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와신상담(臥薪嘗膽) (8)
퍼억!
소리 없이 날아간 나뭇가지가 철판에 박혔다.
스르륵. 툭.
철판에 박히긴 했지만, 그 깊이는 가지의 끄트머리 한 치에 불과했다. 바람이 불자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뭇가지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음…….”
묵비의 눈에 아쉬움이 어렸다.
‘아직 멀었나 보다.’
그녀는 평상에 놓인 나뭇가지들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나뭇가지들은 하나같이 깎지 않은, 그저 부러트리기만 한 형태 그대로였다. 화살촉과 깃도 없었고, 심지어 곧지도 않아서 화살 대용으로 쓸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묵비는 그런 나뭇가지를 쏘아서 철판에 박아 버린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궁술(弓術)이었다.
“대단하시네요, 부장님.”
옥청은 혀를 내둘렀다.
“활의 장력도 무지막지하던데, 그걸 부러트리지 않게 조절하는 것부터가 어렵지 않습니까?”
“응, 그거야 뭐.”
묵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만 보였다.
옥청은 신기하다는 얼굴로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어떻게…… 헛?!”
파삭!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옥청의 얼굴에 황당함이 일었다.
“이거 속이 다 문드러졌잖아요? 썩은 나뭇가지였던 겁니까?”
“응.”
“컥!”
힘을 살짝만 줘도 바스러지는 나뭇가지를, 일류도 당기기 힘든 활에 걸어 쏘아 낸 것도 모자라 철판에 꽂아 버린 것이다. 그것도 원하는 표적에 정확히.
옥청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 한순간에 얼마나 복잡한 내공 운용을 하신 겁니까? 저희 무당파에서도 이 정도로 섬세한 내공 조절이 가능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모를 뿐, 생각보다 많을 거야. 나는 아직 애송이에 불과해.”
“……부장님이 애송이면 저는 뭐가 되나요.”
“애송이 수준도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열심히 수련해.”
“옙.”
편안하게 말하는 와중에도 나름의 엄중한 군기가 깃들어 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멸사군병들을 훈련하며 묵비에게도 상관으로서의 위엄이라는 게 생겼다.
게다가 군병 중 누구보다도 하루를 열심히 보낸다. 군병들은 어느새 말수 적고 착하기만 한 묵비를 진심으로 상관이라 여겼다.
물론 묵비는 아직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멸사군의 훈련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더 강해져야 해.’
묵비는 바닥에 떨어진 목전(木箭)을 주워 들었다. 잘 다듬어진 깃대에, 화살촉을 예리하게 세운 물건이었다.
그녀가 홍련궁에 목전을 걸었다.
까드드득.
팔을 당기는 대로 시위가 무섭게 늘어났다.
‘최소한 연 공자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피유우우웅!
하늘 높이 쏘아 올린 목전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전은 사라졌지만, 시위를 당긴 손에 남은 감각은 선명했다.
그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고.
묵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님께서 내일 쉰다고 하셨지. 내일 또 가르침을 구해야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는 연위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연위는 자상한 스승은 아니었다. 칭찬보다는 비판에 무게를 싣는 쪽이었고, 구구절절 설명이 많지도 않았다. 무리(武理)를 풀어 가르치기보다는 상대가 고민하고 직접 체득하도록 유도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설명은 절대 빠트리지 않았으며, 틀린 부분이 있다면 거침없이 지적했다.
자상하진 않지만 훌륭한 스승이었다. 묵비 역시 감각이 뛰어났기에 발전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문일지십(聞一知十) 소리는 들어도 백년지재(百年至材) 소리는 듣지 못한다. 반면 연호정은, 다들 쉬쉬하고는 있지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괴물이라고들 말한다.
묵비가 여기서 만족할 수 없는 이유였다. 최소한 연호정만큼은 강해져야 한다고 믿는 그녀에게 있어, 지금의 경지는 그저 과정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무공보다도 눈에 띄게 발전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왜 강해져야 하는가? 이유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가 강해지고 싶다는 거지.’
한층 성숙해진 마음가짐이다.
