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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12화 (212/963)

212화. 거짓된 왕 (6)

“부주님을 뵙습니다.”

“왔나.”

넙죽 절을 올리는 흑양을 보며 양천이 물었다.

“얘기는 들었다. 귀철검문을 날려 버렸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후계자 놈 하나와 잔챙이 몇을 놓쳤다고 하던데.”

흑양이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확실히 괜찮은 놈이란 말이야.’

그는 흑양이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놓친 이유까지 보고를 받았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양과 그 수하들이 귀철검문을 습격하던 당일, 검문의 후계자는 심산 수련에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건 검문 측의 배신자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런 경우는 그 배신자 놈을 족칠 일이지, 흑양에게 뭐라 할 일이 아니었다.

즉 충분히 변명할 수 있음에도, 흑양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나쁘지 않은 성정이다. 만일 흑양이 교에 충성하지 않았다면 진정 크게 썼을 것이다. 어쩌면 백서와 함께 자신의 오른팔 자리에 앉혔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추격조를 편성하여 후계자를 뒤쫓고 있습니다.”

“귀철검문의 후계자가 무공이 제법이라고 들었거늘.”

양천 정도 고수가 까마득히 어린 신진의 무공 수위까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가 흑도를 규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보와 지식을 습득했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추격조의 보고로는 능히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합니다.”

“호오?”

목표물을 놓쳤다면, 보통은 목표물의 능력을 낮춰 보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윗사람을 안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흑양은 실로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 그대로를 보고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양천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호선을 그렸다.

“잡을 수 있겠느냐?”

흑양은 즉각 대답했다.

“잡을 수 있습니다.”

대답이 곧바로 나온다.

객관적인 보고가 선행되었기에, 그 확신에 찬 대답만으로도 믿음이 간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철검문은 흑도제일검문 소리를 듣던 방파다. 일이 한 번에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그러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안다.”

“송구합니다.”

“후계자 놈,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강량이라 합니다.”

“그래, 강량. 듣기로, 그놈은 무공만큼이나 성정 또한 대담하다고 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될 수도 있으니 반드시 잡도록 하라.”

“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보통은 대화가 이 정도까지 진행되면 물러가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양천은 말이 없었고, 덕분에 흑양은 그 자세 그대로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물러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갈 순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흐른 후.

“흑양.”

“예, 부주님.”

“기억나느냐? 내가 묵룡부를 창설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녀석이 새외에서 보낸 수많은 보화(寶貨)와 함께 내게 왔을 때.”

흑양의 눈이 빛났다.

“기억합니다.”

“참으로 놀라웠더랬지. 도움을 준다는 소리는 들었다만, 설마하니 그만한 자금과 인재를 지원해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느니라.”

“…….”

“혹 알고 있느냐? 그때 네 녀석이 갖고 왔던 무수히 많은 재물과 정보 중에, 묵룡부의 조직 체계에 대한 조언도 있었다는 것을.”

“……그건 몰랐습니다.”

“그러냐?”

“예.”

양천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개를 조아린 흑양은 볼 수 없는, 아주 차갑고도 독한 시선이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도록.”

“물론입니다.”

“이만 나가 보아라.”

“예.”

한 차례 절을 올린 흑양이 묵룡전을 나섰다.

양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모양새가 다소 나쁘더라도 약은 수까지 쓰는 자를 이기기 힘들다는 게지.”

양천은 선을 넘는 인재를 좋아했지만, 그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그 스스로가 쉬이 선을 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본인이 잘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인재들을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양천은 이제야 깨달았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얻기 힘든 세상이니.’

사음, 흑양, 보화.

그 선물이라는 것들의 이면에 숨겨진 강렬한 악의.

“정.”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혹여 네놈 역시 모종의 단체에서 보낸 독 묻은 비수라면, 그때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 * *

“허어.”

모용군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 무모한 방법이 통했다고?”

“그렇소.”

연호정에게 그간의 얘기를 전해 들은 모용군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단순하게 움직여서 들어가 버렸군.’

투왕 양천이 이끄는 새로운 흑도 연맹.

그곳으로 침투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장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리기가 막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용군은 달랐다. 그는 발상의 전환을 좋아했고, 어떻게든 적측의 심장부에 파고들어 무림맹 소속임을 숨길 수만 있으면 된다고 보았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한 수였다. 문제는 난이도였다.

적진의 위치가 어디인지, 얼마나 많은 고수가 진을 치고 있는지, 얼마나 경계가 삼엄한지 등등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세작을 파견하는 것은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안전하게 파견할 방법이 나온다. 모용군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연호정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드러났다.

“적의 흥미를 끌고 존재감을 각인시킨 후, 곧장 상부로 들어가는 길을 뚫었다…….”

단순하다. 너무 단순해서 기가 찰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단순한 한 수가 너무나도 잘 먹혀들었다.

“자네는 언제나 내게 놀라움을 안겨 주는군.”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소. 마음을 먹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이오.”

