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제왕의 귀환 (4)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술은 할 줄 아나?”
“그렇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상당히 둔탁해진 말투다. 지난 며칠간 고생이 많았던 탓이리라.
연호정은 직접 나서서 술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그가 대뜸 강량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한잔해.”
“그 전에.”
강량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시오.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지, 나를 왜 다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나를 구해 준 이유는 또 무엇인지 전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좀 어설프긴 하지만, 남이 주는 잔을 함부로 받아먹지 않을 정도의 조심성은 있는 모양이군.”
이내 자신의 잔도 채운 연호정이 시원하게 잔을 비워 냈다.
“보아하니, 우리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은 하는 것 같군.”
강량이 눈을 빛냈다.
“당신들, 백도 무림 측이오?”
그 말을 들으며, 연호정은 문득 알 수 없는 아련함을 느꼈다.
‘백도 무림이라.’
흑도의 제왕으로 날뛰던 시절, 자신을 두고 사파의 희망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던 사람이 바로 강량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자신더러 백도 무림 측 사람이냐고 묻고 있다.
기분이 묘했다.
“그렇다.”
“역시…….”
강량의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래서 날 구해 준 거요? 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강량의 말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머리부터 비우지 그래?”
“무슨 뜻이오?”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똑같군. 너는 너무 네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아. 답도 아닌 걸 확신하고 밀어붙이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야.”
“…….”
“의심을 할 거면 의심에서 끝내라. 말은 의심이라 하면서 정작 확신할 수 없는 걸 확신하고 있다면, 애초에 대화라는 게 안 되는 법이야.”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진지하게 말했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녹록하지 않아. 너는 물론 나 역시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천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판국 아니더냐.”
“…….”
“사태를 냉정하게 직시해. 네가 말했듯, 나는 네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이다.”
“……알고 있소.”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시작을 해야겠군.”
“……?”
“목숨을 구해 준 자, 이는 다시 없을 은인이다. 하지만 그 은인을 은인으로 볼 것인지, 걷는 길이 다르니 그 은혜도 무시할 것인지는 네 판단에 달렸다.”
“……!”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네 은인이다. 그리고 백도 무림에 속해 있지.”
“……역시.”
“자, 이제 어쩔 테냐? 흑도의 명문 출신인 너는, 백도의 명문 출신인 내게 목숨의 구함을 받았다. 이 은혜를 갚을 테냐? 아니면 무시하고 갈 길을 갈 테냐?”
“갈 길을 간다면?”
강량의 눈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백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내가 만일 갈 길은 가겠다 하면, 이대로 보내 줄 생각은 있소?”
“그렇다.”
“……!”
“왜? 의외인가?”
“……그렇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웃어 버렸다.
‘여전하군.’
강량의 무수히 많은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저 솔직함이었다.
애초에 녀석은 머리로 싸우는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의 계책에 쉽게 걸려드는 바보도 아니었다.
묵직하고 호탕하게.
거짓 없는 당당한 정면 돌파로 세상과 맞서는 철혈의 검사.
그것이 바로 강량, 흑제성 최강의 검사이자 흑도제일검(黑道第一劍)의 진면목이었다.
“너는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어. 아닌 말로 오늘 헤어지면 다시 볼 수나 있을지 모를 사이다. 그런 사람이 제 발로 나간다는데 왜 막겠어?”
“당신은 백도 무림 출신이잖소.”
“그게 뭐?”
“……당연히 흑도 출신인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았소만.”
“그 또한 섣부른 확신이군. 하긴, 보통 그렇긴 하지. 다만,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써 구해 주지도 않았겠지.”
“목적이 있어서 살려 둔 걸 수도 있지.”
“미안하지만 난 출신보다는 사람 그 자체를 보는 성격이라.”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출신보다는 사람을 본다. 그 별것 없는 말이 강량의 가슴을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연호정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사설이 길었군. 솔직하게 말하마. 나는 네가 나와 함께해 주었으면 한다.”
“……!”
“그렇다고 백도 무림으로 이적을 하라는 건 아니야. 비록 멸문하긴 했지만, 넌 여전히 귀철검문의 후계자다. 아니, 이제는 귀철검문을 대표한다고 봐야겠지.”
강량의 눈이 살짝 충혈되었다. 새삼 문파가 멸문하고 가족이 죽은 게 실감이 갔다.
“다만 문제는 너의 목적이겠지.”
“목적?”
“그래. 너는 투왕 양천을, 나아가 묵룡부를 없애 버리고 싶겠지?”
“그렇소.”
“나 역시 마찬가지다.”
“……?!”
“정확히는, 지금 이따위밖에 안 되는 흑도를 말끔히 청소하고 아주 그럴듯한 흑도를 만들고 싶다.”
연호정이 자신의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 동료들도 모르는 사실이야. 저 사람들, 제각기 성격은 달라도 뿌리부터 백도인이거든. 나와는 다르지.”
“……하면, 당신은 본래 흑도 출신이라는 거요?”
흑도 출신은 아니지. 흑도대종사가 되어 본 적은 있지만.
연호정은 강량의 질문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것이 널 구해 준 이유다. 순수한 의도는 아니지?”
“궁금한 게 있소.”
“많겠지.”
“그렇소. 하지만 이것만큼은 반드시 묻고 싶소.”
“말해 봐.”
강량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물었다.
