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갈등 (8)
“가주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음, 고생하셨네.”
모용군이 술을 홀짝였다.
향 좋은 독주가 식도부터 위장까지 불을 지르는 기분이었다. 거의 원액이나 다름없는 독주는 그조차 몇 번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잔을 내려다보는 모용군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이런 식으로 투왕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거늘.’
막상 그를 만나겠다 한 건 자신이었지만, 정말 만난다고 하니 기분이 무척 묘했다.
‘투왕이라.’
성천십삼좌.
강호 무림에서 최고로 불리는, 다른 고수와는 격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는 그 이름.
성천좌 중 신선제왕의 십 인은 삼군보다 연배도 더 높고, 무공도 한 수 위라고 알려져 있다.
투왕은 그런 신선제왕 중에서도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고수였다. 물론 젊다고 해도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지만.
‘무도(武道) 본연의 깨달음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주먹 한 쌍으로 본인의 강함을 세상에 증명한 흑도의 호걸.’
신선제왕 중 투왕 양천이 유독 튀어 보이는 까닭은 그의 투박하기 짝이 없는 무공과 승부사 기질 때문이었다.
신선제왕은 대체로 천외천(天外天)의 신선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건 삼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투왕은 아니었다. 그는 현실에 있을 법한 성격과 무공으로 중원 천하를 뒤집어 놓은 일세의 투사였다.
‘그런 전설적인 고수와 독대를 한다…….’
잠시 심호흡을 하던 모용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 내가 긴장하고 있는 것인가?’
천하의 모용가주가 타인과의 만남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그것은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모용군은 그 낯선 기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지. 상대가 상대니까.’
설령 그만한 인사가 아니더라도 긴장해야 마땅하다. 이건 사적인 만남이 아닌 공적인 만남이니까.
그때, 무연이 물었다.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일이 터지면 곧장 이곳 일대를 날려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양천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이 성미대로 안 풀린다고 손을 쓸 리는 없을 걸세.”
“하지만 그는 흑도인입니다.”
“흑도인인 동시에 투왕이지.”
“외람된 질문이지만…… 아직 그자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으신데 어찌 그리 자신하시는지요?”
“자신이라기보다는 믿는 거지.”
긴장도 긴장이지만, 그만큼의 설렘 역시 느끼는 모양이었다. 모용군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이 정도 위치가 되면 굳이 만나 보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게 있네. 양천도 그와 같네. 그는 저 악랄하다는 혈옥마군(血玉魔君)이나 광혼귀군(狂魂鬼君)과는 질이 다른 사람이야.”
비록 흑도지만 그 많은 문파를 규합하여 거대한 연맹을 만들었다.
물론 조력자가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한들 그가 그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 단체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나름의 품격을 갖추어야만 한다. 양천은 묵룡부의 주인이 됐음에도 지금껏 본인을 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평가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같은 성천십삼좌로 꼽히는 삼군, 그중 최악이라는 혈옥마군 곽준(郭俊)이나 광혼귀군 곡경(曲硬)과는 진정 차원이 다른 인물이라 하겠다.
“다만, 세상일이라는 건 어떻게 돌아갈지 장담할 수 없는 것. 일 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해 두어야 함이 옳네.”
지금 이 장소를 선택한 것은 모용군이었다. 그리고 이 건물 곳곳에는 무수히 많은 화약과 암기가 숨겨져 있었다.
물론 이 정도 장치로 양천을 죽일 수는 없다. 당장 모용군 자신도 중상은 입을지언정 어떻게든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시간을 벌어 주는 정도로는 충분하다. 실제로 쓸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쓰게 된다면 반 각 이내에 이곳 현(縣)을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 놓았다.
“아, 그리고.”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호정에게서는 따로 연락 온 게 없던가?”
“그렇습니다.”
묘하군.
‘뭐라 한마디 언질을 줄 만도 할 텐데.’
천하의 양천과 만나는 자리다. 그간 연호정의 일 처리를 생각하면, 굳이 정보 탈취 건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더 연락을 줄 법했다.
‘그만큼 바쁘다는 뜻이겠지.’
잠시 의아했지만, 이내 쉽게 넘겨 버렸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후개 가득상에게서 따로 연락이 왔으니, 별일이 터지진 않았을 것이다.
“가주님.”
“음?”
“방금 상대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반 시진 거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모용군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과연 양천은 어인 일로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 * *
‘저기로군.’
봉우리 위에서 현(縣)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빛은 그야말로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모용군답군.’
규모가 꽤 큰 현임에도 모용군이 만나자고 한 건물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그였다.
‘퇴로 확보에 용이하다. 골목이 복잡하진 않지만, 곧장 강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야. 아마 퇴로 곳곳에 고수들을 깔아 놓았겠지.’
아마도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퇴로 곳곳에 매복해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무사를 배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천의 무공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모용군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닐 터, 다만 시간 벌이 정도는 되겠지.’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꽤 당황하겠군.’
그는 모용군에게 양천의 상황을 알리지 않았다. 당연히 양천 대신에 자신이 갈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모용군을 당황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는 있겠지만, 고작 그따위 이유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대처해 주리라 믿는다, 모용군.’
그때, 청호가 다가왔다.
“정보부장님.”
“말씀하시오.”
호남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본 십이지신이 바로 청호였다. 하지만 연호정이나 청호나, 그때의 갈등을 임무에까지 끌고 오는 성격은 아니었다.
“슬슬 내려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굳이 이곳에 서서 기다리는 이유가 있냐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곧 연락이 올 테니까.”
“예?”
“그런 게 있소.”