일생에 이루고 싶은 목표? 아직은 없었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난다 한들 그런 게 생길는지 모르겠다.
다만,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유 따위 찾지 않고 그저 나아간다.
연위와 함께 수련하며 무공이 발전했다면, 멸사군병들을 이끌며 정신적인 성장을 이룬 그녀였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답을 구할 만한 경지에 들어선 것이다.
“애들은? 잘 쉬고 있어?”
“아마도요? 하루 휴가라고는 해도 뭐, 거처에서 수련들 하겠지요.”
“그래?”
“예. 부장님께서 워낙 열심이니까요.”
묵비가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 보니, 너는 여기서 뭐 해?”
옥청이 머리를 긁적였다.
“부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이제는 됐습니다.”
“부탁?”
“예.”
“뭔데?”
“그게…….”
옥청이 헛기침을 뱉었다.
“근래 들어서 무공이 정체되는 걸 느꼈거든요. 하루하루 검리(劍理)에 정통해지는 것 같긴 한데, 몸이 그걸 못 따라가는 것 같아서요.”
“……?”
“나와 상극인 사람과 비무를 벌이면 답이 나올까 싶어서 왔는데…… 부장님 무공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아. 겨뤄 보고 싶다면 언제든지.”
“아, 저도 괜찮습니다.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왜?”
“같은 늑대라면 모를까, 호랑이와 싸운다고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차이도 적당히 나야지 이건 뭐…….”
“그건 싸워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닐까?”
옥청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은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 알겠습니다. 싸워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묵비의 눈이 빛났다.
‘옥청도 성장했구나.’
잠시 집중해서 보니, 옥청의 기도가 한층 현현(玄玄)해졌다. 뿜어져 나오는 기도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서 지금껏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당파의 무공이다.
안개처럼, 혹은 구름처럼 다가와 감싸는 기도다.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추구하는 무당의 무공은 비로소 옥청에게도 그 길을 열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예.”
옥청이 휘적거리며 파군각에서 나갔다.
홍련궁을 내려놓은 묵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화창했지만, 구름의 움직임이 제법 빨랐다. 어느덧 날씨가 쌀쌀해진 것이다.
“……일은 잘 되어 가나요?”
* * *
다음 날 아침.
‘아직인가.’
수욕을 마치고 단정한 의복으로 갈아입은 연호정은 장원 마당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골치깨나 아파질 거다, 이 양반아.’
연호정은 모용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묵룡부의 조직도를 개편하겠다고 나선 것은, 말하자면 시간 벌이에 가깝다. 그걸로도 충분히 강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지만, 이 거래를 제대로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성과가 드러날 만한 거래 품목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준비하겠다고 한 사람은 모용군이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늦으면 어쩔 수 없지. 내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할 수밖에.’
어차피 모용군의 협조는 공돈에 가까웠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혼자 힘으로 묵룡부의 심층부까지 도달해야 했을 테니까.
물론 연호정은 자신이 있었다. 양천의 신뢰를 얻어 낼 자신이.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때, 옆에서 당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쌀쌀한데 왜 나와 계세요?”
“쌀쌀하다니? 이 정도면 그냥 선선한 거지.”
“그래요?”
“응.”
잠시 머뭇거리던 당상아가 연호정 옆에 앉았다.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왜? 할 말 있나?”
“할 말이라기보다는…….”
“뭔데?”
당상아가 입맛을 다셨다.
“그거 연기였죠?”
“뭐가?”
“그…… 어제 말이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호정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피식 웃었다.
“그 원숭이 새끼 죽인 거?”
“그것도 그렇고요. 살기도 그렇고.”
“왜? 개세마두(蓋世魔頭)처럼 보이던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화원이라고 했던가? 그자, 여러모로 충돌이 잦을 것 같았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충돌이 아니라면, 초장에 기를 눌러 버리는 게 낫지.”
“그런가요?”
“그래.”
당상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사람을 죽였잖아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 어때서?”
“……?!”
