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제왕의 귀환 (1)
비밀리 호남 최북단으로 올라간 모용군은 제법 이름난 주루에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유유자적이었다.
주루 최고층, 초호화 특실을 차지하고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경치 한번 좋구나.”
과연 자리를 잡는 데에만 은자 스무 냥이 들어가는 곳답게, 동정호(洞庭湖)가 한눈에 보인다.
바다처럼 광활한 호수 표면에 햇살이 부딪치며 찬란하게 부서지는 광경은 실로 황홀해서, 압도당하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호북성과 호남성이라는 명칭 자체가 바로 저 동정호에서 왔다. 동정호의 북쪽이라서 호북, 동정호를 낀 남쪽 지방이라 호남.
말하자면 내륙 지방에서도 가장 유명한 호수 중 하나라는 뜻. 과연 이렇게 보니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이유가 있었다.
“호남성에 터를 잡았음에도 이리 여유 있게 구경하는 건 처음이지 싶은데. 허! 나도 어지간히 팍팍한 인생을 사는 모양이야.”
호수는 넓고 땅은 비옥하다. 저 멀리 도시 아래에선 아이들이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홀린 듯 호수를 보던 모용군의 얼굴에 어느새 한기가 어렸다.
‘지금쯤이면 얼추 끝났으려나.’
미시(未時) 중반이 지난 시각이었다. 연호정의 실력이라면 한 시진 전에는 끝났으리라.
‘괜히 청소를 떠맡겨서 미안하군. 하나 어쩌겠는가? 그냥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매혹적인 순간이었다네.’
귀주상회의 실제 상행조는 전부 죽였다.
그리고 그 상행조로 위장한 이들은 바로 모용세가 휘하에서 주변 문파와 상단을 망가트린 그림자 무사들이었다.
‘안 그래도 언제 처리할까 고민이었거든.’
그림자 무사.
말이 그림자 무사지, 대놓고 말하자면 그냥 해결사에 가깝다. 정파의 탈을 쓴 백도인들은 절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주는 인간 백정들이라고나 할까.
모용군은 그 백정들을 직접 키웠다. 외부의 손을 빌리면 훗날 분명히 뒤가 잡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놈들이 중간에 배신할 것을 염려하여, 애초부터 가족이 있는 자들만 선별하기까지 했다. 지킬 것이 있는 개는 절대 주인을 물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들의 쓸모가 다했다.
모용군은 차갑게 웃었다.
‘차기 맹주가 될 사람에게 놈들의 존재는 지나치게 위험하거든. 슬슬 환부에서 악취가 나. 언제고 내 몸을 병들게 할 놈들이라면, 이 기회에 도려내 버리는 게 낫겠지.’
실제 상행조의 상인들을 몽땅 죽여 귀주상회 측의 눈을 흐리게 만든다.
이후 그림자 무사들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실무조의 손에 죽게 만든 이후, 실무조가 임무를 달성하도록 유도한다.
그 사이 자신의 존재를 흑도에 알려 눈을 돌리게 한 후, 연호정이 자신을 잡으러 오도록 유도하여 실무조 전원의 죽음을 꾸민다.
그렇게 되면 실무조는 안전하게 맹으로 귀환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외적으로는 죽은 인재가 되니, 양천 역시 실무조를 더 찾으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번 임무의 지휘권자, 모용군이 그린 그림이었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어. 내년이 되면 슬슬 선거가 시작된다.’
모용군의 술잔을 기울였다.
최고급 층에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백주였다. 그 독한 술을 마시고도 별 감흥은 없었다.
‘당파의 힘은 물론, 무림 판도를 뒤흔들 만한 임무의 지휘권자로서 이번 건을 성공시키기까지 한다. 차기 대권을 거머쥘 만한 공(功)이라 하기엔 미흡하나, 어차피 봉공 중 나만 한 공을 세운 자는 하나도 없으니.’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인망이다.
하지만 인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능력이었다.
‘딱 좋아. 딱 알맞은 시기에 양천이 나서 주는군. 아주 좋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은 정치가에게 필수다.
처음에는 양천의 존재를 진심으로 우려했었다. 물론 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자신에게 이득이 될 수 있음을, 제갈문호와 연위의 부탁을 받고 직감했다.
‘본인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설령 경쟁자에게라도 부탁을 마다하지 않는다. 즉, 해결하기 힘든 난제가 많을수록 인망보다는 능력을 본다는 게지.’
평화의 시기에는 인망이 좋은 자가, 난세에는 능력이 좋은 자가 대권을 거머쥐는 법.
아직 난세라 하기에는 부족하나, 무림맹 창설로 인해 흑도가 일어났으니 평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적당한 때가 되면 살살 부채질을 시작해야겠지.’
그 준비를 위해 직접 호남에 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밑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역시 사람은 마음을 열고 배워야 하는 게야. 제갈 군사, 당신 덕분에 큰 것을 깨달았다네.”
정말이지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자신에게 이번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면, 보다 원초적인 방법으로 이 차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일은 이렇게 흘렀고, 진창을 구르는 대신 우아하게 날갯짓을 할 기회를 거머쥐었다.
‘이래서 인생은 재미있는 거야.’
빈 잔을 채운 모용군은 문득 드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이보게, 호정. 사실 말이네, 나는 자네가 죽도록 밉지만, 동시에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네. 내 얼마나 자네를 내 밑으로 들이고 싶은지 모를 게야.”
이건 진심이었다.
당관에게도 말했지만, 연호정은 나이가 어리다고 평가 절하 당할 인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나이에 이 정도 정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높이 평가받아 마땅했다.
