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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21화 (221/963)

221화. 뒤흔들다 (1)

스르륵.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가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오셨는가.”

“그렇소.”

모용군이 차를 홀짝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는 천지가 개벽해도 사라지지 않을 여유가 가득 묻어났다.

장한의 눈이 번뜩였다.

“……더 강해졌소?”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무공의 발전이란 게 어린애 키 크는 것처럼 눈에 확 보이는 것이었던가?”

“기도가 더 은밀하고 자연스러워졌소.”

“그걸 느끼는 자네도 확실히 보통은 아니야.”

“그래서 나를 황풍정주(荒風亭主)로 세운 것 아니오?”

“하하하! 자네도 지금 생활에 제법 적응한 모양이군.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과거 안휘혈궁 건으로 모용군과 연호정이 만났을 당시.

연호정을 보내고 홀로 술을 마시던 모용군을 찾아온 사람이 바로 그였다. 황풍정주, 당대 모용세가 최고의 정보 단체인 황풍정의 주인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모용세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모용군의 휘하로 들어와 모용세가를 위해 일한 건 맞지만, 모용세가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오직 모용군의 명령만을 받는 사람.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그림자의 세계로 숨어 버린, 시대의 종용으로 잊힌 또 한 명의 고수.

황풍정주 언자방(彦磁舫), 희대의 권법가(拳法家)이자 살법가(殺法家)가 바로 그였다.

“그래서, 나를 왜 불렀소?”

“왜 부르다니? 모용세가의 가주가 가문의 정보 조직 수장을 부른 것에 달리 이유가 있겠는가?”

“…….”

“허허, 역시 농은 싫어하는군.”

모용군이 옆에 있던 의자를 뒤로 뺐다.

“앉게나.”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언자방이 의자에 앉았다.

모용군이 눈을 빛냈다.

“전에 내가 말했던 것들은 다 준비되었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소.”

“잘했네. 역시 자네에게 맡기길 잘했어.”

“일의 진행 상황을 듣기 위해 부른 것이오?”

“겸사겸사지. 자네가 또 해 줘야 할 일도 있고.”

“그게 무엇이오?”

모용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내일 정오, 귀주상회(貴州商會)의 상행조가 사천(四川)으로 향한다더군.”

언자방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주상회라면?”

“그렇다네. 귀주성 최고의 상단이자 전장(錢莊)이지.”

“……?”

“현재 귀주상회의 상행조는 호남 형산(衡山)에 있다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지.”

“그건 알고 있소.”

“아, 그런가? 하기야 호남의 상황을 자네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겠지.”

마치 자신이 부리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

모용군은 언제나 그랬다. 언자방을 대할 때는 명령이 아니라 제안이나 부탁 조로 말했다. 분명 자신의 수하임에도.

놀랍게도 모용군의 그러한 말투는, 언자방의 자존감을 다독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해서, 그들을 어쩌면 되는 것이오?”

“어쩔 것까지는 없다네. 그저 그들과 모종의 거래를 해 줬으면 해서.”

“어떤?”

모용군이 품에서 잘 접힌 서신을 꺼내 언자방에게 건넸다.

서신을 펼쳐 본 언자방의 눈이 흔들렸다.

“어차피 조만간 처리해야 할 놈들이 아니던가?”

“…….”

“놈들 데리고 상행조 한번 흔들어 보시게나.”

“처리해야 할 놈들이긴 하지만…… 귀주상회는 모용가에서도 꽤 중요한 거래 상대 아니오?”

“그렇지.”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소이다.”

“죄가 있다네.”

“어떤?”

모용군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 눈에 띈 죄.”

“……!”

“이번 건은 무림맹은 물론 연호정 그놈도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네. 내막을 아는 사람은 나와 자네, 둘뿐이야.”

“…….”

“조용히 묻게.”

“만약 이 일이 귀주상회 본단에 알려진다면…….”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걸세.”

“확신하오?”

“물론 확신하네. 이 뒤처리는 양천이 해 줄 거거든.”

언자방의 눈이 커졌다.

모용군의 동공이 서서히 붉어졌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된 악마의 눈이었다.

“그간 거들먹거리던 귀주상회가 이제는 우리에게 구걸하게 될 것이야. 이번 패 하나로 맹의 임무도 달성하고 거금도 얻을 것이며, 운이 좋으면 귀주상회마저도 찍어 누를 수 있다는 것이지.”

“…….”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할 걸세.”

“알겠소.”

스르륵.

언자방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모용군이 일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보게, 호정. 어쩌겠나?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혹여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너무 화를 내진 말았으면 싶네. 수틀리면 자네도 공범으로 몰아갈 거거든.”

* * *

쿠구궁.

묵룡전의 문이 열렸다.

이전과는 달리 연호정은 아흔아홉 개의 계단을 거침없이 올라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이었다.

“왔는가?”

양천은 여전했다. 거대한 태사의에 앉아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숨도 쉬기 어려운 위엄이 가득했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그간 잘 지내셨소?”

“덕분에.”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대화에 앞서, 내 수하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무척이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연호정이 흐릿하게 웃었다.

“벌써 보고가 들어갔소?”

“그랬지.”

“어지간히 똥줄이 탔던 모양이군.”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보고만 듣기로는 네 녀석도 잘한 게 없어 보인다만.”

“그렇다고 잘못한 것도 없소이다. 하지만 그쪽은 명백히 잘못을 저질렀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본부의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겐가?”

“부의 사람? 그 계집의 수하가 아니었소? 주군이라고 충성을 다하는 것 같던데.”