“묵룡부는 적이야. 화원도 화원이지만, 어제 내가 죽인 자는 진심으로 살기를 품었어. 그것도 두 번이나.”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소지를 일으킬 여지가 있었다. 특히나 그런 부류는 주군의 명 없이도 과잉 충성으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크지. 아마 놔뒀다면 어지간히 우리를 괴롭혔을 거다.”
“가능성일 뿐이잖아요.”
연호정이 딱 잘라 말했다.
“단 일 푼의 가능성이라도 우리에게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치워 버리고 갈 것이다.”
“…….”
“여기는 흑도야. 묵룡부는 적지(敵地)이고,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순간 우리 모두가 죽을 수도 있다.”
“……!”
“임무는 물론 일행 전체의 안전에도 신경 써야 하는 내게 인간적인 대응을 바란다면, 미안하지만 지금이라도 돌아가.”
당상아의 눈이 깊어졌다.
“제가 제 역할을 끝냈으니까요?”
“들었나?”
“네.”
“맞아. 당신은 당신 역할을 충분히 해 냈어.”
“…….”
“오해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군. 그렇다고 당신이 쓸모가 없다는 건 아니니까. 당신만 한 고수가 도와준다면 그만큼 일이 쉬워지겠지.”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당상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당신들이 이렇게까지 물렁할 줄은 몰랐다.”
“물렁하다뇨?”
“벌써 잊었나? 상대는 흑도와 양천이야.”
“……!!”
“일이 쉽게 풀린다고 긴장도 풀어 버린 건 아니겠지?”
당상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렇다. 상대는 하나의 문파가 아니라 흑도 전체다. 심지어 그 흑도의 정상에 군림하는 자는 성천십삼좌의 일인이었다.
빈말로도 만만하단 말이 나올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도 협과 도의를 지켜 가며 일을 처리하라는 건가? 설령 그럴 방법이 있어도 택하지 않을 거다. 나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일에 영향을 주긴 싫으니까.”
특히나.
‘묵룡부가 삼교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큰 지금이라면 더더욱.’
울컥.
연호정은 애써 치솟는 분노를 억눌렀다.
‘확실한 정보가 필요해. 어쩌면 양천이 놈들과 무관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무(無)에 가깝다.
그러나 연호정은 속단하지 않았다. 보다 투명하고, 확신할 수 있는 물증을 원했다.
신중해야 했다. 확실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시간은 많아. 괜히 흥분해서 날뛰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자.’
기실, 과거로 돌아온 연호정에게는 삼교보다 명가가 더 죽일 놈들이었다. 삼교는 연가 하나만을 노린 게 아니었지만, 명가는 사적 이익을 위해 아무런 은원도 없는 연가를 멸문시켰으니까.
하지만 재앙의 크기에 있어선 삼교가 압도적이다. 그들은 애초에 무림이라는 영역 자체를 지워 버리려 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더 긴장되고, 더 흥분되는 것은.
그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음?”
당상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연 군장님을 비난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충격을 받아서요.”
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흑도의 정보원들을 암기로 쏴 죽였다. 심지어 그들은 죽은 원각처럼 살기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긴장이 풀린 거야.’
연호정과 함께 움직이다 보면, 어지간한 일은 그가 전부 처리한다.
그래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작전 초기 때의 긴장과 목적의식을.
심지어 탕마멸사 합군 작전에서 아군의 죽음에 혼이 나가기까지 했는데도.
‘우리는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새삼 소름이 돋았다.
임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오로지 적을 섬멸하기 위해 진군하는 임무가 있는가 하면, 지금처럼 적을 속이고 정보를 탈취하는 임무도 있다.
즉, 지금은 겉으로는 웃고 떠들지라도 속으로는 칼을 갈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전쟁은 한창 진행 중이었던 거야.’
당상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너무 애송이처럼 굴었지요?”
연호정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아마 이번 임무가 끝나고 나면, 당상아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참으로 다사다난하군.’
그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긴장하자고.”
“네.”
그때였다.
“왔소!”
저 멀리 담벼락에서부터 가득상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서신이 왔소.”
연호정이 벌떡 일어났다.
재빨리 가득상에게 서신을 받아 든 연호정은 일순 눈을 번뜩였다.
“……자, 이제 양천 만나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