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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16화 (216/963)

216화. 와신상담(臥薪嘗膽) (4)

강량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누구지?’

실로 화려한 등장이었다.

얼마나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왔는지 의복 끝단이 마구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온전히 속도에만 집중해 달려왔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 힘은……?’

번쩍! 번쩍!

엄청난 공력을 운용해 흑양대를 와해시켰지만, 남은 공력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듯싶었다. 전신에서 일렁이는 진기가 번개 같은 광채를 발하며 흩어졌다.

강윤의 눈이 흔들렸다.

‘이자, 엄청나게 강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였다. 순간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위가 떠오를 정도였다.

경악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량을 보며, 연호정은 말 못 할 감상에 젖어 들었다.

‘이렇게 마주하는구만.’

오대신장은 하나같이 연호정을 깍듯하게 모셨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연호정보다 연상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모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면 마땅히 형님으로 모셔야 한다며 많은 이들이 연호정을 형님이라 불렀다.

하지만 강량은 실제로도 연호정보다 연하였다. 그래서일까? 사석에서도 유독 자신에게 깍듯했던 사람이 강량이었다.

그런 그와 이번 생에서도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호흡을 안정시켜라. 공력을 회복하기 전에 호흡부터 돌려놓아야 한다.”

“예……?”

“눈을 감고 혈행에 집중해. 근육 한 가닥, 한 가닥까지 피가 돌게 해야 한다.”

“자, 잠깐! 당신은……?!”

“뒤처지면 버리겠다.”

강량은 침을 삼켰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냉혹한 위엄이 느껴졌다. 그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할 것만 같은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제길.’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강량은 곧장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처음 본 사람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후우우욱.

강량이 호흡을 안정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연호정이 흑장을 노려보았다.

‘……!!’

흑장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고수!’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무형의 기파가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이 정도 고수가 어디서?!’

그때, 무지막지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흑양대원 다섯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흑장이 외쳤다.

“흩어져라!”

퍼버버벅!

때 늦은 외침일 뿐이었다.

순간 연호정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살아남은 흑양대원 전원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연호정이 손을 털었다. 손에 묻은 핏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파아아악!

흑장이 북쪽으로 신법을 펼쳤다.

‘이길 수 없는 상대!’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해 보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걸리면 죽는다. 흑양 휘하에서 가장 강한 고수라는 흑장조차도 연호정의 살기 넘치는 무공 앞에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파바바박!

계곡물을 박차며 나아가는 흑장의 신법은 놀랍도록 빨랐다.

‘일단 놈에게서 벗어나야 해! 주군께 보고부터…….’

그때였다.

“헉!”

타다닥!

흑장은 서둘러 신법을 멈추었다.

“……!!”

어느새 연호정이 그의 앞 오 장 거리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실력이 좋군.”

“…….”

“한데 말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무공, 아무리 봐도 흑도의 무공 같진 않은데.”

흑장의 눈이 흔들렸다.

“왜일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야. 신법에서 묻어 나오는 기괴한 진기(眞氣)……. 아예 중원 무맥(武脈)과도 궤를 달리하는 듯하군.”

스르르르.

날뛰던 공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두 눈에 어린 살기는 서서히 증폭했다.

“너, 그 무공 어디서 배웠지?”

우우우웅.

흑장의 양손에서 은은한 광채가 일었다.

도망칠 수 없는 상대다.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죽겠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죽음을 실감하는 그였다. 정말이지 이런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자신의 운명이라면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주군. 비록 소인은 이역만리에서 죽게 되었지만, 주군께서는 부디 대업을 이루시어 교(敎)의 큰 기둥으로 자리를…….’

화악!

‘헉!’

거대한 손 하나가 시야를 꽉 채우며 다가왔다.

손은 손인데, 도무지 손처럼 보이질 않았다. 마치 거대한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달려드는 듯했다.

파악!

고개를 숙인 흑장이 양손으로 연호정의 손목을 잡아챘다.

‘부절박(剖絶搏)!’

손목과 팔뚝을 붙든 채 상대의 팔을 그대로 접으며 초근접 거리로 치고 들어간다. 우측 무릎으로 고간을 올려침과 동시에 단련된 이마로 상대의 얼굴을 노린다.

물 흐르듯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수천, 수만 번을 연마하여 완벽하게 체득한 체술이었다.

퍽! 빠각!

“컥!”

흑장은 눈앞이 번쩍거리는 걸 느꼈다.

일순간 정신이 날아가 버릴 만큼의 격통이 전해졌다. 상대의 콧대를 으스러트렸어야 할 이마가 오히려 반으로 쪼개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호.”

연호정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어디서 많이 본 무공이다 싶었더니만.”

우두둑.

“크윽!”

날아갔던 정신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끔찍한 통증이 느껴진 탓이었다. 상대의 고간을 노린 무릎이 똑같은 슬격(膝擊)에 완전히 부러져 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도 한 손으로는 끝까지 연호정의 팔뚝을 붙들고 있었다. 굉장한 의지였다.

연호정이 팔을 거칠게 회전시켰다.

우두두둑!

“크아악!”

억지로 팔뚝을 쥐고 있던 오른팔이 팔꿈치부터 부러져 버렸다.

내공이나 힘으로 부순 게 아니었다. 역관절로 인대를 찢고 뼈를 부쉈다. 인체의 구조에 지극히 정통한 자가 아니면 선보일 수 없는 환상적인 한 수였다.

“이름이 아마 부절박이라고 했던가?”

무지막지한 고통에 비틀거리던 흑장은 깜짝 놀랐다.

