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와신상담(臥薪嘗膽) (7)
‘빠르다!’
화원은 연호정의 보법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법이 아니라 보법이다. 비록 반응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경신술을 썼는지는 볼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놈의 보법이!’
지금껏 저런 보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보법(步法)이란, 말하자면 걷는 법이다.
그게 무도(武道)에서는 공방의 이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몸놀림의 일종으로 해석된다. 신법처럼 먼 거리를 이동하는 주법(走法)이 아니라, 공격과 방어, 회피에 있어 이로운 상황을 만들어 주는 하나의 초식인 것이다.
그래서 보법을 외따로 떨어져 익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다수가 병장기술이나 권장(拳掌)법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뭐가 되었건, 놈은 강하다.’
화원의 눈이 흔들렸다.
‘이 정도로 강할 줄이야.’
한 번 본 적도 없는 신비한 보법, 그리고 사위를 에워싸는 압도적인 기파.
‘하면, 내가 그간 상대의 실력도 못 읽었다는 뜻인가?!’
내공은 물론 무공의 강약조차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경지.
‘무종지벽!’
연호정이 원각을 내려다보았다.
한겨울의 설풍(雪風)처럼 시린 눈빛에 원각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너는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연호정이 손을 들었다.
우우우웅.
그의 손에서 날카로운 경기(勁氣)가 일었다.
진기로 병장기의 예기를 구현해 낸다. 실제로 그의 수도(手刀) 전체를 에워싼 청룡기는 하나의 길쭉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도검(刀劍)이 아니었다.
‘창(槍)?!’
화원이 외쳤다.
“당장 멈춰!”
퍼억!
원각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그의 손발이 바르르 떨렸다.
“미안하지만.”
주르륵.
목젖, 목뼈를 가르고 지나간 수창(手槍)의 경력이 원각의 연수와 대뇌까지 갈가리 찢어발겼다.
연호정이 손을 털어 냈다.
녹청빛 진기에 묻은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빈말은 안 해.”
울컥!
몇 차례 피를 토한 원각이 이내 축 늘어졌다.
“……!!”
장원 내의 분위기가 급전직하했다.
죽었다.
진짜로 죽인 것이다. 살기를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연호정이 서늘한 눈으로 화원을 보았다.
“너……!!”
화르르륵!
화원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쉽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지만, 상대는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였다.
변수가 많은 전장이라면 모를까, 정면 승부로는 이기기 힘들다. 하물며 그녀의 뒤에는 연호정의 일행도 있었다.
그들 역시 심상치 않은 실력을 지닌 고수들. 싸워서 이길 확률은 무(無)에 가까웠다.
“전에 말한 바 있을 것이다. 호위무사면 호위무사답게 집이나 잘 지키라고. 우리는 아직 양 부주의 수하가 아니니, 그의 명령 따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섬뜩한 미소였다. 미소를 그리는 표정과 달리,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기파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말도 했었지. 그따위로 노려보면 눈알을 뽑겠다고.”
“……!”
“다음은 네년 차례다. 순순히 대가리 내밀어. 눈알 뽑다가 머리통까지 뽑히면 안 되니까.”
화원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미친놈!’
이건 완전히 미친놈이 따로 없다.
광인(狂人), 광마(狂魔)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다. 제아무리 주군과 모종의 계약을 했다 한들, 묵룡부의 앞마당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저지르다니?!
“앞으로 와.”
연호정이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자신의 소유물을 내놓으라는 듯, 참으로 당당한 손짓이었다.
“대가리 내밀어라. 죽고 싶지 않다면.”
“……네놈이지?”
“대가리 내밀라고 했다.”
화원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네놈이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빼돌린 것 아니더냐!”
연호정이 퉁명스러운 투로 말했다.
“제 수하 꼴 나고 싶은 모양이군.”
“……!!”
“정 그걸 원한다면, 알겠다.”
연호정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화아아악.
선선한 바람에 끔찍한 살기가 실렸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사람을 밥 먹듯 죽이는 마두(魔頭) 정도는 되어야 뿜어낼 법한 광기 어린 살의다.
가득상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할까요?]
[나도 몰라, 이 거지 놈아.]
[저 양반 저거, 아무리 꾸민 살기라도 너무 살벌한데요? 진짜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저 살기가 꾸민 거라고?
‘그럴 리가.’
패율은 알고 있었다. 저런 살기는 절대 억지로 꾸며 낼 수 없다는 걸.
그것은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라도 마찬가지다. 저 살기는 내공으로 의념을 실어 퍼트리는 정도가 아니라,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른 자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살기였다.
‘쯧.’
저놈 자식, 대체 어떤 인생을 겪었길래 저리도 끔찍한 살기를 뿜을 수 있는 거지?
‘안 되겠군.’
패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잠시 기다리게.”
연호정의 발이 움찔했다.
패율이 그답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저 원숭이 같은 년이 마음에 안 들지만, 한 놈 잡아 죽였으니 이쯤에서 참는 게 어떤가.”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화원의 눈에도 고스란히 들어왔다.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역할은 원래 내 것 아니었나? 자네가 그렇게 날뛰니, 오히려 내가 찝찝해지는군.”
“…….”
“참게. 양 부주 얼굴도 봐야지.”
