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41화 (241/963)

241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3)

“선배님.”

“어떻게 됐어?”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남은 그림자 무사 전원, 폭약과 함께 묵룡부 입구를 초토화하고 폭사했습니다. 방금 확인하고 왔어요.”

“그래?”

남서쪽을 바라보던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선배님.”

“……?”

“죄송했습니다.”

“뭐가?”

“전에 제가 괜한 말로 선배님께 따지고 든 거요.”

“네 녀석이 언제 내게 따지고 들었더냐? 진짜 그랬으면 목을 날려 버렸을 거다.”

그답지 않은 농담이었다. 그래서 가득상은 더더욱 그에게 미안했다.

‘선배님도 충분히 고통스러워하신다.’

귀주상회의 상행조로 위장했던 모용세가의 그림자 무사들은 전부 죽은 게 아니었다.

연호정은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려 했고, 결국 남은 인원이 오십이 되었을 때 그들은 공격을 멈추었다.

이후, 연호정은 그들을 열렬히 구슬렸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죽을 필요 없다고, 차라리 모용군에게 한 방 먹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끊임없이 호소했더랬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림자 무사 전원이 만성적인 독약에 중독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제때 해약을 먹지 못하면 죽는 운명. 당연하게도 모용군은 그들에게 해약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

심지어 자신들이 죽지 않으면 모용군에게 붙잡혀 있는 가족들의 인생이 비참해진다. 그들이 죽자 사자고 덤볐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연호정의 설득에 마음을 돌려 목숨을 걸고 모용군에게 한 방 먹였다.

‘그대들의 이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또 한 차례 한숨을 쉬는 가득상을 보며 패율이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거지 주제에 웬 한숨을 그리 쉬는 거냐.”

“거지는 한숨 쉬면 안 됩니까?”

“안 그래도 복 없는 거지 놈 아니더냐. 없는 복마저 달아나겠다.”

“헤헤,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스르릉.

“……죄송함다.”

패율이 코웃음을 치며 납검했다.

“우리도 슬슬 출발하자.”

“옙.”

“그나저나 장소는 어디였지?”

“…….”

“왜?”

“어떨 때 보면 정말 지혜로우신데, 이럴 때 보면 진짜 무식하십니다.”

차아아앙!

“악! 농담입니다! 진짜 농담이에요!”

“값싼 농담이구나. 네놈 목숨 하나만 걸면 되니까.”

“죄, 죄송하다니까요.”

“흥.”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장사 북서쪽 익양(益陽)으로 향하면 됩니다. 일단은 장사 외측 거리로 가셔야 해요.”

“알았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제갈아연이 입을 열었다.

“저기…….”

“뭐 해? 어서 준비해라. 당상아, 너도.”

“저, 저기 선배님?”

“뭐냐?”

“그…….”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도 저 거지 놈 닮아 가는 거냐? 질질 끌지 말고 말해라.”

제갈아연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저희가 하나 간과한 게 있었나 봐요.”

“뭘?”

“묵룡부의 반응이요.”

“뭐?”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본데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린 패율의 얼굴이 일순 확 굳어졌다.

가득상의 얼굴에도 경악이 드리워졌다.

“저, 저거……?!”

쿠르르릉.

묵룡부가 위치한 악록산 주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아니, 일단의 무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무사들의 숫자는 백 단위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언뜻 봐도 천 명은 넘어 보이는데요?”

“빌어먹을.”

패율이 거칠게 외쳤다.

“움직여!”

파아아악!

네 사람이 재빨리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쉿!’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긴 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이곳은 장사 인근, 호남에서 흑도의 정보원들이 가장 많이 분포한 곳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중 정보원의 기척을 제대로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패율밖에 없었다. 그런 패율조차도 냉정할 때나 제대로 볼 수 있지, 지금처럼 위급한 상황에서는 기감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상아가 제갈아연에게 전음을 날렸다.