“대체 나의 뭘 믿고 함께하자는 것이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너에 대해서는, 아니 너는 물론 오대신장 모두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지.
“본문은 분명 흑도의 명문이오. 내 감히 장담컨대, 흑도 무림에 본문만큼 뛰어난 절학과 법도를 갖춘 문파는 없소.”
“일정 부분 인정하지.”
“하지만 제아무리 검문의 후계자라도 사상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며 실력이 다른데, 대체 내 무엇을 보고 함께하자고 하는 거요? 설마 나에 대한 조사라도 한 것이오?”
타당한 질문이었다.
연호정은 양손으로 잔을 만지작거렸다. 막상 이렇게 물어보니,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글쎄다.”
연호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감이라고 해 두지.”
“감?”
“그래, 감.”
“그건 대답다운 대답이 아니오.”
“그렇게 들릴 걸 알지만, 지금으로선 이 말밖에 해 줄 수가 없군.”
연호정이 눈에 힘을 주었다.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하지. 우리 일행 모두가 널 지켜본 건 아니야. 내가 본 거지.”
“…….”
“즉, 일행도 아직 몰라. 내가 왜 널 구했는지.”
“백도 무림 측에서 뭔가 일을 꾸민 건 아니란 뜻이로군.”
“솔직히 네게 그 정도의 가치는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강량 역시 피식 웃었다.
“지나치게 솔직하시군.”
“솔직한 대화를 원한 거 아니었나?”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강량이 그제야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백주였소?”
“뭘 바랐나?”
“너무 독하군.”
“인생은 쓰고, 진실은 더 쓴 법이지.”
나직이 한숨을 내쉰 강량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이내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연호정은 익숙한 동작으로 잔을 받았다.
강량이 말했다.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소.”
“그런가?”
“당신이 이놈 목숨을 구해 준 것은 결코 잊지 않으리다. 평소라면, 내 당신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했을 것이오.”
“음.”
“하지만…….”
강량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나는 양천을 죽이고 묵룡부를 무너트릴 것이오.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고, 어쩌면 중간에 죽을 수도 있소이다.”
“…….”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만, 이 은혜를 제대로 갚기 어려울 듯하오.”
“틀렸다.”
“……?”
연호정이 강량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애초에 평생이 걸릴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너라면 평생을 노력해도 양천과 묵룡부를 박살 낼 수 없어.”
“…….”
“솔직하게 인정해라. 운이 좋으면 사람을 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봤자 그뿐이야. 절대 네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강량이 이를 악물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그러는 넌 뭘 믿고 그리 자신하는 거지? 묵룡부의 전력이나 자금력을 상세히 조사해 보기라도 한 건가?”
“그건 아니지만…….”
연호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칼같이 예리해졌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강량은 깜짝 놀랐다.
“애송이처럼 굴지 마라, 강량.”
“……!!”
“진짜 복수하고 싶나? 그렇다면 네 감정을 숨기는 법부터 배워. 어떻게 자신하냐고? 자신할 수밖에 없지. 상대의 힘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노력하면 되겠지, 하는 속 편한 생각으로 똘똘 뭉친 머저리의 말로는 안 봐도 뻔하니까.”
“…….”
“이대로 나가면 넌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그마저도 운이 좋았을 때 얘기지, 기실 네놈의 성격이나 실력을 보면 열흘도 못 버틸 거다.”
인생은 쓰고 진실은 더더욱 쓰다.
가혹하리만치 적나라한 어조였다. 하지만 강량은 연호정에게 화를 낼 수도, 반박할 수도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걸. 양천은커녕 묵룡부의 고수 하나 잡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묻겠다. 복수하고 싶나?”
“……그렇소.”
“계획은 있고?”
“없소.”
“믿을 만한 조력자는?”
“……없소.”
“사람을 부릴 자금력은? 네 녀석의 명성을 이용해 병력을 모으는 건 가능한가? 상재(商才)가 출중해서 돈이라도 잘 벌어들일 수 있나? 아니면 머리가 뛰어나서 기가 막힌 책략으로 적을 무너트릴 수는 있나?”
“…….”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조목조목 따져 보니,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연호정의 눈이 살벌해졌다.
“무림은 한 번의 실수로 목이 달아나는 곳이다. 그것은 백도와 흑도를 가리지 않아. 하물며 흑도 무림 전체가 널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지금, 그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
“절대 불가능해.”
“그럼 어쩌란 말이오?”
강량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물기가 어린 두 눈에 폭발적인 감정이 실렸다.
“그렇소! 나는 애송이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칼질 조금이 전부고, 그마저도 진짜 고수에게 통할 수준은 아니오! 그럼,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니 복수를 포기하라는 말이오?!”
“포기해.”
“뭐, 뭐라고?!”
“포기하라고 했다. 앞으로도 그런 정신머리로 살 거면,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 부모의 위패를 모시면서 사는 게 낫겠지.”
“이익!”
“하지만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복수가 불가능한 건 아니야.”
“……뭐?”
“나와 함께해라.”
“……!”
“내 수하가 되라는 것도, 백도 무림에 투신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와 함께 세상을 종횡하며 배우고, 익히고, 경험해라.”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적어도 갈피 못 잡고 방황하다가 객사하는 일은 없게 해 주지.”
“…….”
“물론, 네 녀석 역시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연호정이 강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하겠나? 나와 함께하겠나?”
홀린 듯 연호정의 손을 바라보는 강량.
그는 이 무서운 남자의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