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갈등 (5)
쌕…… 쌕…….
정신을 잃은 양천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호흡도 일정했고, 안색도 젊은 사람처럼 붉었다. 드러난 팔 근육을 보면 몸에도 큰 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도 정신을 잃었다.
“의원의 말로는 현재 부주님의 상태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고 하오. 다만 부주님의 내공이 조금씩 상단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데, 그것이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하오.”
“평소 음주는 많이 하시오?”
“많이 하시오. 그러나 고작 술 따위가 부주님의 몸에 타격을 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소.”
당연한 분석이었다.
절정고수만 되어도 내공으로 체내 주정(酒精)을 거의 바로 배출할 수 있다. 그것은 내공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굳이 절정고수가 아니라도 가능한 기예였다.
게다가 내기(內氣)는 끊임없이 체내를 순환한다. 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보다 수 배에서 수십 배의 진기가 전신을 휘도니,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고수의 몸을 상케 하기는 힘들다.
하물며 당대 무림의 초월자라는 투왕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리고 하나 더.”
“음?”
“부주님의 가슴에 황금빛 손자국이 있소.”
연호정의 동공에서 벼락이 쳤다.
“황금빛 손자국?”
“그렇소.”
“……설마하니 암습을 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요?”
“그렇지 않소.”
백서는 유독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상흔은, 과거 부주님께서 어떤 고수와 겨루면서 입은 상처라고 들었소.”
“…….”
“십이지신 중에서도 나밖에 듣지 못한 사항이오.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소만.”
“그 자국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면, 평소 내상으로 고생을 하셨다는 말이오?”
“그것은 부주님이 아니고서야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다만 의원에게선 별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 때문일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소.”
연호정이 백서를 바라보았다.
백서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왜 나를 부르셨소?”
“…….”
“내 비록 부주님의 신임을 받고 있기는 하나, 아직 심복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소. 부주님을 더 오래 모신 건 십이지신 선배님들 아니오?”
“부주님께선 그대를 누구보다 믿고 계시오.”
“…….”
“적어도 묵룡부 내에서, 당신만큼이나 부주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셋을 넘기지 못하오. 부주님께서는 당신께서 거두신 무수히 많은 제자조차도 믿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걸 감안하면, 정보부장을 향한 신뢰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라 봐도 좋을 정도요.”
제자들.
과거 멸사군이 첫 전투를 치를 때 부딪쳤던 광인이 떠올랐다.
“묵룡부 내의 대소사를 처리할 권한은 오직 부주님께만 있소. 적어도 아직은 그렇지.”
“…….”
“만일 부주님이셨다면, 누구보다도 그대를 먼저 부르셨을 것이오. 그래서 나 또한 다른 수뇌부들을 막고 당신을 들인 것이오.”
확실히 백서도 보통은 아니었다.
한 조직의 패주 노릇을 할 만한 그릇은 아니다. 다만, 수장을 보좌하는 데에 있어 이만큼 안목 좋은 사람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시오. 부주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시나, 나는 아니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오.”
백서 역시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부주님을 뵈었으니, 이제 의원과 얘기해 보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정보부장 권한으로 처리하도록 하고, 다른 의원들도 수배해 보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리다. 그 전에…….”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부주님을 한번 진맥해 봐도 되겠소?”
백서의 눈이 서늘해졌다.
“의술을 아시오?”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 아는 수준으로는 부주님의 존체에 손을 대도록 허락할 수 없소.”
“또 모르잖소? 얼마 안 되는 실력으로 의원이 모르는 걸 잡아챌 수 있을지도.”
“…….”
“불안한 건 이해하지만, 나 역시 큰 꿈을 품고 부주님을 찾아왔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부주님께서는 지금 돌아가셔선 안 된단 말이오.”
참으로 거침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발언이 오히려 백서의 신뢰를 샀다. 충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말이 연호정과 놀랍도록 어울렸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백서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진맥만 허용하겠소.”
“고맙소.”
연호정은 조심스레 양천의 소매를 걷었다.
양천의 손에는 굳은살이 한가득 박여 있었다. 극치에 이른 내공으로 몇 겹이나 벗겨 냈을 텐데도 여전히 굳은살이 잡혀 있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연호정이 양천의 맥문을 쥐었다.
‘…….’
역시 굉장하군.
‘혈맥과 혈도의 탄력이 놀라운 수준이야. 과거의 나보다는 약하지만.’
연호정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일었다.
‘과연 투왕.’
성천십삼좌를 무림 최강자이자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괴수라고 부르는 무수히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내공이었다.
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내공의 질 자체가 여느 고수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초절정고수의 내공 흐름이 개울물과 같다면, 성천십삼좌의 내공 흐름은 범람하기 직전의 강물과도 같다.
넘치도록 막강한 힘. 같은 양의 내공을 발산해도 속도와 파괴력이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 정도로 막강한 흐름에 훼방을 놓을 정도면…….’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허공섭물을 구사하던 양천의 내공 흐름이 점차 파탄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지극히 미세하면서도 큰 허점이었다. 처음에는 당사자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의아했지만, 달리 생각하면 제삼자가 더 쉬이 알아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길을 걷는 사람은 길가의 돌멩이를 중하게 여기지 않는 법이니까.
‘음.’
양천의 몸 곳곳을 살피던 연호정은 내심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흐름 자체에는 이상이 없는 듯한데.’