[저놈들 반응이 엄청 빠르네, 동생?]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죠. 입구가 통째로 무너졌는데. 다만, 저 주변에 저만한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을 줄은 차마 예상 못 했어요.]

제갈아연이 이를 악물었다.

[저 때문이에요. 부주가 쓰러졌는데 저 정도 경계야 당연하겠죠.]

[동생 잘못이 아니야.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나저나, 저들은 어디에 있다가 튀어나온 거지? 만약 저들이 줄곧 진을 치고 있었다면 그림자 무사들도 걸렸어야…….]

[그분들은 상행조의 옷을 입고 있었어요. 게다가 어떤 목적으로 접근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냅다 죽여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 그런가?]

[네. 근처에 오는 사람들을 족족 죽이면, 오히려 이곳에 수상한 단체가 있다는 걸 만천하에 알려 주는 꼴이 되잖아요.]

[음, 그러네.]

고개를 주억거리던 당상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이렇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어차피 저놈들은 우리를 모르잖아?]

[으윽.]

제갈아연은 발이 꼬일 뻔했다.

[언니! 이미 흑도의 정보원들이 우리 얼굴을 다 알고 있잖아요! 장원까지 폭발시키면서 죽은 걸로 위장했는데 걸리면 큰일 나요!]

[아…… 그럼 지금 우리, 나름 심각한 상황인 거네?]

[엄청이요!]

[어쨌든 저 사람들 다시 볼 일은 없는 거고?]

[안전하게 빠져나가기만 한다면요.]

[음, 좋아.]

당상아가 품에서 작은 금낭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었다. 그녀는 금낭을 저 멀리 북동쪽 수풀로 냅다 던져 버렸다.

퍼어억!

금낭이 터지며 자색 가루를 퍼트렸다.

제갈아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니? 지, 지금 뭐 하신 거예요?]

[단장산(斷腸散)이야. 본가 비전의 극독이지.]

[아니, 그러니까 저걸 왜……?]

[저들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있잖아. 속여야지.]

[그럴 거면 우리 뒤에다 뿌려야죠!]

[그럼 안 되지.]

[네?]

[이쪽에다 뿌리면, 우리가 이쪽 수풀로 이동하고 있는 걸 광고하는 꼴이 되잖아?]

[……아!]

제갈아연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두들겼다. 묵룡부의 무사들이 아무나 죽일 순 없다고, 위치를 발설하는 꼴이 된다고 말한 게 방금이었다.

결국 당상아가 놓은 함정은 제갈아연의 말을 응용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찰나지간 그런 임기응변을 보여 주다니, 새삼 감탄이 나왔다.

[대단해요, 언니!]

당상아가 얼굴을 붉혔다.

[내가 뭘…….]

그때, 패율이 대놓고 툴툴거렸다.

“잘들 논다. 놀러 왔냐?”

“……목소리가 크신대요, 선배님.”

“저놈들 날뛰는 소리 때문에 천지가 진동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크긴 개뿔.”

“아?”

제갈아연과 당상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긴장해서 쓸데없이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것이다.

“하지만 독낭은 잘 터트렸어. 일시적으로 추적을 따돌리는 데엔 효과적일 거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쓸데없이 나불대지 말고 달려.”

“넵!”

그렇게 네 사람이 은밀하게, 와중에 최대한 빠르게 수풀을 벗어났다.

“휴, 이제 좀 괜찮겠죠?”

가득상이 이마를 닦았다. 긴장해서 땀이 난 것이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를 이 정도 벌렸으면 안전할 거다. 이제부터 흑도 정보원들만 경계하면 될 거야. 모두 피풍의 뒤집어써.”

“예!”

일행이 피풍의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쿠구구궁.

패율의 눈이 빛났다.

“빠르군.”

천 명이 넘는 고수 중 상당수가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상아가 퍼트린 독에 벌써 몇 명이 당한 모양이었다.

