장 능력이 활성화되며 축적된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동천(東天)의 신기(神氣), 달아오른 청룡기가 회복력의 정점을 찍은 것이다.
신체와 기의 활용도를 극한까지 뽑아 올린 삼신(三神)의 힘.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했다. 폭발적인 무공을 내치기에 충분한 상태지만, 지나치게 강한 힘을 구사하다가는 섬세함을 잃을 수 있다. 자칫 잘못하다간 신체 균형이 망가져 내상까지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화아아아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균형을 조율하는 북천(北天)의 신기(神氣).
현무기(玄武氣)였다. 현무기가 치솟으며 잠시나마 생성된 탁기를 모조리 제거함과 동시에 체내 균형을 완벽하게 바로잡았다.
연호정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아.’
그간 상황에 따라 한두 가지의 힘만 뽑아 썼더랬다.
하지만 사신무의 진가는 모든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룰 때 발휘되는 법.
‘이제 거리낄 것 없어.’
연호정의 두 눈에 사색(四色)의 기운이 순차적으로 번뜩였다. 실로 오랜만에 출격하는 사신기(四神氣), 그 전설적인 무(武)가 비로소 호남 땅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콰아아앙!
땅거죽이 뒤집혔다.
파아아아앙!
종전보다 배에 가까운 속도를 내는 그였다. 연가 최고의 신법 천종운행비(天縱運行飛)가 상생(相生)의 힘을 받아 파격적인 속도와 한계 없는 자유를 선사했다.
파라라라라락!
장포 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그대로 더 속도를 올렸다간 끝단이 너덜너덜해질 것 같았다.
단숨에 장사 인근으로 들어선 연호정, 그의 기감이 실무조 일행의 인기척을 곧바로 잡아냈다.
‘서쪽!’
파아아아앙!
놀라운 신법이었다.
허공에서 재차 발을 놀려 가속한다.
그야말로 한 줄기 빛살처럼 나아가는 그였다. 그간 억제했던 힘을 삽시간에 개방하니, 억눌렸던 모든 기운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그의 무공 자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전각 몇 개의 지붕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연호정의 눈에 실무조 일행이 보였다.
퍼어어억!
강렬한 일검에 사이한 기도를 뿜는 무사 세 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패율이었다. 그간 관일검(貫日劍)을 더 다듬었는지, 내치는 검에 실린 폭발력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일행 중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이었다. 중단세에서 시작하는 모든 검결이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이라, 칼질 한 번에 적들의 수급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점창의 무공을 쓰지 않아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강하다. 과연 점창파 최연소 장로, 헤아릴 수 없는 전투로 연마된 상승의 살검(殺劍)이 적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파파파파팡!
당상아의 무공 역시 놀라움 그 자체였다. 사천당가 최고의 재녀라는 그녀의 무공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중견 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암기를 쓰지 않고 있었다.
빠르고 경쾌한 장법. 독기(毒氣)도 운용하지 않았는데, 일장(一掌)이 들어가면 무조건 한 명이 쓰러졌다.
신법은 뱀처럼 음험했고, 내치는 장력은 부드러운 가운데 치명적인 사혈(死穴)을 노린다. 유연하면서도 섬뜩한 권각(拳脚)이 죽음의 춤사위가 되어 참백단을 희롱했다.
콰앙! 콰아앙!
가장 의외인 것은 제갈아연이었다.
전투든 임무든, 언제나 한발 뒤로 물러나 있던 그녀였다. 애초에 그녀는 무공보다 머리를 쓰는 데에 더 능했고, 결과가 마땅치 않더라도 또 다른 수를 궁구하길 즐겼다.
지금은 아니었다.
빠각! 퍼억! 쾅!
제갈세가의 고고한 무공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살초로 변화하여 적들을 죽여 나갔다.
놀랍게도, 제갈아연의 실전 능력은 무척이나 탁월했다. 그간 멸사군을 지휘하며 함께 체득한 건지, 오히려 살초의 활용력만 보면 당상아 이상이었다.
무고한 양민의 죽음 앞에 분노한 제갈아연, 연호정에게도 보여 준 적 없던 무시무시한 무공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가득상.
가장 의외가 제갈아연이라면,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가득상이었다.
“죽어!”
빠각! 퍼억! 퍼억!
손속에 흥분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일격에 적을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 삼격(三擊)에 걸쳐 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나마 한 줄기 이성의 끈은 붙잡고 있는 걸까. 개방 무공 특유의 엇박자와 허술한 듯 강맹한 권격을 펼치고 있지만, 천만다행으로 비기는 개방하지 않았다.
“이놈들이다! 모조리 불러!”
“단주님께 연락해라! 이곳에 전부……!”
파아아앙!
단숨에 거리를 좁힌 가득상이 그대로 참백단원 하나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빠각!