그는 양천의 흉부를 내려다보았다.
의복으로 가려진 흉부. 백서의 말로는 그곳에 황금빛 손자국이 찍혀 있다고 했다.
‘흉부의 피하 신경을 확인해 볼까.’
우우우웅.
녹청빛 청룡기가 양천의 맥문을 통해 들어갔다. 신비로운 동천의 진기는 양천의 팔목을 타고 올라가며 은은하게 발광했다.
이내 진기가 상박, 어깨를 지나 단숨에 흉부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파직!
한 줄기 뇌광(雷光)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파악!
연호정이 서둘러 맥문에서 손을 떼었다.
백서가 놀란 듯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
“정보부장.”
“……?”
“무슨 일이냔 말이오? 뭔가 알아낸 것이오?”
연호정은 말이 없었다. 그저 한없이 깊고 차가운 눈으로 양천의 가슴팍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백서는 답답함에 가슴을 치고 싶었다.
“이보시오!”
“……원인을.”
“…….”
“원인을 알아내진 못했소. 다만, 부주님의 흉부에 새겨진 상처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소.”
“……?!”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렵소. 의원을 불러야겠소.”
연호정은 그 말을 끝으로 묵룡전을 나섰다. 왠지 모르게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백서는 황급히 그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연호정은 묵룡전을 빠져나간 뒤였다.
‘역시 네놈이었군.’
묵룡전을 나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연호정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사음교주!’
음황신장(陰荒神掌).
사음교주의 독문무공 중 하나로, 음황지(陰荒指)와 함께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절기였다.
음황의 무공은 사음교주가 지닌 최강의 무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무공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음황의 무공에 격중당하면 즉시 경력을 배출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심맥이 파열되기 때문이었다.
심맥 파열. 이는 곧 즉사다. 심맥이 갈가리 찢어지고도 살아남은 자는 지금껏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딱 한 명이 있긴 했다.
당관.
사음교주의 음황지에 가슴이 뚫리는 치명상을 입고도 끝까지 버틴 당관은 기어이 자신의 명치에 우모침을 박아 넣었다.
당관은 독(毒)에 한해서는 중원 제일의 강자이니, 어떤 식으로든 심맥 파열을 뒤로 늦췄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당관 역시 결국에는 심맥이 파열되어 죽었다고 봐야 할 테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 화를 낸다고 사음교주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건, 왜 양천은 곧바로 죽지 않았는가다.’
역사가 바뀐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번 대의 역사에서, 양천은 사음교주와 꽤 독하게 싸운 모양이었다.
‘황금빛 수인(手印). 그것은 음황신장의 대표적인 흔적이다. 하지만 죽으면 그 수인마저도 사라지는 게 정상이야.’
척.
어느 외진 통로에서 걸음을 멈춘 연호정은 그늘진 곳을 찾아 벽에 기대어 섰다.
팔짱을 낀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 외에, 양천의 몸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허공섭물의 내공 흐름은 이상했지만 실제로 단전이나 혈도, 혈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어.’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음황신장이다. 음황신장의 수인이 양천을 점차 좀먹고 있었던 거야.’
사실 여부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다. 연호정은 양천의 이상이 음황신장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이유인즉, 음황신장의 기본 원리가 암장(暗掌)이기 때문이다.
암장이란 곧 침투경(浸透勁)을 뜻한다. 그리고 침투경은 내상을 일으키는 데 특화되어 있지만, 반드시 상대를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시전자의 역량에 따라 단숨에 사람을 죽일 수도, 끊임없이 내상을 유발토록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연호정이 아는 사음교주는, 그 정도 경력 조절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결국 그런 거다. 흑양의 존재도 그렇고, 애초에 사음교주는 양천과 손을 잡은 게 아니었어. 양천을 속여 자신의 주구로 만든 후, 중원 진출의 발판이 되도록 철저하게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실, 그거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확신하지 못했을 뿐.
그러나 양천이 이렇게 빨리 쓰러진 건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가? 사음교주의 실력이라면 실수할 리도 없는데?
‘설마, 벌써 중원을 넘보려고 하는 거냐?’
정말 그렇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연호정이 일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미있구만.”
한 번에 너무 많은 사건이 터져서 그런지 그조차도 잠시지간 머릿속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음교는 슬슬 중원에 침투하려 한다. 모용군은 미쳐 날뛰고 있으며, 나와 실무조는 묵룡부에서 안전하게 탈출해야 한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양천 당신, 내게 정말 고마워해야 할 거야.”
그날 밤.
“선배.”
“의원은 수배해 놓았소?”
“그렇소. 그리고 상의할 문제가 있어서 다시 찾아왔소.”
“상의?”
연호정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부주님께서는 모용가주와 만나기로 하셨소. 그리고 모용가주로부터 사흘 내로 연락이 올 예정이외다.”
백서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부주님께서 쓰러지셨잖소.”
“그러나 이 만남을 없는 것으로 할 수도 없소. 이유인즉, 부주님께서 먼저 만남을 제안하셨기 때문이오.”
“……정보부장의 말은?”
“그렇소.”
연호정의 눈이 요악하게 번뜩였다.
“수뇌부들과 병력을 붙여 주시오. 내가 부주님 대리로 모용가주를 만나러 가겠소.”
인생 원래 한 방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