“다들 티 내지 말고 걸어. 이백 장 뒤에 또 수풀이 나온다. 사람들 틈에 섞여.”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콰르르릉!

거센 폭음과 함께 전각 하나가 통째로 무너졌다.

“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도망쳐! 도망…… 으아악!”

네 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폭음이 터지고 비명이 난무했다.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

네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푸화아악!

“크아악!”

“엄마! 어, 엄마! 컥!”

“살려 주세요! 제발! 저는 애가…… 쿨럭.”

참혹한 학살극이었다.

악록산 인근에서 달려온 고수 중 삼십여 명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죽이고 있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살기 넘치는 눈을 번뜩이며 양민들을 베어 죽이는데, 가히 무차별 살인이 따로 없었다.

부르르르.

가득상의 주먹이 떨려 왔다.

제갈아연이 재빨리 그의 팔뚝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때, 무사 중 누군가가 외쳤다.

“범인과 내통한 자가 있을 것이다! 장사의 모든 사람을 죽여서라도 찾아내라!”

기가 막힌 이유였다.

물론 말단 무사들만 나서서 자폭 공격을 감행할 리는 없으니, 가까운 거리에 지휘자가 있을 거란 예측 자체는 타당하다.

사건의 고리는 잘 꿰뚫어 봤을지언정 그 방법이 지나치게 비뚤었다. 천하 어떤 조직도 고작 내통한 사람을 찾겠답시고 이런 미친 짓을 벌이진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묵룡부에서 가장 악독하다는 참백단(斬魄團)이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운용하지 않는 부대로, 그들 하나하나가 흑도에서 내로라하는 악귀들이었다.

“크아아악!”

“아빠! 아…….”

“으아악! 살려 주세요!”

끔찍한 비명, 무자비한 공포, 광기 어린 살육.

우두둑!

당상아가 쥐고 있던 비수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극도로 분노한 그녀의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녀나 제갈아연은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두 사람 역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모습을 드러냈다간 상황이 엄청나게 복잡해지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악!

가득상의 몸이 한 줄기 질풍이 되어 쏘아졌다.

“이 미친 개새끼들아!!”

콰아앙!

화려한 폭음과 함께 참백단 무사 두 명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묵직한 장력, 막강한 위력이었다. 전신의 내공을 끌어 올려 후려친 그의 장력은 천 근의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만들어 냈다.

화아아아악!

가득상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개놈 새끼들!”

무사 하나가 살기가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수상한 자다! 잡아……!”

순간 가득상의 다리가 채찍처럼 움직였다.

퍼어어억!

무사의 머리통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가득상답지 않은 독한 살수였다.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발 놈들! 다 이리 와! 이리 와, 이 미친놈들아! 나도 죽여 보라고!”

무사 중 하나가 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들었다.

삐이익! 퍽!

피리 소리가 중간에 끊겨 버렸다. 어느새 무사의 이마에 철전 하나가 박혀 있었다.

파라라락.

당상아가 가득상 옆에 서서 비수를 세웠다. 그녀 역시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사들이 사방에서 외쳤다.

“적이다!”

“이놈들이야!”

“아니! 또 다른 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개 대대만 불러!”

그때였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전부다. 귀찮게 하지 말고 한 번에 다 불러라.”

콰아앙!

산이라도 관통할 듯 무지막지한 섬광 한 줄기가 무사 다섯의 몸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냈다.

어느새 전권에 진입한 패율이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지.”

가득상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리지 마십시오!”

“잘했다.”

“……!”

“네가 나서 준 덕분에 간신히 체면을 차렸다. 사실 많이 고민하고 있었어.”

빠각!

선녀처럼 하늘을 날아온 제갈아연이 참백단원 하나의 목을 부러트려 버렸다.

그렇게 네 명의 실무조가 등을 맞대고 모여 사방을 노려보았다.

패율의 두 눈에 끔찍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임무고 나발이고, 사람부터 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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