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17화 (217/963)

217화. 와신상담(臥薪嘗膽) (5)

“아직도 연락이 없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화원은 대놓고 얼굴을 찡그렸다.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화원대의 보고 간격은 최소 반 시진, 최대 한 시진을 넘기지 않는다.

그것은 화원대만이 아니었다. 십이지신의 모든 부대가 그러했다.

보고 횟수가 지나치게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묵룡부는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황,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돈과 인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보고 주기를 짧게 유지하는 것이다.

한데 한 시진을 넘어 반나절이 다 되도록 연락이 오지 않는다?

‘설마, 상대에게 당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흑양대가 생각보다 더 강했는지도 모른다. 화원 이 조가 속절없이 당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보고는 와야 정상이었다. 설마하니 이 조 전원이 한 자리에서 몰살이라도 당한 게 아닌 바에야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안 되겠다. 네가 직접 이 조의 흔적을…….”

그때였다.

“헉! 화, 화원님! 저기!”

화원이 고개를 돌렸다.

‘저놈?’

장원으로 이어지는 소로(小路)로, 청년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육 척이 넘는 키. 체격이 다부지진 않지만,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에서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꼬장꼬장한 문사의 기도가 묻어 나왔다.

연호정이었다. 새 의복으로 갈아입고, 제법 두툼한 봇짐까지 멘 그가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화원이 움직였다.

파라락!

건물 몇 개의 지붕을 밟고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선 화원의 신법은 그야말로 묘기를 보는 것 같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원숭이 같은 몸놀림이군.”

화원의 두 눈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어딜 갔다가 오는 거지?”

“알 바 아니다. 비켜. 피곤해.”

“당장 보고해라.”

“나는 네년 같은 상관 둔 적 없다. 거치적거리지 말고 저리 꺼져.”

상당히 거친 말투였다.

화원이 차갑게 웃었다.

“부주님께 듣지 못했나 보군. 나는 너희의…….”

“호위무사지. 호위면 호위답게 장원이나 똑바로 지키도록 해. 호위 대상 심기 거스르지 말고.”

“…….”

“친분 따위 없었던 사이이니 이번 한 번은 봐주마. 한 번만 더 주제 모르고 기어올랐다간 눈알을 뽑아 놓겠다.”

츠츠츠.

화원 뒤에 서 있던 그녀의 최고 심복, 원각(猿脚)의 몸에서 독랄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양천 휘하의 십이지신은 묵룡부 최상위권 고수요, 그 무위에 걸맞은 직위도 갖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애송이에게 이따위 말을 들을 위치가 아닌 것이다.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충성심 넘치는 수하로군.”

물끄러미 그를 노려보던 화원이 손을 들었다.

원각은 애써 살기를 억눌렀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주군의 명을 거스를 순 없었다.

화원이 물었다.

“봇짐 안에 든 건 뭐냐?”

“주제넘은 질문이군. 길이나 열어.”

“분명하게 말해 두마. 나는 일개 호위무사가 아니라 호위대장이다. 너희를 지키라는 명과 함께 감시하라는 명도 받았다.”

“그래서 뭐?”

“……감시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너희가 허튼 짓거리를 하면, 최악의 경우 너희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이상한 말이로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지, 우릴 죽일 능력은 안 되잖나?”

“뭐?!”

“우리는 양 부주와 거래 중이다. 그를 모실지, 걷어찰지는 며칠 뒤에나 결정될 거야. 즉, 우리는 아직 양 부주의 명을 따를 이유가 없다.”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양반이 그런 것도 말해 주지 않았나? 총애받는 수하인 줄 알았거늘,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군.”

순간 화원은 울컥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 자식이……!”

“하지만 뭐, 좋다.”

“……?!”

“앞으로도 종종 나갈 일이 있을 거야. 그때마다 실랑이하기도 피곤할 테고, 양 부주의 체면을 봐서라도 너희를 두들겨 패면 안 되니까.”

연호정이 봇짐을 풀었다.

화원의 눈이 깊어졌다.

‘옷?’

그렇다. 연호정이 들고 온 봇짐에는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의복 여러 벌이 들어 있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이 섞여 있었다.

“일행이 갈아입을 옷이다. 됐냐?”

“…….”

“비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지.”

화원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한 번만 더 보고도 없이 나갔다간, 그때는 호위대장의 재량대로 너희를 처리하겠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그래 주기를 바라네. 먼저 손을 써 준다면 너희를 박살 내도 양 부주가 아무 말 못 하겠지.”

화원이 차갑게 웃었다.

“부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그러게나 말이다. 네가 양 부주의 총애를 받았다면,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정신 나간 언사를 뱉지는 못했을 텐데.”

“……?!”

“나와.”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화원이 길을 열었다.

연호정은 말없이 소로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화원과 원각이 따랐다.

그때였다.

‘…….’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전음(傳音).’

공기가 희미하게 떨려 온다.

누군가가 화원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주변이 극도로 조용하고, 연호정의 감각 역시 어느 때보다도 날 서 있었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

스륵.

화원의 보행이 살짝 흐트러진 것이 느껴졌다.

사라락.

화원이 사라졌다.

연호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바쁜 일이 있나 보군. 자네도 주군 따라가지 그러나?”

원각은 말없이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이 연호정을 향했을 뿐, 실제로 그는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 물건을 쥐고 흔들던 놈들, 저 원숭이의 수하였던가?’

이거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만.

“어이구, 어디 갔다가 이제 오셨수?”