청호는 의아했지만,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십이지신이라고 묵룡부의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 수하 외에 관리하는 조직이 없으니, 묵룡부 내부 사정에 그리 밝지 못했다.
수룡이 말했다.
“정보부장님께서 모용가주와 접선하는 즉시 개인 수하들을 백 장 밖에 배치하도록 하지. 어떻게 생각하나, 청호?”
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겠군.”
광견이 머리를 긁적였다.
“별일이야 있겠어? 모용가주가 미치지 않은 이상 우리를 건드리려 들진 않겠지.”
“혹시 모르는 일이야. 모용가주는 부주님께서 오시는 줄 알고 있을 테니까.”
“으응?”
광견이 놀란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모용가주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으신 겁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보낸 분이 부주님이셨소. 만일 부주님께서 모종의 이유로 대리인을 보낸다고 하면, 이 자리 자체가 무산되었을 확률이 높소.”
“으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광견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면 백 장이 아니라 오십 장 안쪽으로 줄이는 건 어떻습니까? 그럴 일은 없다고 보지만, 만에 하나라도 모용가주가 일을 내면…….”
사전에 언질도 주지 않고 대리인을 보낸다? 상대측으로선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네 분 선배님의 수하들은 백 장 밖, 함께 들어갈 한 분의 부대만 삼십 장 안쪽으로 배치하는 게 좋겠소.”
십이지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의 구조나 길목을 봤을 때, 그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함께 들어갈 사람으론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연호정이 웃으며 화원을 보았다.
복잡한 눈으로 그를 보던 화원은 내심 깜짝 놀랐다.
“화원 선배.”
“……네.”
“선배가 나랑 같이 들어갑시다.”
화원은 당황했다.
“제, 제가요?”
“문제라도 있소?”
“……없습니다.”
광견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굳이 원숭이, 아니 화원을 데려가시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차라리 저나 환사를 데리고 가는 것이 더…….”
“화원 선배의 용모는 꽤 아름다운 편이오.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안심시키는 데에는 다른 분보다 화원 선배가 더 나을 거라 생각하오.”
수룡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긴, 정보부장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사내놈 치고 여자 안 좋아하는 놈 없지요.”
모두가 저마다 피식피식 웃어 댔다.
놀랍게도 화원은 평소와 달리 잠잠했다. 그녀 성격상 이런 대화가 나오면 발끈해서 욕설을 퍼부을 법도 한데,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기 바빴다.
그런 화원을 힐끔 본 광견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왜? 부담되냐? 부담되면 말해, 내가 대신 들어갈 테니까. 나도 꽤 곱상한 편이잖아.”
환사가 고개를 저었다.
“사내놈이 곱상해 봤자 별 의미 없다.”
“거 뭐, 교태 좀 부리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니야? 혹시 아나? 모용가주 놈이 남색가일지.”
“광견.”
“커허험!”
광견의 이죽거림에도 화원은 화를 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화를 낼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뭐지?’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왜 아직도 멀쩡한 거지?’
어제 그녀가 연호정에게 건넨 술에는 반시독(半屍毒)이라는 극독이 들어 있었다.
반시독은 즉효성이 아니라 지연성 맹독이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서서히 피로하게 만드는 정도지만, 하루가 지나면 눈에 띄게 체력을 저하시키고, 이틀이 지나면 내공까지 분해하여 가사 상태에 빠트리는 기독(奇毒)이었다.
성천십삼좌급의 절대고수라면 모를까, 설령 소림 방장이라 해도 해독약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는 극독이 바로 반시독이었다.
한데 연호정은 생각보다 너무 멀쩡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활기까지 띠는데, 피곤해 보이기는커녕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설마 알아챈 건가?’
그럴 리가 없다. 화원이 술에 탄 반시독은 그녀가 수 차례 개량해서 만든 물건으로, 무색무취(無色無臭)는 물론 내공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설령 알아챘다 한들 해독약이 없으면 저렇게 멀쩡할 수가 없을 텐데?’
그때였다.
푸드드드득!
하늘 저편에서 시커먼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까마귀가 아니라 비둘기였다. 새까만 깃털에서 묘한 광택이 나는 것으로 보아 보통 전서구가 아닌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전서구를 받아 발목에 묶인 서신을 펼쳤다.
그의 눈이 빛났다.
‘끝났군.’
실무조와 ‘그들’ 모두가 위치를 잡았다.
‘지금쯤 시작했겠어.’
일행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묵룡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서구였던 것이다.
화르르륵.
연호정이 서신을 불태우자 전서구가 무서운 속도로 다시 날아올랐다.
“갑시다.”
“예!”
파아아악!
일행은 단숨에 산에서 내려와 현으로 들어섰다.
파사사삭.
어느 정도 깊숙이 들어오자 화원을 제외한 십이지신 전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로 티격태격해도 할 일은 확실하게 하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각 후.
마침내 약속 장소에 도착한 연호정은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
성큼 안으로 들어선 연호정의 눈에 모용군이 보였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용군, 그러나 그의 눈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덜컹!
문이 닫혔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인사드리오. 묵룡부의 정보부장 정이라 하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포권했다.
“모용가의 군이외다.”
“드높은 협명, 많이 들었소이다.”
“그나저나…….”
모용군의 미소가 점점 기묘하게 뒤틀렸다. 안목 있는 고수라면 단번에 이상함을 느낄 정도였다.
다행히 화원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정보부장이라…… 주인공은 어디로 가시고?”
“내부 사정으로 인해 정보부장인 내가 대리인 자격으로 왔소.”
연호정이 싸늘하게 웃었다.
“양해해 주시겠소?”
모용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자리에 앉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