“물론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거기에 하나 더.”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흑도에 관해 잘 알지 못하면 언감생심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수법이기도 하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언제부터였나? 흑도로 눈을 돌린 것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잡아떼기인가? 맹에 전달된 보고서, 그리고 방금까지 들었던 일련의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자네는 흑도에 대해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외다. 오히려 흑도에 관해서는 나보다 후개가 더 잘 알 거요.”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괜한 의심에 심력 소모하지 마시오. 나는 그저 사람의 본질을 들여다봤을 뿐, 흑도에 대해 특별히 잘 알고 있는 건 아니니까.”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가.”

이번만큼은 모용군도 연호정의 속내를 읽기 힘들었다. 연호정 말마따나 오히려 흑도에 관해선 가득상이 더 잘 알 것이고, 그간 봐 온 연호정의 능력이라면 이번 침투전이 크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도무지 그냥 넘길 수가 없단 말이지.’

분명 뭔가가 있다. 이놈은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뭔가로 확신을 가진 채 일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실무조 일행들도 모르는 것이리라.

“하나만 더 묻지.”

“취조받으려고 온 거 아니외다.”

“흑도에 관해서는 뭐, 그렇다고 치세.”

모용군의 눈이 위협적인 안광을 뿜었다.

“자네, 설마 양천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양천 모르는 무림인이 있소?”

“내 말의 뜻을 모르지 않을 텐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쓸데없는 의심이오. 나는 내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소. 세운 지 얼마 안 된 흑도 연맹이 인재 부족에 시달릴 것은 자명한 일, 나 정도 인재가 굴러 들어오면 경계를 하면서도 흥미를 갖는 것은 당연하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의심이라고 한 적은 없네만?”

“눈 가리고 아웅이오?”

“허허허.”

기어이 웃음을 터트린 모용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좋네. 지난 얘기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는 미래에 대해 논해 보도록 하세.”

“상부에서 원하는 정보가 무엇이오?”

“음? 그건 이미 알고 있잖나? 자네가 그런 것도 모르고 예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양천의 노림수, 그의 조력자 유무, 묵룡부의 실질적인 전력 등등 모든 걸 알아봐야지.”

“그래, 잘 알고 있구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정말 그게 전부요?”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외에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겠지.”

“흐음.”

“자네 말대로, 맹은 양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원한다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지. 더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할 구석이 있다면, 그건 그때 말해 줌세.”

“알겠소.”

“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할 참인가?”

“어떻게 하긴. 그의 심복이 되어야지.”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자네가 그쪽 길을 택하리라 예상은 했네만.”

“그럴 것 같았소.”

“위험하지 않겠나?”

모용군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네는 어디까지나 무림맹 소속의 멸사군장이야. 세작이 본업이 아니란 말일세.”

“알고 있소.”

“양천도 바보가 아닌 바에야 신진(新進)을 곧장 심복으로 두는 악수를 두진 않을 걸세. 자네를 계속 관찰하고, 일도 하나씩 맡겨 보겠지.”

“그렇겠지.”

“즉, 자네가 양천의 진짜 심복이 되기 위해서는 못해도 한두 해는 걸릴 거란 말일세.”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그건 절대로 불가하네. 자네와 정쟁(政爭)을 벌이는 나지만, 그래도 안 돼.”

정적을 외부 세력으로 보내 죽이는 계획?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하나, 그것이 양천 정도 되는 인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심지어 양천은 흑도를 규합하고 있다. 백도의 적은 흑도고, 흑도 역시 백도를 넘어서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백도 측 인사를 보내 상대 손에 죽게 한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한발 더 나아가.

‘이놈은 위기 상황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놈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연호정이 흑도를 쥐고 흔들 결심까지 하게 되면?

‘그리되면 골치가 이만저만 아파지는 게 아니겠지.’

지나친 비약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모용군이 본 연호정은 한계라는 게 없는 놈이었다. 천성이 그런 건지 젊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이놈은 작정만 하면 진짜 선 없이 날뛰는 괴물이 될 것이다.

그런 놈을 상대 진영에서 죽게 할 수는 없다. 죽어도 백도 무림 내에서 죽어야 한다.

그것이 모용군의 생각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의 밑에서 몇 년씩 썩을 각오는 없소. 당연하지. 흑도를 집어삼키려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정보 좀 얻어 보겠답시고 몇 년을 썩는 건 가당찮은 소리올시다.”

흑도를 집어삼킨다는 말에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말은 심복이라 했지만, 그보다는 동업자의 관계라고 해야겠지.”

“동업자?”

“그렇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게 있다고 이쪽 패를 깔 생각은 없지만, 되도록 빨리 뽑아 먹으려면 우리도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건 나도 동의하네.”

“해서, 우리 쪽 정보를 토대로 이것저것 만져 볼 생각이오.”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맹의 정보를 흘리겠다는 말인가?”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지휘권자께서 허가만 내주신다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소.”

“하면?”

“조작된 정보를 원하오.”

“조작?”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모용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들어나 보지.”

연호정은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났을 때, 모용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통하겠나?”

“통하도록 만들어야지. 이게 통하느냐 마느냐는 내 노력 이전에 지휘권자인 당신 역량이오.”

“…….”

“할 수 있겠소?”

모용군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어디 한번 해 보도록 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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