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39화 (239/963)

239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1)

“준비는 되셨소?”

“그렇습니다.”

“…….”

“어찌 그리 표정이 안 좋으십니까?”

“아니오.”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는 동정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가족들이 인질로 잡혔고 모두 만성 독약에 중독된 상태였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이미 지은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희는 모용군의 명을 받고 움직였지만, 상부 몰래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

“모용군 때문이 아니라 저희 때문에 패가망신한 집안도 많습니다.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변명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지요.”

“그만하시오.”

“그러니 그리 슬픈 표정을 지으실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저희에게, 이러한 죽음은 오히려 과분한 것이지요.”

“…….”

“점창파의 장로분께서 저희에게 고개를 숙여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한 죽음입니다.”

“그대들의 이름, 결코 잊지 않겠소.”

“영광입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그대들의 가족이오. 실무조장이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만,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 싶어 걱정이오.”

“하하, 정작 가족인 저희보다도 선배님께서 더 마음을 써 주시는군요. 이런 걸 보면, 역시나 저희는 멀었습니다.”

“내 마음은 결코 그대들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소.”

“아니, 저희는 진심으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것이 우려되었다면 애초에 연 공자와 거래하지도 않았겠지요.”

“후우.”

“비록 개처럼 사육당했지만, 그래서 아는 것도 있습니다. 모용군은 체면을 중시하는 성격이지요. 가끔 선을 넘기도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아닙니다.”

“그대들이 그리 믿고 있다면 나 역시 걱정은 미뤄 두겠소.”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패율 선배님.”

“말씀하시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패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아아앙!

뽑아 든 검신에서 강력한 진기가 피어올랐다.

“시작합시다.”

잠시 후.

콰아아앙!

일행의 거처가 폭발하며 사방으로 불꽃이 일었다.

* * *

“…….”

기묘한 침묵이 탁자 주변을 에워쌌다.

연호정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며, 모용군은 생각했다.

‘무슨 속셈이냐.’

처음 연호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뽑혀 나오는 줄 알았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었나 싶었던 것이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아직도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왜 네 녀석이 나타난 거지? 별다른 연락도 없이?’

정체를 들켰다거나 묵룡부에 포섭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이리 말도 없이 나타날 놈이 아니었다. 아무리 급해도 서신 한 장 못 보낼 만큼 능력이 없는 놈은 아니잖은가.

‘심지어 후개 역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 하였다.’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네놈들, 설마 나를?’

묵룡부에 제물로 바치기 위함인가?

‘……대체 왜?’

가만히 연호정의 눈을 살피던 모용군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놈들은 날 묵룡부에 팔아넘길 생각이 추호도 없다.’

정말 팔아넘길 셈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전혀 없다. 아닌 말로, 묵룡부의 최고수들과 휘하 부대를 보내 이곳 지역 전체를 통제하고 급습하면 끝나는 문제다. 이렇게 복잡한 짓을 벌일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놈.’

그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신 모양이오.”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외다. 이 기회에 위대한 고수 투왕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해하오.”

“이것도 이해할 것이오. 지금 내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충분히 이해하오만,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는 문제 아니겠소이까.”

“틀린 말은 아니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대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냐는 건데.”

“난 부주 대리로 온 것이오. 내 비록 그분과 같은 고수는 아니지만, 나의 판단이 곧 부주님의 판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이리 뵈니, 정말 대단한 인재시오.”

“그렇소?”

“인물도 훤칠하고 무공 또한 대단해 보이는군. 게다가 그 연배에 정보부장이라는 직책에 앉은 것도 모자라 부주 대리인으로 올 정도면 실세 중의 실세란 말인데.”

“…….”

“본맹에도 귀하와 비슷한 젊은이가 하나 있소이다. 그 친구 역시 젊은 연배에 뛰어난 무공과 기가 막힌 책략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소문 자자한 멸사군장인 모양이오.”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대놓고 말한다?’

상대를 자극하려고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대응은 무척이나 대범했다.

‘단순히 내 뒤통수를 치기 위함은 아니라는 뜻인데.’

모용군이 화원을 흘끗 보았다.

꽤 냉정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원의 얼굴에 드리워진 묘한 불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흐음.’

모용군이 활짝 웃었다.

“술 한잔하시겠소?”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소이다.”

“허허, 슬슬 풍류에 눈을 뜰 나이가 된 것 같소이다만?”

“가주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혹시 모르잖소. 술에 독이라도 타셨을지.”

순간 화원이 움찔했다.

모용군은 줄곧 연호정을 보고 있었음에도 화원의 반응을 귀신처럼 알아챘다.

‘분란이 있었군.’

모용군은 짐짓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 사람을 너무 나쁘게 보시는 것 같소. 요새는 시정잡배도 그런 짓은 안 한다고 하더이다.”

“하하, 제 언사가 다소 거칠었군요. 아쉽게도 저는 부주님처럼 배포가 좋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러지 않으실 분이라는 건 알지만, 서로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허허, 맞는 말이오.”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보아하니 가주께서도 준비 좀 하신 것 같소. 독은 아니고, 화약이라도 깔아 두신 게요?”

