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뒤흔들다 (4)
“출발했다고 하오.”
“그렇구먼.”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모용군을 보며, 언자방이 물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소?”
“얼마든지.”
“당신에게 이득이 되니 일부러 그리했다는 건 알겠소.”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언자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행조 말이오. 원래 상행조를 다 죽이라 하지 않았소?”
“아, 그거 말인가?”
모용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그게 왜?”
무서운 자.
언자방은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할 뻔했다.
이미 모용군의 머릿속에는 죽은 상행조원들 따위 들어 있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신경도 쓰지 않은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상인들을 눈에 띄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였다. 물론 그로 인해 모용세가가 엄청난 이득을 얻겠지만, 최소한의 애도는 표하는 것이 정상 아닐까?
언자방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죄책감은 없으시오?”
“무슨 죄책감 말인가? 아, 상행조?”
“그렇소.”
모용군은 딱 잘라 말했다.
“그들은 전쟁의 사상자일 뿐이야. 그런 데까지 일일이 마음 쓰다가는 무림에서의 입신양명은 꿈도 꿀 수 없지.”
“…….”
“자네도 알아 두게나. 큰 마차를 몰고 가다 보면, 그 바퀴에 깔려 죽는 벌레도 생기는 법이라네.”
언자방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모용군과 거래를 했다. 하지만 말이 거래지, 기실 군신지간(君臣之間)이나 다를 바가 없는 관계였다.
즉, 모용군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의로운 일을 하든, 저열한 짓을 하든.
‘무섭구나.’
필요하다면 누구보다도 냉혹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이야.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이제 그 정도는 알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거늘.”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오.”
“음?”
“내 말은,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오. 그들을 살려 둔 채 귀주상회를 찍어 누를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소?”
“그런 방법이 있나?”
“나는 모르겠소. 하지만 당신이라면 분명 그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 거요.”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부인하지 않겠네.”
언자방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죽인 거란 말이오?”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이번 임무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용납할 수 없지.”
“……?!”
“그래, 자네 말마따나 방법이야 많았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흔적을 지워 버리는 것이야.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소리가 왜 나왔겠는가?”
“…….”
“임무도 달성하고 싶고, 내 몫의 돈도 챙겨 두고 싶다? 남의 사정을 일일이 봐줘 가면서 원하는 것만 골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보나?”
모용군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전광(電光)이 어렸다.
“두 마리 토끼를 얻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냉혹한 결단과 속도라네. 거기에 인정(人情)이니, 사정이니 들먹여 봐야 신경 쓸 것만 많아질 뿐이야.”
언자방이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 역시 이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다만,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조금은 도리를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틀렸다. 모용군은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는 주군이 아니었다.
모용군은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효웅이었다. 그런 그에게 속세의 도리와 윤리는, 그저 겉보기에만 그럴듯할 뿐 실용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예복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였다.
“크게 보면 자네도 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무슨 말이오?”
“자네, 실전된 언가(彦家)의 강시술(僵尸術)을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순간 언자방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자네를 경동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네. 나는 오히려 그러한 열정과 결단력에 박수를 보내는 쪽이야.”
“……그만하시오.”
“결국 다 똑같네. 가문을 위해서든, 권력을 위해서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란 족속의 본질이지.”
모용군의 얼굴이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진흙탕에 발을 들이지 않는 자, 결국 패배와 함께 도태될 뿐이야. 나는 내 인생의 승리자로 남고 싶을 뿐, 패배한 개가 되어 비루하게 살고 싶진 않네.”
광기마저 엿보이는 목소리였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변명 따위가 아니었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찻잔을 전부 비운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도 슬슬 움직여 보세나.”
“……어디 가시오?”
“어디라니? 실무조가 움직였으니, 나 역시 내가 할 일을 해야지.”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 임무가 성공리에 마무리되면, 실무조는 곧장 묵룡부의 심층부로 들어가게 될 걸세. 거기서 원하는 정보를 몽땅 얻어 돌아오겠지.”
“……?”
“실무조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또 다른 판을 준비해 둬야 할 것 같네.”
* * *
파아앙!
우거진 숲길을 돌파하는 세 남녀의 신법은 바람처럼 빨랐다.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연호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모용군.’
가득상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이번 정보 조작, 정말 믿어도 되겠소?’
당연히 믿을 수 없다.
만일 모용군이 무림맹 본단에서 명을 내렸다면, 이 정도까지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께 가자고 했을 때는 손사래를 쳤던 인간이, 실무조가 성공리에 호남을 돌파하자 기다렸다는 듯 적진에 파고들어 왔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다. 이번만큼은 연호정도 모용군의 수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만 보기로 했다.
모용군 역시 이번 임무가 실패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실무조가 만족할 만한 정보를 탈취한 후 안전하게 귀환하기까지, 확실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리란 것.
그러나.
‘분명 뭔가가 있다.’
그에게 직접 말했듯, 모용군은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한 번에 처리할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다.
‘분명 귀주상회와 모종의 거래를 텄겠지.’