‘부절박을 알아?!’

터억!

“켁!”

흑장의 몸이 허공에 떠올라 대롱대롱 흔들렸다. 연호정이 그의 목줄을 잡아 쥐고는 들어 올린 것이다.

‘위험!’

멀쩡한 왼팔로 두부(頭部)를 가격하려던 찰나였다.

츠츠츠츠.

음험한 살기가 자욱한 안개처럼 몰려들었다.

흑장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팔만사천 모공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살기가 사지의 움직임을 결박해 버린 것이다.

그때, 연호정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너, 셋 중 어디냐?”

“……?!”

“사음(邪淫)이냐, 아니면 광혈(狂血)이냐? 그도 아니면 신화(神火)냐?”

“헉!”

흑장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연호정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맞구나, 너?”

“어, 어떻게 우릴?!”

“글쎄다. 어떻게 알았을꼬.”

화르르르륵!

어느새 사위를 뒤덮은 살기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거칠어졌다.

환하게 미소 짓던 연호정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너희 그 개 같은 놈들 때문에 이만저만 피해를 본 게 아니라서 말이다.”

불타오르는 증오. 폭발하기 직전까지 솟구친 분노.

흑장의 귀에만 들리도록 내력을 조절했지만, 너무 반갑고 화가 난 나머지 순간 목소리가 커질 뻔했다. 평소 냉정하고 계산적인 연호정답지 않게 실수를 저지를 뻔한 것이다.

“정말이지 너무 반갑군.”

연호정이 흑장을 그대로 패대기쳤다.

콰아앙!

치솟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흑장은 전신의 뼈마디가 모조리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누구지.’

흐려지는 정신 속, 흑장은 억지로 눈을 떠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누구길래 우리를…….’

순간 흑장은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하하하하!

호탕하기 짝이 없는 웃음소리가 아릿하게 들려온다.

환희와 분노를 참지 못한 흑도대종사의 광소였다. 하늘을 보며 우렁찬 웃음을 터트리는 연호정의 모습에서는 광기마저 엿보일 정도였다.

흑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뒤로, 무시무시한 기파가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친!’

광마(狂魔)다. 미친 마귀가 따로 없었다.

교(敎)에서 가장 폭급하고 잔혹하다는 마귀의 부대가 떠올랐다. 그 광기 어린 학살자들도 눈앞의 이 청년보다는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을 듯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폭소를 터트린 연호정이 웃는 낯으로 흑장을 내려다보았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지만, 두 눈에서는 용암이 폭발하고 있었다.

“우리, 할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구나.”

연호정이 그대로 흑장의 단전을 밟아 버렸다.

퍼억!

* * *

강량은 침을 꼴깍 삼켰다.

“호흡은 다 골랐나?”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연호정의 손에는 걸레짝이 된 흑장이 들려 있었다.

‘미친.’

흑장의 육신은 참혹하게 박살 나 있었다. 어찌나 지독하게 당했는지, 의복이 아니었다면 사람인지 짐승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으며 흑장을 내려놓았다.

“제법 강단 넘치는 놈이더군.”

털썩.

쓰러진 흑장의 입에서 기괴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강량은 헛숨을 집어삼켰다.

‘안 죽었어?!’

저 꼴이 되어서도 아직 명줄이 붙어 있었다. 적이지만 상대가 불쌍해질 정도였다.

“몸은?”

“예? 아!”

강량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뉘신지 모르겠지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갚아야지. 나는 대가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야.”

오만함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강량은 상대의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만일 선의로 그랬다 하면 오히려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제 일이 끝나면, 반드시 찾아뵈어 보은을…….”

“그 일이라는 게 뭔데?”

“예?”

“네 일이라는 게, 귀철검문을 멸문시킨 양천을 잡아 죽이는 거 아니냐?”

강량은 깜짝 놀랐다.

“그, 그걸 어떻게……?”

생각해 보니, 이자는 전권에 난입하자마자 곧장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나에 대해 알고 있다?’

진즉에 생각했어야 할 부분이었다. 경황이 없어서 순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강량의 얼굴에 경계심이 드리워졌다.

그 표정을 보며, 연호정은 피식 웃었다.

‘참으로 솔직하군.’

품고 있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애초에 누군가를 속이는 데에 재능이 없는 놈이었지만, 이 정도로 애송이처럼 굴 줄은 몰랐다.

“헛소리 그만하고 시신들을 한데 모아라. 흔적을 지워야겠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든가.”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당신, 묵룡부 측 사람입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묵룡부 측 사람이면 굳이 이놈들을 다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혹시 또 모르잖습니까.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잡아 공(功)을 독차지하려는 속셈인지도…….”

“아군을 죽이는 무리수까지 둬 가면서? 내 실력이면 그냥 널 납치해 버리면 되는 문제인데?”

“……!”

강량은 우물쭈물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긴 하다.

연호정이 시신들을 한데 모으며 말했다.

“나는 묵룡부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놈들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사람이지.”

“예?”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얼른 시체나 모…….”

그때였다.

허리를 편 연호정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것들 봐라?”

강량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

“은공(恩公)?”

“묵룡부에서 또 사람을 보낸 모양이다. 살기가 꽤 독하군.”

“예? 헉! 설마 또 적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어.”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功)을 가로채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머저리들의 축제 말이다. 그 발상, 아주 마음에 들어.”

스르륵.

연호정이 흑양대원 하나의 가면을 뒤집어썼다.

“일이 생각보다 쉬워지겠다. 너, 제대로 따라붙어라. 못 쫓아오면 버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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