만일 연호정이 자신과 손을 잡는다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백도 무림을 넘어 천하를 노려 볼 만도 할 텐데.
“하지만 또한 알고 있네. 자네가 절대 나와 손을 잡지 않으리라는 걸. 그래서 더더욱 자네가 탐이 나는지도 모르겠네만.”
재차 잔을 비운 모용군이 동정호를 응시했다.
햇살을 덮은 호수의 신비로움. 그 속에는 추한 인간사의 갈등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모용군의 얼굴에 언뜻 씁쓸함이 엿보였다.
“……어쩌겠나? 짐승으로 태어났으면 짐승의 도(道)를 좇는 수밖에. 자네도 나처럼 송곳니를 달고 태어난 맹수이니 이해할 거라 믿네.”
그때였다.
“가주님.”
무연의 목소리였다.
모용군이 잔을 채우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
“실무조가 상행조를 섬멸했습니다.”
“역시 그랬군.”
애초에 실무조가 당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랬다면 이런 짓을 꾸미지도 않았을 것이다.
연호정은 살아야 했다. 적어도 이번 임무까지는.
연호정은 죽어선 안 되었다. 적어도 흑도의 땅에서는.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일이라 제법 놀랐을 터인데, 좀 다독여 줘야겠군. 녀석에게 전하게. 문은 언제나 열어 두겠다고.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오라고 말일세.”
* * *
“으하하하!”
양천이 광소를 터트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자네가 성공할 줄 알았단 말일세.”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께서 믿어 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애초에 자네를 믿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을 걸세.”
양천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이번 일의 뒤처리는 어떻게 해 줄꼬? 정보만 막아 주면 되겠는가?”
“의문의 고수가 습격한 것으로 보이도록 흔적을 꾸며 두었습니다. 귀주상회 본단에서 사람을 보낸다 한들, 누가 그랬는지 파악하긴 힘들겠지요.”
“허허허.”
연호정이 넉살 좋게 말했다.
“하지만 부주님께서 손써 주신다면 굳이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일이야 깔끔하면 좋지요.”
“크하하! 자네, 생각보다 유쾌한 면이 있구만.”
양천이 팔걸이를 쿵쿵 쳤다.
“좋아, 정보는 묵룡부 차원에서 처리해 주도록 하겠네. 이번 일, 귀주상회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연호정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거였군.’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지 않으면 살기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알아서 처리해 준다…… 그래, 네놈이 죽여도 이쪽에서 알아서 처리할 테니, 아무 문제 없이 빠져나갈 수 있다, 이건가?’
정말이지 머리 굴리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힌 인간이다.
이번에는 진정 대단했다. 얼마나 감탄했는지,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자네가 가져온 운송 물품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기실 본부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묵룡부 차원에서 그리 대단하다고 보긴 어렵지.”
“알고 있습니다.”
“즉, 자금으로서의 가치는 크지 않네. 다만 자네의 능력을 입증했다는 증표는 될 수 있겠지.”
“그렇지요.”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가져온 지참금, 자네가 쓰게.”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분노로 점철되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순수하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 그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구먼.”
“……?!”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 아닌가. 안 그래도 큰 선물을 받았는데, 자네에게는 뭘 해 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네.”
“하지만…….”
“자네는 이제부터 묵룡부의 사람이야. 부를 위해 일하는 인재에게 제대로 된 대우는 못 해 줄망정 받아먹기만 해서야 쓰겠는가.”
양천이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나는 인재를 아낀다네. 아낀다면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 줘야지. 자네가 실수하지 않는 한, 내가 자네를 내치는 일은 없을 걸세.”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되었네. 사람 참, 내 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매섭더니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진짜로 받아 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하하하!”
정말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웃음을 터트리는 양천의 모습에서 충만한 환희가 엿보였다.
“자, 사담은 이만하면 충분하니 이제 일 얘기를 해 보세나.”
“그러시지요.”
“자네는 자네의 능력을 입증했네. 그만한 능력과 공(功)이라면 높은 자리를 주어도 반발하는 자가 많지 않을 걸세.”
많지는 않다. 즉, 있긴 할 거란 말이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물론 그래야지.”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 직위는 무엇인가?”
연호정은 즉시 대답했다.
“정보부(情報部) 부장(部長), 혹은 감찰부(監察部) 선임차사 이상급입니다.”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정보부장이 아니면 감찰부 최고 실세 자리를 원한다?”
“그렇습니다.”
“화끈한 자리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기야 했네만, 설마하니 정보부나 감찰부일 줄은 몰랐는데.”
“이상합니까?”
“이상하진 않네만, 난 자네가 전투 부대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을 거라 생각했네. 자네 정도의 무공과 성격이라면 그쪽이 더 어울리기도 하고.”
진기나 내공 운용에 문제가 있긴 해도 그 경지를 이루며 연마한 안목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진심으로 묵룡부에 투신하려 했다면 전투 부대의 실세 자리를 원했을 테니까.
“호남성부터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전선에 나가는 것보다 내부 관리직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흠,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도 짐작했듯, 감찰부에 자리를 만들어 주기는 힘들다네. 반발이야 충분히 억눌러 줄 수 있지만, 감찰 특성상 외부인이 들어오면 분위기가 지나치게 험악해질 거야.”
연호정이 모른 척 잡아뗐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자네라면 안 그러겠나?”
“하면?”
양천은 가만히 연호정의 눈빛을 살피다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구이언으로 수하를 실망시키는 군주가 되어선 안 되겠지?”
“……!”
“사흘 후, 조직 개편을 시작할 걸세.”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해 보게, 정보부장.”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