혹은, 거래를 트진 않았지만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인내하고 있거나.
‘모용군은 경우에 따라 마두(魔頭) 이상으로 흉악해질 수 있는 자다. 게다가…….’
이곳 호남성은 모용세가가 자리한 지역이었다.
물론 묵룡부가 위치한 장사와는 거리가 엄청나게 떨어져 있었다. 작정하지 않는 이상, 실질적으로 부딪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묵룡부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호남성 내에서 모용군의 입지는 엄청나게 탄탄할 거다. 뭔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무림맹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연호정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상관없어.’
모용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인처럼 멋들어진 미소를 머금은 얼굴 속에 드리워진 지독한 욕망.
‘이번만큼은 당신이 뭘 하든 상관 않겠다.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서든, 가세(家勢)를 불리기 위해서든 어지간한 건 다 눈감아 줄 수 있어.’
하지만.
‘선은 넘지 마라.’
모용군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가 벌이는 일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다. 상대도 상대지만, 이쪽 역시 피곤해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선을 넘어 버린다면 그때는 제지할 수밖에 없다.
‘상식도 도의도 통하지 않는 건 알지만, 적어도 사람의 몸뚱이로 태어났으면 삼류가 될지언정 악마는 되지 마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연호정은 새삼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긴, 나 역시 남들 눈엔 악마나 다름없겠군.’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다.
연호정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됐어. 지금은 임무만 생각하자.’
그때, 옆에서 패율이 물었다.
“그건 괜찮나?”
“예?”
“창 말이야. 쓸 만하냐고 물었다.”
연호정이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호남으로 진입했을 때 산 철창이었다.
“괜찮습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군.”
“대장장이 실력이 아주 좋더군요.”
“음.”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자네 창술도 대단한 경지를 이뤘더군.”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휘두르려면 창봉술은 기본입니다.”
“하긴, 그도 그런가?”
“한데 왜 그러십니까?”
패율은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그게…….”
연호정은 물론 당상아도 의아한 눈으로 패율을 보았다.
패율이 헛기침을 했다.
“본문의 사일검(射日劍)이…… 뭐, 그건 알고 있지?”
유실되었다는 걸 뜻하는 것이리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뛰어나진 않더라도 능히 비견될 만한 무공을 하나 만들고 싶어서. 진행 중이긴 한데 말이야.”
“……?!”
“어떻게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이게 아무리 봐도 검(劍)보다는 창(槍)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무공을 만드셨다고요?”
“허허험!”
“설마, 전에 제게 보여 주셨던 것이?”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아직 한참 멀었다네. 자네와의 비무 이후에 찬찬히 뜯어 보니 빈틈이 한두 군데가 아니더군. 개량의 여지가 많아.”
“대단하십니다.”
연호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무공을 창안한다? 이건 단순히 실력의 고하로 판단할 게 아니었다.
수준이 높든 낮든, 새로운 무학을 창안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형(形)은 물론, 그 형에 걸맞은 내공의 운용법까지도 만들어야 하니 보통 힘든 작업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중에 창술로 나와 대련 좀 해 주게.”
“물론입니다.”
그 성격에 이런 부탁을 하기란 정말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만큼 본인이 만드는 무공에 진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데 그 무공의 명칭은 무엇입니까?”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무공에 이름은 무슨.”
“그래도 만들어 놓으신 것 같은데요?”
패율이 또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냥 뭐…… 부르기 쉽게 관일검(貫日劍)이라고 해 봤네.”
“관일검.”
“관일검이 될지, 관일창(貫日槍)이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약속은 꼭 지키게.”
“알겠습니다.”
연호정의 얼굴에 언뜻 부러운 감정이 어렸다.
‘새 무공을 창안한다…… 정말 대단한 일이야.’
기존의 무공을 뜯어고쳐 구사하기 편하게 만드는 건 연호정 역시 누구 못지않게 잘했다.
하지만 패율처럼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패율이, 정작 이런 쪽으로는 한참이나 앞서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훗날 내게도 이런 시기가 올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건 단순히 마음을 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다만 그 운명의 시기가 자신에게도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무공으로 천하에 족적을 남기고 싶은 기분. 연호정 역시 무림인으로서 그 정도 욕망은 있었다.
그렇게 일행이 숲길을 달리길 한참.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저깁니다.”
“그렇군. 한데…….”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이건?”
당상아 역시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고수들인데요?”
당황한 것은 연호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목적지, 그곳에는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백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바로 상행조의 의복을 빌려 입은 상행 대리자들이었다.
한데 그들의 기도가 몹시 묘했다.
‘강하기도 강하지만…….’
연호정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뭐지, 이 피 냄새는?’
그때였다.
차차차차창!
귀주상단의 상행조 전원이 도검을 뽑아 들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군…… 설마?!’
상행조의 중앙, 눈가에 칼자국이 난 중년 사내가 살기 넘치는 외침을 토해 냈다.
“죽여라!”
파바바박!
백 명의 고수들이 세 사람을 향해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