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뒤흔들다 (3)
장원으로 돌아온 일행이 한데 모였다.
“허, 이게 진짜 되네.”
가득상은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이리 쉽게 양천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당상아가 무거운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쉽지는 않았죠. 그저 쉽게 느껴졌을 뿐.”
일전 연호정과의 대화에서 새삼 이번 임무의 어려움을 깨우친 그녀였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부드럽긴 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게 연호정이 양천과 담판을 짓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하긴 그 말도 맞소이다. 연 공자가 고생을 많이 했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아니오. 후개 말도 옳소. 생각보다 쉬웠지. 상대가 양천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리고 하나 더.
‘현재 양천의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해.’
양천의 기도만 읽어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공의 고수일수록 품고 있는 기(氣)가 심신(心身)에 더 강하게 스며든다. 심(心), 기(氣), 체(體)는 곧 정(精), 기(氣), 신(神)의 일체화와 맥을 같이하니, 기가 흐트러지면 심신의 조화도 깨질 수밖에 없다.
물론 단순히 진기에 파탄이 났다고 해서 그간 이룬 경지가 흔들리거나 마음이 병드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그 얼마 안 되는 경우에 양천이 해당한다고 연호정은 확신했다.
‘진기가 불안정하다 한들 허공섭물마저 그따위로 허술하게 하진 않지.’
허공섭물 자체가 초고수만이 선보일 수 있는 기예다. 그런 술수를 숨 쉬듯 자연스레 구사한 것만으로도 양천은 존경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허공섭물을 쓰는 과정에서 운용하는 내공의 흐름이 너무 제멋대로였다. 내공 운용이 엉망이라는 걸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게 의아할 정도였다.
‘과거에도 그랬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군.’
연호정이 양천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건, 그가 이미 양천 이상의 경지를 돌파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양천을 죽였을 때의 그는 그 수준까지 닿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양천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기야 그땐 그런 걸 분석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하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냐?”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공(功)이라는 걸 세워서 침투하면 되는 건데, 모용가주가 깔아 준 그 판이 정말 믿을 만한 거냐?”
제갈아연이 입맛을 다셨다.
“일단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워낙에 시간이 없기도 했고, 와중에 최선이었다고 봐요, 저는.”
“호남 형산에 머문 귀주상회의 상행조를 섬멸한다……. 그 상행조, 모용군이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한 거 맞나?”
“당연히 그렇겠죠.”
제갈아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모용세가가 그동안 귀주상회와 거래라도 한 모양이죠. 하기야 인접한 지역이니 이상할 것도 없고, 모용가주 역시 이번 임무에 찬물 끼얹을 수는 없을 테니까 믿고 가는 수밖에요. 그렇지?”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야지. 그리고 막말로, 의심스러워도 뭐 어쩌겠어?”
“하긴.”
가득상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음?”
“터놓고 말해 봅시다. 우리 중, 아니 무림맹에서 모용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잖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오해요. 아마 제갈 군사님이 훨씬 더 잘 파악하고 계실 거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제갈 군사님이 창공을 노니는 매라면, 당신과 모용군은 범과 사자요. 경쟁자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또 다른 경쟁자일 수밖에 없소이다.”
“그렇다고 칩시다. 한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소?”
가득상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이번 정보 조작, 정말 믿어도 되겠소?”
“음.”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무대는 믿을 수 있소.”
“그 말은?”
“무대 뒤에서 무슨 짓을 꾸몄든, 극(劇)은 제대로 마무리되리란 확신이 있소.”
일행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 말은 연호정 역시 모용군이 깔아 준 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당상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면, 뭔가 대책이라도 세워 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대책을 세우려 해도, 당장 그가 무슨 짓을 꾸몄는지 알 도리가 없잖소.”
패율이 혀를 찼다.
“모용가주가 무슨 계략을 꾸몄든,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정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그때 박살 내면 그만이야.”
참으로 그다운 말이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모용군의 술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지금,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겁니다. 게다가 꼭 술수를 부렸을 거란 증거도 없고요.”
패율이 그것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정리해 봅시다.”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귀주상회 상행조를 습격하러 갑니다. 그 상행조는 이번 임무의 지휘권자인 모용군이 바꿔치기한 가짜이며, 진짜 상행조는 은밀하게 숨어 지역을 빠져나가기로 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상행조의 상행로(商行路)는 백도 무림맹이며, 그들이 운송하는 물품은 천금의 가치가 있는 보물들입니다. 우리는 상행조를 처리하고, 운송 물품 전부를 가져올 것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군.”
패율이 물었다.
“대체 그 운송 물품이 뭐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그걸 탈취하는 것만으로도 큰 공(功)이 되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무림맹으로 향하는 지원을 끊는다는 행위 자체이지, 물품의 가치가 아닙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선배님의 질문 역시 타당합니다. 그들이 운송하는 물품은, 장강 이북의 자금 가치로 구파일방급 대문파의 오 년 치 예산과 맞먹는다 합니다.”
“헉!”
패율은 물론 당상아, 제갈아연도 깜짝 놀랐다.