가슴을 맞은 참백단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흉골이 움푹 파였으니 목숨이 성치 못할 것이다.
“그래, 다 불러!”
가득상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이글거렸다. 피풍의의 두건마저 뚫을 정도로 맹렬한 살기였다.
“다 불러라! 모조리 죽여 주마!”
무서운 기세였다.
분노로 무공의 위력은 상승했지만 섬세함과 균형을 잃었다.
일격, 일격이 강해진만큼 체력 소모가 꽤 심했다. 가득상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참백단 삼 대(三隊)의 대장 귀도(鬼刀)가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섣불리 접근하지 마!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지 놈들을 에워……!”
그때, 한 줄기 지풍(指風)이 대기를 관통했다.
퍼어어어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귀도의 눈이 풀렸다.
힘을 잃은 고개, 이내 그가 털썩 쓰러졌다.
화르르르륵!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강렬한 열기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무림인이 지풍이 쏘아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콰아앙!
무지막지한 돌풍이 전장 한가운데를 갈랐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었다. 폭발적인 화기(火氣)로 모두의 눈을 속인 연호정이 백호기를 최고 출력으로 뽑아내 참백단이 밀집한 곳으로 치고 들어간 것이다.
연호정의 쌍권(雙拳)이 폭풍 같은 맹타를 퍼부었다.
퍼버버버버벅!
강하고 빠르다.
동시에 정확하고 섬세했다. 야수지왕, 서방의 대제 백호의 송곳니가 열다섯이나 되는 참백단원의 심장을 정확하게 후려쳤다.
푸화아아악!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참백단원들.
당황한 잔여 병력이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일행처럼 두건을 쓰지 않았기에 얼굴이 드러나선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단 시간,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적들을 섬멸하려면?
퍼어어엉!
폭발하는 태양기(太陽氣)가 연호정의 몸을 신속(神速)의 경지로 이끌었다.
퍼버버벅! 빠각! 콰아앙!
무자비한 권장(拳掌)을 뿜는 화신(火神)의 재림이었다.
살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연호정, 적진 한가운데를 돌파하는 무적의 장수가 되어 인의를 저버린 악인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 버린다.
당황한 참백단원들은 뒤늦게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연호정은 그들의 물러섬을 용인하지 않았다.
극한의 속도로 움직이는 그였다. 참백단원들은 연호정의 얼굴은커녕 눈빛조차 읽지 못했다.
퍼버버버벅!
네 사람이 물리친 적의 숫자보다 연호정이 죽인 적의 숫자가 더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억?!”
누구보다 흥분했던 가득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 공자!’
일행 중 제갈아연을 제외하면, 연호정의 무공을 가장 많이 봐 온 사람이 그였다.
제갈아연이 외쳤다.
“북쪽으로!”
파아아악!
패율과 당상아가 제갈아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콰아앙!
쌍장(雙掌)으로 내치는 죽음의 무공,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으로 참백단원 대여섯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린 연호정이 곧장 가득상에게 쏘아졌다.
파아아악!
미처 당황할 새도 없었다. 어느새 가득상을 어깨에 메고 움직이는 연호정의 신법은 눈이 돌아갈 만큼 빨랐다.
가득상이 외쳤다.
“두 놈 남았소!”
모조리 죽여 버릴 기세였다. 멀어지는 두 명의 적을 노려보는 가득상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연호정이 외쳤다.
“뒤에 더 많은 적이 오고 있소! 이제 거리를 벌려야 할 때요!”
“시바알! 저 개새끼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계속 남아 있어 봤자 저쪽은 전쟁터가 될 뿐이오! 차라리 유인하는 게 낫소!”
“……빌어먹을!”
원통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득상의 두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제길! 제길!’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무림맹의 임무 때문에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이 죽었다. 그중에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법한 어린아이도 있었다.
‘미안하오.’
분노보다는 자괴감과 미안함이 컸다. 정말이지, 저놈들이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개.”
“…….”
“지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벗어나는 것에만 집중합시다.”
대번에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은 연호정이었다. 그 역시 화가 났지만, 더는 저곳에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실무조도, 그리고 양민들도.
가득상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 만일 저 개자식들이 또…….”
“양천은 도리를 아는 자요. 그건 그 수하들도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난장을 쳐 봤자 본인들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오.”
“…….”
“냉정을 되찾으시오.”
“……이만 내려 주시오.”
연호정이 숨을 들이쉬곤 가득상을 멀리 던졌다.
파라라락!
멋들어진 신법으로 땅에 내려선 가득상이 연호정과 보조를 맞추며 달렸다.
“연 공자.”
“말씀하시오.”
“……고맙소.”
“그런 말은 이곳을 벗어난 후에나 합시다.”
연호정의 눈이 격정으로 번뜩였다.
“놈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소. 임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