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와신상담(臥薪嘗膽) (1)
객잔 뒷문으로 나온 연호정이 모용군에게 말했다.
“처음이라 괜찮겠지만, 다음부터는 직접 올 일이 많지 않을 거요.”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천이 자네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한다면 떨쳐 내기 힘든 눈을 박아 두겠지.”
“지금도 그렇소. 오늘이야 허를 찔렀지만, 다음에도 이런 수가 통할지는 모르겠소.”
“통한다 해도 무리하지는 말게. 자네 말을 들어 보니, 양천 역시 보통 여우가 아닌 듯싶군. 괜한 행동으로 의심을 사는 일은 없도록 하게.”
“명심하겠소.”
“연락은 개방을 통하면 되겠는가?”
“그게 가장 무난할 거요.”
“알겠네. 건투를 빌지.”
“당신도 고생…….”
그때였다.
연호정의 눈에, 객잔에서 북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골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골목의 가운데, 시커먼 피풍의를 뒤집어쓴 사람 한 명도.
‘……!!’
연호정의 표정이 돌변했다.
의식으로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다. 그의 눈에 절로 놀라움이 어렸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그의 시선이 연호정을 따라 돌아갔다.
‘……?’
어두침침한 골목에는 벽에 기대앉은 비렁뱅이 서넛이 있을 뿐이었다.
모용군이 물었다.
“왜 그러시는가?”
“……아니오.”
연호정이 애써 담담한 표정을 고수했다.
모용군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오호?’
그는 처음 보았다. 연호정이 애써 당황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연기하는 모습을.
물론 그간 자신과의 싸움에서 무수히 많은 연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처럼 어색한 표정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용군의 묘한 눈빛. 연호정은 그가 자신의 당황을 읽어 냈다는 걸 깨달았다.
‘제기랄.’
순간적으로 빈틈을 보였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해 봤자 이제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었다.
“그럼 이만 가겠소.”
“그래, 살펴 가시게. 정보가 완성되면 즉각 연락도록 함세.”
“하면 이만.”
연호정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등을 좇는 모용군의 시선이 느껴졌다.
‘별수 없다.’
상대가 이쪽에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 하지만 모용군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닌바, 자신이 드러낸 이 빈틈을 어떻게든 파헤쳐 보려고 할 것이다.
스르륵.
연호정이 오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대단한 은신술이로고.”
내공을 써서 기척을 죽인 것도, 무공 자체가 은신에 특화된 암살자의 무공인 것도 아니다.
그저 서서히 기를 감추다가 인파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인지 능력을 농락하는 최고급 은신술 중 하나였다.
“자네는 대체 어디서 그와 같은 술수를 익혔는가? 참으로 궁금하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식견과 무공도 그렇고.”
가만히 웃으며 북서쪽 골목을 주시하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무연(無煙).”
객잔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주군.”
“자네도 봤겠지?”
“그렇습니다.”
무연은 모용세가에서, 정확히는 모용군이 휘하에 둔 최고의 은신 전문가였다.
무림맹 내에서는 쉬이 운용할 수 없는 인재였다. 워낙 고수가 많은지라 존재를 들키는 순간 이쪽이 추궁당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세상에 나온 이상, 무연만큼 힘이 되는 존재가 또 없을 것이다.
“연호정 그놈 역시 자네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네. 다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
“하나, 자네가 조심히 움직이면 천하제일의 후기지수라도 어찌 자네의 은신술을 간파해 내겠는가.”
웃음기 가득하던 모용군의 두 눈이 일순 시퍼런 한기를 쏟아 냈다.
“쫓아가게.”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모용군의 소맷자락을 펄럭였다.
모용군은 자신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무연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 역시 무연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기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탁 트인 공간에서 작정하고 은신술을 펼치면 그조차 무연의 존재감을 잊을 때가 많았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무연의 미행을 알아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허허허, 역시 사람은 한 번씩 속세의 공기를 맡아 줄 필요가 있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재미를 느낄 수 있거든.”
모용군은 히죽 웃으며 객잔으로 들어갔다.
이제 열심히 일할 시간이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날씨 한번 좋구나!”
* * *
스르륵.
흑의인의 보행은 독특했다.
물론 그것은 무공에 정통하고 식견이 뛰어난 자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보기에는 별다른 것 없이 평범하지만, 교차하는 양발 끝이 독특한 박자로 지면을 찍는다.
언제 어느 때라도 폭발적인 움직임을 낼 수 있는 고수의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걸음걸이가 워낙에 산뜻하고, 펑퍼짐한 피풍의가 전신을 가리고 있어서 보행 자체에 시선이 가진 않는다.
음침하다면 음침한 외양. 그러나 강호에서 이런 차림의 낭인무사는 너무도 흔했다.
독특하지만, 동시에 전혀 튀지 않는 자.
‘분명 여기서 남서쪽으로 십 리라고 하였지.’
사람 많은 장사(長沙) 중앙부를 빠져나와 근교에 들어섰다.
근교만 해도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사람보다는 탁 트인 정경과 수려한 산세가 오히려 눈에 띄었다.
흑의인의 눈이 흔들렸다.
‘악록산!’
악록산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딘지 모르게 느긋하면서도 담백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산이었다.
그 담백함, 여유.