가득상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연호정을 맞았다.

연호정이 봇짐을 건넸다.

“만날 같은 옷 입으면 찝찝하잖소. 괜찮은 옷 몇 벌 구해 왔소.”

“잉? 아니 옷이야 단벌로 십 년은 입어야…….”

자신도 모르게 거지 근성이 철철 밴 말을 하던 가득상은 서둘러 목소리를 죽였다.

“커허허험! 어쨌든 고생했소. 얼마나 기깔난 옷을 구해 오셨나그래.”

가득상이 짐짓 능청을 떨며 봇짐을 챙겨 들고 거처로 들어가자 패율이 말했다.

“잘 다녀왔나?”

“그렇습니다.”

패율이 장원 대문을 힐끔거렸다. 원각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뭐냐, 저 잔챙이는?”

“그 원숭이 직속 수하입니다.”

패율이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나가라.”

그야말로 단도직입적이다.

원각은 말없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츠츠츠.

패율의 몸에서 흉흉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놔두시지요.”

“싫다. 내 영역에서 정체 모를 잡놈이 설치는 건 용납 못 해.”

“조금만 참으십시오. 먼저 건방 떨면, 그때 뽑아도 늦지 않습니다.”

묵묵히 연호정의 말을 듣던 패율이 원각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언제든 좋으니, 제발 덤벼 주길 바란다. 단칼에 목을 날려 버릴 테니.”

그 말을 끝으로 패율이 거처로 들어갔다. 원각이 꼴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연호정은 피식 웃었다.

“대단하신 분이야. 저렇게 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자신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따라 주는 게 어딘가. 약속을 했다곤 해도, 중원의 정서상 저렇게 일관적으로 숙이고 들어오기란 분명 쉽지 않았다.

그때, 원각이 물었다.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거지?”

“음?”

“당신이나 저 검객이나, 대체 뭘 믿고 그리 날뛰는 거냔 말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실력.”

“아오! 왜 이제 와!”

제갈아연은 상당히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 안 된 사이에, 제법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얼른 와서 조직 개편도 짜는 것 좀 거들어! 제기랄,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하는구만.”

“고생했다. 들어가서 좀 쉬어. 나머진 내가 할 테니까.”

“……그래도 돼?”

“그래. 머리 쓰는 게 보통 일이냐. 네가 한 작업도 살펴볼 겸, 오늘은 나 혼자 마무리할게.”

제갈아연이 입맛을 다셨다.

“또 그렇게 말하니까 쉬기 뭐하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서 좀 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니! 그 무슨 실례되는 말씀! 어? 근데 갔던 일은?”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잘 됐어. 앞으로는 일이 더 쉬워질 것 같아.”

“좋은 소식이구만!”

제갈아연은 침상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좀만 잘 테니까 한 시진 뒤에 깨워 줘. 머리 싸매는 일은 어지간하면 같이 하는 게 좋아.”

말릴 틈도 없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셋을 세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못 말린다는 듯 제갈아연을 보고 피식 웃은 연호정이 자리에 앉았다.

조직 개편도를 살피던 연호정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꽤 위험했다.’

흑양의 가면을 쓴 놈들을 모조리 박살 낸 후, 또다시 스무 명의 고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먼저 섬멸한 이들처럼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음험한 내공과 피 냄새 짙은 기세를 보곤 곧장 묵룡부 소속이라 확신했다.

‘설마하니, 그런 걸 들고 있을 줄이야.’

제법 살벌한 놈들이었지만, 그 정도 고수를 묻어 버리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이 들고 있던 물건이었다.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과 비슷했는데.’

폭우이화침.

사천당가가 자랑하는 극한의 암기 중 하나다. 당가 내에서도 선별된 고수가 아니면 건네지 않는 위험천만한 암기이기도 했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심심찮게 오발 사고가 나서, 암기와 기관에 대한 깊은 지식과 숙련된 경험이 필수였다.

연호정 역시 폭우이화침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엄청났었다.’

절정고수급이야 말할 것도 없고,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일지라도 경계를 늦추는 순간 폭우이화침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토록 위험천만한 물건이, 어찌 흑도의 무뢰배들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폭우이화침이 아니라, 그 비슷한 무언가긴 하지만.’

설마 묵룡부에서는 그런 물건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굳이 암기의 고수를 영입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지도 않았겠지.’

연호정이 입술을 매만졌다.

혹시 몰라서 하나를 가져오긴 했지만, 이걸 당상아에게 보여 줘도 될는지 모르겠다.

‘…….’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천천히 생각하자.”

지금에 와서 중요한 것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조직 개편도로 양천의 마음을 한 방에 사로잡는 것.

기실, 조직 체계야 흑제성을 세우며 수도 없이 고민했던 바이니 어려울 게 없었다. 중요하지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는 문제였다.

둘째, 강량.

뒤이어 온 스무 명의 고수까지 다 죽이고, 계곡 일대에 온갖 난잡한 흔적을 만들어 놓았다. 어지간한 전문가가 와서 봐도 두 집단이 싸우다가 공멸(共滅)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강량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야산 인근에 머물도록 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대해 머리에 쥐가 나도록 주입해 놨으니, 당분간은 잠잠할 것이다.

아마 이 일이 끝나고 나면, 그 녀석도 데리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믿는다.”

연호정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의 귀기 넘치는 눈빛이 떠올랐다.

“제대로 된 정보 하나만 만들어 봐. 단숨에 묵룡부의 심층부까지 치고 들어가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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