양천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자신이 부리는 수하라지만, 그 수하에게도 믿고 부릴 만한 또 다른 수하가 필요한 법이다. 세상 모든 조직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연호정의 말을 들으니 괜스레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주군인 것처럼 여겨졌다.

“애초에 접근이 잘못되었소. 나는 아직 부주의 사람이 아니고, 부주 역시 내 능력을 모르니 신뢰하지 않잖소?”

“…….”

“아시겠소? 막말로, 길 가다 마주친다 한들 눈인사도 필요 없는 사이란 것이오. 그런 사람을 귀빈이랍시고 모셔 놨으면, 최소한 잘 모시라는 말 한마디 정돈 하셨어야지.”

“…….”

“그년이 우릴 업신여긴 거야 개가 짖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양 부주께서는 그래선 안 되었소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며, 억울하다며 소리를 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준엄한 목소리로 질책을 가한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무시무시한 배짱 하나만큼은 천하일품이었다.

“즉, 잘못은 나에게 있다?”

“나아가 사과할 책임도 있소이다.”

“허허.”

“하지만 사과는 받지 않겠소. 애송이들이 실수한 것일 뿐, 양 부주의 그릇이 작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작다면, 뭐 어쩌겠소? 어떻게든 내가 키워 드려야지.”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일순 광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쿠구구궁!

묵룡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양천의 웃음소리에서 자신을 향한 강한 호감을 느꼈다.

그의 감각은 정확했다.

“그거 아느냐? 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재를 봐 왔지만, 너 같은 놈은 없었다.”

“나 같은 놈을 만날 필요가 없었겠지. 홀로 천하를 주유했을 때는 말이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어인 겸양인가? 너답지 않구나. 너는 충분히 자신을 가져도 된다. 능력을 떠나, 너와 같은 배짱과 화통함을 가진 인재가 또 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그거 아쉽군. 양 부주의 성격을 진작 알았다면, 애써 거래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연호정이 품에서 두툼한 서신을 꺼냈다.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이냐?”

“그렇소.”

“자신이 있느냐?”

“일행이 막지 않았다면 부주의 직속 수하까지 죽일 생각이었소.”

자신이 없었으면 그렇게까지 막 나갈 생각을 했겠냐는 뜻이었다.

양천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리 주거라.”

우우우웅.

연호정의 손에서 빠져나온 서신이 허공을 날아 양천의 손으로 떨어졌다.

허공섭물. 그것도 극치에 이른 수법이다. 연호정이 구사한 게 아니라, 양천이 그의 손에서 서신을 빼 온 것이다.

파라라락.

허공에 떠오른 서신이 저절로 펼쳐졌다.

그야말로 요술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천하 무림의 정점에 서 있는 자, 성천십삼좌의 일익을 차지하는 절대자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역시.’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때 내가 느꼈던 위화감은 착각이 아니었어.’

연호정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양천의 공력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설령 지금의 연호정보다 강한 연위가 와도 눈치채지 못했을 미세한 틈이었다. 연호정이 양천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경지를 넘봤던 고수였기에 알 수 있는 빈틈이었다.

‘스스로도 모르고 있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걸 알면, 지금 저 자리에 앉아 웃으며 자신을 대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심마(心魔)? 아니야. 주화입마(走火入魔) 역시 아니다. 대체 왜 저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서신을 빠른 속도로 읽는 양천.

‘점점 빨라질 것이다.’

연호정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내공의 소실과 기도의 불안정함이 날이 갈수록 빨라질 거야.’

깨달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진기 그 자체의 문제.

심지어 닷새 전에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실제 내공의 소실 정도는 지극히 미세하겠지만, 본래 완벽(完璧)했던 힘에 빈틈이 생기니 유독 문제가 두드러져 보인다.

‘여전히 강해. 지금의 나로서는 양천의 다섯 합을 받아 내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투왕이 아니다.

이제 왕(王)이라 불릴 만한 무공을 구사하긴 힘들 것이다. 연호정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조각의 빈틈. 그 미세한 빈틈이 완전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그 불완전함으로는 더 이상 투왕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힘들 것이다.

‘중독이 된 건가? 그도 아니면 무공 자체의 문제?’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성천십삼좌급의 고수가 저 지경이 되다니,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양천의 상태가 궁금했다.

‘아직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알아채겠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연호정의 눈이 칙칙하게 가라앉았다.

‘양천…….’

그때, 양천이 손을 뻗어 서신을 쥐었다.

“놀랍군.”

양천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이것, 자네 혼자서 만든 것인가?”

“그렇소.”

실은 제갈아연이 도와주었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라도 양천이 제갈아연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온전히 자신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혹시 모를 일행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

“참으로 대단한 놈이로구나. 내 비록 이런 쪽에 아주 능통한 것은 아니지만, 언뜻 살펴보아도 체계적이고 막힘이 없는 듯하다.”

“그리 봐 주어서 다행이오. 그렇다면…….”

“잠시 기다리거라.”

양천이 손가락을 튕겼다.

사르르륵.

회랑 저편에서 노인 하나가 걸어왔다. 백서였다.

“나는 괜찮더군. 자네들끼리 상세하게 검토해 보도록 하게.”

“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서신을 받아 든 백서가 다시 회랑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흑도에서 머리깨나 쓴다는 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소?”

“저이들이 다 볼 때까지.”

“좀 걸리겠군.”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끼리 얘기나 좀 해 볼까?”

양천이 웃으며 물었다.

“귀철검문의 후계자, 정녕 네 짓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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