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2)
‘음?’
화원대장 원동(猿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무슨 일이 생겼나?’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원동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화원대원 하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대장님?”
“아니다. 근래 생각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예?”
원동이 입맛을 다셨다.
“우리 주군이 요새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대, 대장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야!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너나 나나 입신양명하려고 주군 밑으로 들어온 거 아니냐?”
“……맞죠.”
“한데 정작 주군이라는 분의 평가가 영 안 좋잖아. 심지어는 젊디젊은 놈한테 서열에서 밀리기까지 하고, 이게 대체 뭐냐고.”
화원대원이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줄을 갈아탈 수도 없잖습니까.”
“내 말이.”
원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다, 이런 말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그냥 살던 대로 살아야지.”
“쩝.”
“다시 긴장 좀 빨자.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른다.”
“설마하니 그러려고요.”
“인마, 그러다가 진짜 일 터지면 어쩔 거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솔직히 좀 재수는 없지만 신임 정보부장만 해도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 주군 무공도 굉장하고요.”
“그건 그렇다만.”
“결정적으로, 정보부장은 부주님 대리로 온 사람이에요. 정보부장 죽이면 그때부터 모용가주는 천하제일을 논하는 최강자와 척을 지게 되는 건데, 우리 쪽에서 먼저 건드리면 모를까 모용가주가 먼저 설치기는 쉽지 않죠.”
“……뭐, 네 말이 맞긴 해.”
원동이 감탄한 눈으로 대원을 보았다.
“너,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헤헤, 그냥 잔머리 좀 굴리는 수준이죠. 듣기로 모용가주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하더라.”
“저도 이런 생각은 할 줄 아는데, 설마 모용가주씩이나 되는 인간이 실수할까 싶네요.”
“음, 근데 말이야.”
“예, 대장님.”
“모용가주 그 양반이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안 좋다거나…… 뭐 어쨌든, 진짜로 사고 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어떻게 되긴요. 그때는 진짜로…….”
그때였다.
콰앙!
한 줄기 요란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문짝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대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쟁 나는 거죠.”
원동이 휘파람을 불었다.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귀에 꽂혀 들기 무섭게 화원대 전원이 폭음이 난 곳으로 달려들었다.
원동이 외쳤다.
“전각을 에워싸…… 헉!”
번쩍!
한 줄기 벼락같은 섬광이 그의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털썩!
목이 달아난 원동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쾌검이었다. 비록 화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죽은 원각과 비슷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원동이 일검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번쩍! 번쩍!
시퍼런 검광(劍光)이 번쩍일 때마다 화원대 네다섯 명의 몸이 횡으로 갈라졌다.
“뭐, 뭐야?!”
“무슨 일이냐!”
“큰일 났다! 어서 다른 십이지신분들께 연락을…… 컥!”
벼락처럼 빠르고 강렬한 검광은 무려 반경 십여 장을 무(無)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검기공(劍氣功)이었다. 소리도 없이 번뜩이는 무적의 검술 아래 화원대가 삽시간에 초토화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야! 도망쳐!”
“…….”
“야, 인마! 헉!”
스르륵.
아무런 기척도 없이 죽음을 안겨 주는 사신(死神)의 강림.
마치 보이지 않는 연기처럼 사방을 오가며 화원대의 사혈에 단검을 찔러 넣는 무시무시한 암살자가 있었다.
홀로 남은 화원대원, 사원(四猿)이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콰아앙!
한 줄기 맹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사원의 눈에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정보부장님!”
쿵!
그대로 맨땅에 추락한 연호정이 피를 한 움큼 토했다.
사원이 재빨리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연호정이 이를 갈며 외쳤다.
“적습이다! 남은 십이지신을 몽땅 불러들여!”
“명을 받듭니다!”
사원이 몸을 돌려 외쳤다.
“적습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백여 장 너머까지 전달되었다.
그때, 연호정의 수도(手刀)가 휘둘러졌다.
서걱.
사원의 목이 날아갔다.
“자네.”
어느새 전멸한 화원대 앞에 나타난 모용군의 얼굴이 구겨진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짓인가?”
“캬악! 퉤!”
“왜 그놈이 소리치기 전에 죽이지 않았지?”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게 있겠소?”
“뭐?”
파파파파팡!
사방의 허공에서 네 명의 고수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려 삼백에 달하는 무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정보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연호정이 모용군을 노려보며 외쳤다.
“모용가주를 죽여라! 놈이 기습을 가했다!”
모용군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이놈!’
어차피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옳았다. 연호정을 죽이고, 나아가 실무조 전원을 불러들여 죽음을 위장해야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같은 흐름이라도 사소한 대처 하나에 따라 일이 쉬워질 수도, 어려워질 수도 있다.
‘왜 자꾸 쓸데없이 일을 부풀리는 거지?!’
그때, 환사가 연호정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으니 어서 놈을 죽이시오! 예상보다 훨씬 강하오!”
이미 화원대가 몰살당했고, 정보부장마저 피를 토한 와중이다. 사정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환사가 버럭 외쳤다.
“다들 모용군을 죽여라! 부장님은 내가 모실 것이다!”
화아아아악!
청호와 수룡, 광견이 일제히 살기를 피워 올렸다.
당장 검을 휘두르려던 모용군은 순간 움찔했다.
‘이놈들.’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무력은 분명 자신보다 아래였지만, 세 명의 기세가 동시에 제게로 쏟아지니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콰앙!