“……후우.”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스르르륵.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가 이전의 선선함을 되찾았다. 연호정이 살기를 지운 것이다.
그가 화원에게 말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화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호정이 쓰러진 원각의 시체를 걷어찼다.
퍼억!
어찌나 강하게 찼는지, 시체가 담벼락 밖으로 날아갔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시체다!”
담벼락 밖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이 오가는 길목에 갑자기 시체가 떨어졌으니 기겁할 만도 했다.
광기에 젖은 폭군의 행동이 이러할까. 그 과격한 행동에 패율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내심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지?”
“귀, 귀철…….”
무공을 연성하면 자연스레 정신력도 강해진다. 하지만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을 맞닥뜨렸기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왔다.
화원은 재빨리 목을 가다듬었다.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빼돌린 게 너냐?”
“너, 화원이라고 했었나?”
“……?”
“앞으로 또 나한테 찾아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제대로 확인조차 안 된 사항을 들고 오면 진짜로 찢어 죽인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욱 살벌함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실제로 이 미친놈은 눈앞에서 제 수하를 죽이지 않았는가.
화원이 이를 악물었다.
저런 말을 들었지만, 다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그렇다면 너는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모른단 말이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허탈함이 묻어 나오는 실소였다.
“어떤 놈이 그러더냐? 내가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감춰 뒀다고?”
“…….”
“아니, 그 이전에 귀철검문은 멸문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화원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알지?”
“뭘 어떻게 알아? 저잣거리 한 바퀴만 돌아도 절로 귀에 들어오더구만.”
“…….”
“멸문이라는 건 문파가 망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최소한 수뇌부부터 후계자까지 싹 죽었다는 거 아닌가? 후계자가 살아남았어?”
찌푸려진 얼굴, 모호한 눈빛.
화원은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상대의 얼굴에서 미약한 의아함을 읽었다.
‘뭐지? 정말로 모른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호정을 제외한 범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기도 시기였고, 워낙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은 놈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본 실력을 간파하진 못했지만, 부주님께서 크게 칭찬했던 인재라고 들었다. 그 정도면 상당한 무공을 연성한 고수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래서 몰아붙였다.
더 솔직히 말하면, 수하들이 다 죽은 울분을 풀고 싶기도 했다.
설마 그 선택이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래서, 내가 그 후계자인지 뭔지 하는 놈을 잡아갔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뭐지?”
“그건…….”
연호정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번만큼은 패율 역시 살기등등한 눈으로 화원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가득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왔군.”
화원은 아차 싶어서 표정을 수습했다. 물론 때늦은 수습이었다.
“그건 아니다! 분명 장사의 정보원들이 네가 수상쩍다고……!”
“나 외에, 또 수상한 사람은 몇 명이더냐?”
화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수상한 사람으로 지목된 놈들을 꼽아 보자면, 명단을 몇 개나 만들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기 때문이다.
가득상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흑도의 정보력이 백도보다 한 수 위라고 들었거늘, 이제 보니 정보력이 좋은 게 아니라 제멋대로 정보 조작이나 일삼는 놈들이었던 모양이네?”
“그건!”
“누가 그러더구만. 어느 마을에서는 사람들 기도가 반드시 하늘에 닿는다고. 비를 바라면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올리니, 성공률이 십 할이라고 했더랬지.”
“…….”
“당신들 하는 꼬락서니가 그거랑 다를 게 뭐야?”
그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이보쇼.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진짜 묵룡부주랑 거래할 거야? 내가 보기에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영 실속 없는 조직 같은데?”
“그러게나 말이오.”
연호정은 화원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지금 좀 후회 중이외다. 호위무사라고 붙여 준 놈들이 신경 거슬리게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거늘, 확신도 없이 범인으로 몰아간다……. 정보력 이전에, 양 부주는 제 수하 교육조차 제대로 못 하는 무능한 인물이었단 말인가.”
화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가 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설마하니 자신의 행동 하나로 부주님까지 그런 평가를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음일까? 화원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말조심해라! 이건 그저 나의 분풀이였을 뿐, 부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화원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발작적으로 외친 말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늦게나마 깨달은 것이다.
후욱.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호정의 살벌하기 그지없던 살기와는 다른 살기였다. 바로 패율과 가득상, 당상아와 제갈아연의 살기가 일시에 몰아치며 대기의 온도를 강제로 끌어 올린 것이다.
어느새 연호정의 표정은 담담해졌다. 그 눈빛까지도.
“오늘의 일, 그대로 양 부주에게 알리도록 하지.”
“…….”
“이만 꺼져. 네 휘하 부대도 전부 철수시켜라.”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화원이 도망치듯 장원을 나섰다.
후우우웅.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가득상이 혀를 찼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말이었는데, 저 꼬라지 보니깐 진짜 긴가민가하네. 생각보다 허술한 조직인 거 아냐?”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불당에서도 살인마가 나고, 도관에서도 도둑놈이 나는 법이다. 저런 년 하나 있다고 묵룡부를 무시해선 안 돼.”
“쩝, 그렇긴 합니다만.”
가득상이 의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그나저나 연 형. 귀철검문의 후계자는 무슨 소리야? 정말 연 형이 그랬어?”
연호정은 말없이 대문을 바라보았다.
화원의 인기척은 물론, 화원대 전원의 기척이 멀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