구파일방급 대문파의 오 년 치 예산이라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무림에서 큰 명성을 날리는 대문파들은 하나같이 중원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다. 지부 하나의 일 년 예산만 해도 어지간한 중소 문파의 일 년 예산을 웃돈다.
그런 지부들을 무수히 많이 거느린 대문파의 오 년 예산이라면, 제아무리 거대한 연합체인 무림맹이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 정도라고? 아무리 임무를 위해서라지만,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전투광인 패율조차 주춤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득상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모용군은 이번 자금을 투자하는 대가로 귀주상회를 무림맹과 이어 주기로 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애초에 상행조가 무림맹으로 향하는 거 아니었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귀주상회는 무림맹이 아니라 사천성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무림맹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조작된 정보였지요.”
가득상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정보를 조작한 게 본방이지.”
제갈아연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 정보를 토대로 판을 짠 건 모용가주고요?”
“그쪽이 먼저 시작하긴 했지만 뭐, 선후가 무슨 상관이겠어.”
“헐!”
세 남녀는 혀를 내둘렀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판이 착착 깔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상아가 물었다.
“귀주상회도 보통이 아니네요. 무림맹이 제아무리 크다지만, 맹과 거래를 터 보겠다는 목적 하나로 그만한 거금을……?”
“그건 무림맹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얕보는 거야. 무림맹은 중원 무림의 핵심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귀주상회로서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을 거야.”
“그, 그런가요?”
연호정이 말했다.
“대강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기실, 굳이 이런 부분은 알리지 않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지만, 최소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그들은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임무였군.’
일이 꽤 쉽게 진행되고 있기에 간과한 사실.
상대는 양천이며, 동시에 흑도 무림 전체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이번 임무 하나로 천하 무림의 판도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귀주상회에서 내놓은 금액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대문파 오 년 치 예산을 이리 쉽게 토해 내다니, 새삼 이번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자, 임무 하달합니다.”
연호정이 가득상을 보았다.
“후개는 이번 작전의 교각(橋脚)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곳 장원에 머물면서 주변 정보를 시시각각 분석해 우리와 지휘권자에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알겠수.”
“묵룡부와의 연관성이 없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누구도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엄포를 놓아 두긴 했습니다만, 혹시 모릅니다. 매 순간 긴장을 놓쳐선 안 됩니다.”
“이해했소.”
연호정의 눈이 제갈아연을 향했다.
제갈아연이 눈을 끔뻑였다.
“나한테 따로 시킬 거 있어?”
“이거.”
연호정은 품에서 작은 서신을 꺼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야. 녀석한텐 미리 말해 뒀으니 여기로 은밀하게 데려오기만 하면 돼.”
“응? 누군데?”
“귀철검문의 후계자.”
“에엑?!”
일행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뭐야? 그 원숭이가 한 말이 사실이었던 거야, 그럼?”
“엉.”
“왜, 왜?!”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게. 분명한 것은, 아직 녀석에게 우리가 무림맹 소속이라는 걸 알려 줘선 안 된다는 거야.”
“……일단 알긴 알겠는데, 왜 하필 나야?”
“기본적인 환영진(幻影陣) 정도는 알고 있지?”
“물론이지. 내 가문이 어디라고 생각해?”
“녀석은 흑도의 정보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대상이야. 그런 와중에 혈기가 왕성하고 복수심에 눈이 먼데다가 경험은 없어서 홀로 이곳까지 오지 못해.”
제갈아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좀 늦어지더라도 흑도 정보원들에게 걸리지만 말고 데려오란 거지?”
“정확해.”
“좋아, 나중에 꼭 설명해 줘야 된다.”
“물론이다.”
연호정이 패율과 당상아를 보았다.
패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 특기라곤 칼질뿐이다.”
혹시나 가득상과 제갈아연처럼 말랑말랑한 임무를 줄까 싶어 선수를 친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 상행조를 털어먹는 작전에 선배님을 뺄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흥, 그거 다행이군.”
“다만 말씀드릴 것은, 교전(交戰) 중에 점창의 무공을 드러내셔선 안 된다는 겁니다. 지극히 실전적인 무공을 써 주십시오.”
연호정이 당상아에게 말했다.
“당신도 마찬가지야. 당가의 암기술은 절대 써서는 안 돼. 아주 약간의 흔적이라도 보이면, 분명 의심을 받게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패율이 물었다.
“아니, 근데 교전이라니? 사람을 바꿔치기했다며? 이미 판을 다 짰는데도 진짜 싸울 일이 있다는 뜻인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패율의 안광이 번뜩였다.
“혹시 모용군이 수작을 부릴까 염려한 것이로군.”
“수작이라기보다는…… 어쨌든 그렇습니다. 만일의 경우이니, 이 점 꼭 기억해 주십시오.”
“알겠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고생들 많았습니다. 이번 임무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묵룡부 심층부로 들어가 원하는 정보를 모두 뽑아 먹고 귀환할 겁니다.”
“…….”
“각자가 맡은 역할이 있는 만큼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긴장들 합시다.”
모두의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천천히 소매를 접으며, 연호정이 말했다.
“자, 판을 뒤흔들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