청호가 강한 진각과 함께 내공을 극한까지 발산했다.
우두둑! 우두두둑!
그의 몸 관절 곳곳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호가 입을 쩍 벌렸다.
크허어어어엉!!
소름이 쫙 돋을 정도로 우렁차고 강렬한 포효였다. 실제 대호(大虎)의 포효보다 두 배는 크고, 열 배는 위압감 넘치는 음공(音功)이었다.
화아아악!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룡과 광견 역시 평소보다 훨씬 더 막강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그 힘이 가히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의 그것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놈들 뭐야?!’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상대하기 귀찮은 정도의 놈들이었는데, 한순간 상대하기 까다로운 수준으로 변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변화, 이것이 바로 십이지신 중에도 선택된 이들이 가진 최고의 패였다.
연호정이 다시 한번 외쳤다.
“서쪽 강가에 모용세가의 병력이 은신해 있다! 남은 병력은 그쪽을 처리해!”
모용군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너!”
연호정은 모용군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뭣들 하고 있는 것이야! 당장 공격해!”
“존명!”
청호와 수룡, 광견이 일제히 모용군에게로 돌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네 사람 휘하의 부대는 연호정의 명대로 서쪽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고수가 얽히고설켰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끄으응.”
연호정이 이를 악물고 옆구리를 잡았다.
환사가 다급히 물었다.
“정보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선배, 잠시 날 데리고 전권에서 이탈해 주시오. 침투경에 당했소.”
“헉!”
침투경에 제대로 당하면 내장이 상하는 건 예사요, 심하면 일격에 죽을 수도 있다.
환사는 재빨리 연호정을 업었다. 비록 신임이지만 그는 연호정의 뛰어남을 직접 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번쩍! 콰아아앙!
환사와 연호정의 몸이 붕 떠올랐다.
‘이런!’
뒤를 돌아보니 땅거죽이 푹 꺼져 있었다. 위치를 보니 모용군이 날린 검격에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았다.
‘개 같은 자식.’
서둘러 자세를 잡은 환사와는 달리 연호정은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쿵!
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삼 장 높이에서 아무런 대비 없이 떨어지면 뼈가 상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정보부장은 내상까지 입은 상황이었다.
“정보부장님!”
재빨리 연호정에게 다가간 환사.
그때였다.
“쿨럭! 네놈, 이리 오너라!”
연호정이 재차 피를 토해 내며 서쪽으로 향하던 고수 하나를 불러들였다.
환사가 서둘러 물었다.
“정보부장님! 괜찮으십니까?”
연호정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적어도 한 명은 살아서 이 상황을 부에 전해야 할 것이다!”
“예!”
“하지만 나나 너는 아니지.”
“예?”
순간 연호정의 손이 뱀처럼 휘어졌다.
푹!
‘헉!’
환사가 입을 쩍 벌렸다.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 속, 연호정의 인자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간 고마웠소.”
환사는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정보부장님! 안……!’
스르륵.
환사가 쓰러졌다.
“환사 선배를 업고 부로 돌아가거라! 어서!”
“예, 예!”
그렇게 환사를 등에 업은 무사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그 즉시 연호정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아.’
모용군과 십이지신 세 사람의 생사결.
그리고 저 멀리 서쪽으로 향하는 삼백의 고수들.
‘모용군 휘하에서 활동하던 그놈은?’
연호정은 무연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현무기가 일며 사방의 습도를 올렸다.
‘……!’
운이 상당히 좋았다. 물결치듯 움직이는 존재 하나가 현무기에 포착되었다.
연호정의 우측 이 장 거리에서 움직이던 무연은 단숨에 서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모용세가의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청룡기가 솟구쳤다.
화아아악.
간장(肝臟) 능력이 활성화되고, 억지로 입었던 내상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이제, 내게로 향하는 눈은 없다.’
파아아악!
한 줄기 불꽃이 번뜩인다 싶은 순간, 연호정의 몸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단숨에 전권을 벗어나는 움직임이었다. 폭발하는 주작기가 그의 심장을 미친 듯이 달구고 있었다.
‘모용군.’
그 누구보다도 빠른 움직임으로 허공을 돌파하는 연호정.
‘임무는 성공했다. 제대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말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당신도 당신이지만, 묵룡부의 기세 역시 한 차례 꺾어 놓을 필요가 있거든.’
그렇게 연호정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실무조가 움직이고 있을 장사의 한 거리였다.
콰아아앙!
묵직한 일검에 청호와 수룡, 광견 모두가 뒤로 튕겨 나갔다.
‘이놈.’
모용군은 좀처럼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연호정이 뭔가 수작을 부린 건 분명했다. 당장 그것을 알아내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
분노가 극에 이르렀으나 그렇다고 연호정에게 칼질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이번 임무의 지휘권자, 실무조 모두를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한데 대체 왜?!’
그저 가만히만 있으면 안전히 귀맹할 수 있는데, 대체 왜 이런 난장을 피운 거지?!
그때, 청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헉!”
퍽!
모용군의 검격에 재차 뒤로 튕겨 나간 광견이 피를 토하며 물었다.
“제기랄! 왜 그래?!”
청호의 두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모용군, 이 개자식!”
그가 이를 갈며 외쳤다.
“급보다! 본부가 모용세가 측 병력에 급습을 당했다!”
“……!!”
모용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