중원의, 나아가 무림의 역사를 한 몸에 담은 고즈넉한 모습이 흑의인의 마음에 파랑을 일으켰다.
스스스.
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렁였다.
거칠고도 거친 기파였다. 애써 억누르고는 있지만, 참을 수 없는 격동이 치솟는 살의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
흑의인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거칠게 일던 살기가 빠르게 잠잠해졌다. 순간의 격동을 참지 못해 살기까지 뿜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만일 자신이 이보다 더 강했다면.
아니, 아버지의 말씀대로 검문(劍門) 최고의 비기(秘技)를 선행 학습했었다면.
그랬다면 적장을 잡기 전, 그 수하 놈들의 목을 날려 이 울분을 만분의 일이라도 풀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원수를 죽여 두 분 가시는 길이 팍팍하지 않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주르륵.
기어이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부모와 형제를 죽인 자, 말하자면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다.
이 눈물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놈을 죽인 이후에 흘리겠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찌 그리 독하기만 하겠는가. 죽은 부모와 형제를 떠올리자, 그리고 부모와 형제를 죽인 이가 숨어 있는 곳을 보면서도 나설 수 없는 현실을 깨닫자 비참함이 극에 달했다.
‘그래도 한 번 봤으니 되었다.’
수하들의 만류를 떨쳐 내고 일부러 온 길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고작 그게 전부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흑의인에게 있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보아야 알고, 들어야 이해하며, 느껴야 체득한다. 그것은 비단 무공에만 국한된 진리가 아니야. 훗날 네가 세상에 나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을 우선시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보고 들은 것을 마음에 담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가르침은 무엇 하나 놓쳐선 안 될 만큼 중요한 것들뿐이었다.
타고난 재능에 도취했던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 중 상당 부분을 행하지 않았다. 굳이 그대로 따르지 않아도 발전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야 그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어머니의 조언은 재능 따위로 대체할 수 없는 보물들이었다. 무인이라면,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행해야 할 귀한 가르침이었다.
‘죄송합니다.’
그 귀한 가르침을, 정작 부모를 잃은 뒤에야 따르고 있었다.
한(恨)스러웠다. 그리고 그 한은, 적을 향한 증오를 기하급수적으로 키웠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내 다시 돌아와 검을 뽑는 그 날, 네놈이 그간 쌓아 둔 모든 것을 허물어트릴 것이다.’
이를 바득바득 간 흑의인이 장사의 동부 외곽으로 빠졌다.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숲을 헤치고 나와 작은 계곡의 입구로 들어섰을 때였다.
‘…….’
흑의인의 걸음이 멈추었다.
짹짹. 짹짹짹.
새가 지저귀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함을 선사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그만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풍경도 좋았다.
하지만 흑의인은 느꼈다. 자신에게 집중된 강렬한 악의를.
맹수의 노린내처럼, 바람을 타고 흐르는 날카로운 살기를 느꼈다.
철컥.
흑의인의 왼손이 요대의 검집을 잡았다.
“나와.”
짹짹.
살기가 강하면 가장 먼저 짐승이 반응한다. 새가 지저귈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흑의인은 알 수 있었다. 이 새소리마저도 거짓된 연출의 일부분임을.
스르륵.
흑의인이 자세를 낮추었다.
언제, 어느 방위로도 검을 내칠 수 있는 자세였다. 게다가 자세의 안정성이 무척이나 높아서, 그 낮은 자세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사박사박.
북쪽의 수풀을 가로질러 다가오는 사내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귀철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더니, 용케도 살기를 읽었어.”
흑의인, 강량이 물었다.
“묵룡에서 왔느냐?”
“……묵룡이라?”
미소 짓던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 빠른 변화에 강량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전의 표정은 가면을 쓴 것이었던가? 마치 피부 한 겹을 떼어 내 버린 것처럼 급작스러운 표정 변화였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표정, 그리고 눈빛.
그 표정만으로도 강량은 사내가 버거운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묵룡의 이름은 허락된 자들에게만 들려준 것. 허락받지 않은 자가 묵룡의 이름을 입에 담은 이상,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개소리.”
스륵.
또 한 번 표정이 바뀌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표정이었다.
표정의 변화에 중간 과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마치 변검을 하는 것 같달까.
기도를 드러낸 것도 아니요, 눈빛이 유독 날카로운 것도 아닌데 기묘한 위화감을 주는 사내였다. 아예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안심하게. 자네가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면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
츠츠츠.
강량의 몸에서 살벌한 예기가 피어올랐다.
더 이상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숲 사방에서 흑색 무복을 입고 가면을 쓴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나같이 양의 탈을 쓴 이들. 흑색 양의 가면은 묘하게 섬뜩했다.
사내, 흑장(黑長)이 말했다.
“꿇어라.”
강량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만 묻자. 배신자 놈, 아니 용화명(龍畵明)은 어디…….”
“마지막 제안이다. 꿇어라.”
타협의 여지도, 정보를 제공할 생각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싸움뿐이다.
강량의 두 눈에서 요악한 살기가 뿜어졌다.
“나도 마지막으로 제안한다. 부디 한꺼번에 덤벼라. 일일이 모가지 치러 가기 귀찮으니까.”
흑장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죽여라.”
파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