“…….”

“아까 이쪽 동네를 내려다보니, 장소 한번 기가 막힌 곳으로 잡았습디다. 퇴로는 강과 산으로 이어지는 서쪽…… 세가의 무사들도 배치하셨소이까?”

순간 모용군은 당황했다.

‘이놈이?’

묵룡부의 사람도 함께 있는데 그걸 대놓고 말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물론 그걸 안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모용군이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허허, 이거 한 방 맞았소이다.”

“말했듯, 피차 조심해서 나쁠 게 없잖습니까?”

“맞는 말이오.”

모용군이 가만히 다리를 꼬았다.

“좀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귀하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소. 당연히 이곳 일대에 고수를 깔아 두셨겠지?”

연호정이 넉살 좋게 받아쳤다.

“가주님의 경지가 무척이나 뛰어나다고 들었소.”

“역시.”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대화가 영 겉돌기만 한다. 누군가가 물꼬를 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모용군의 눈이 대번에 살벌해졌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리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말투가 바뀌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런 것 같소?”

“모르겠군.”

이제 이런 피곤한 연극 따위 다 집어치우고 싶었던 것일까.

모용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정말 모르겠어.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해 봤자 서로에게 좋은 게 없을 텐데. 그걸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모르지 않지.”

연호정의 표정도 점차 싸늘해졌다.

“그런데 내 쪽에서도 묻고 싶군. 설마하니, 내가 그 일을 그냥 넘길 줄 알았소?”

이제 대놓고 얘기하겠다는 뜻이었다. 화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일세.”

모용군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아닌 말로 자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들이었어. 화가 날 수야 있겠지만, 자네에게 중요한 것은 내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니라 임무를 달성하는 것이었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설마 아니라고 생각했던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사리사욕을 위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소이다.”

“그래서 자네에게 피해가 간 게 있는가?”

“신뢰가 가지 않는 자와는 손을 잡을 수 없지.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왜 이번 임무에 투입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길 바라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작게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함이지만, 크게 보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 아니오? 한데 당신은 이번 작전의 지휘권자로 예까지 왔음에도 사욕을 채우고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그 뒤처리를 실무조에 맡겨 버렸소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자, 대답해 보시오. 서로의 능력을 믿는 걸 떠나, 저잣거리의 삼류 건달도 안 할 법한 치졸한 짓거리로 정신 사납게 하는 인간을 믿을 수 있겠소?”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이 개고생하는 와중에 내가 댁에게 언질 한마디 없이 그따위 짓거리를 벌이면, 당신은 어떻게 나오겠소?”

모용군은 입을 다물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요. 당신도 알겠지만, 내가 속이 제법 좁은 편이라오. 한번 당한 건 절대로 잊지 않지.”

“아네. 나나 자네나 속 좁은 인간들이라는 거. 하나 그것이 큰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는 이유는 때를 알기 때문이지.”

번쩍! 번쩍!

모용군의 두 눈에서 벼락 같은 진기가 튀어 올랐다.

진심으로 분노하는 모용군, 그간 잘 다스리고 있던 상고의 절학 뇌정공의 힘이 서서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말해 보게. 자네, 진심인가? 진정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런 영양가 없는 짓을 저지른 겐가?”

“그렇다면 어쩔 거요?”

“실망하겠지. 진심으로.”

모용군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네,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화를 풀고 싶었다면 이번 임무가 끝난 이후에 해도 충분해.”

“절대 그래선 안 되지.”

“뭐라?”

“이번 임무가 끝나면 내가 한 방 날릴 걸 알고 대책을 세워 둘 게 뻔한데, 왜 굳이 당신에게 준비 시간을 줘야 하오?”

모용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네는 이번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길 원하나?”

“바로 그거요. 이번 임무의 완수가 최우선일 테니 내게 헛수작을 부리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소?”

“……!”

“그것도 꽤 웃긴 확신이오. 임무도 성공하고, 당신 뒤통수도 갈겨 버리면 되는 것을 굳이 양자택일할 필요가 있을까?”

모용군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공기. 그 속에서 화원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뭐야? 지금 이게 무슨 대화지?’

설마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단 말인가?

‘대체 뭔……?’

당황한 그녀를 힐끔 쳐다본 모용군이 씹어뱉듯 말했다.

“저 맹랑하기 짝이 없는 계집을 들인 것은, 어쨌든 이 공간에서 사고가 터져도 상관없다는 뜻일 테지?”

“그렇소.”

“자네, 돌아가서 보세. 내 감히 장담하건대 이번만큼은 문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당신도 기대하는 게 좋을 거요. 판은 다 깔아 두었으니까.”

“뭐?”

그때였다.

퍼어어억!

화원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원숭이.”

어느새 그녀의 명치에 창을 박은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말했지? 은혜 갚을 필요 없다고.”

“커컥!”

“저승에서도 술 갖고 장난치려거든 상대의 수준부터 똑바로 알아보고 쳐라.”

화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개, 개자식……!”

연호정이 창을 그대로 올려 쳤다.

푸화아악!

화원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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