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거짓된 왕 (3)
“이번 수금은 이 정도입니다.”
“음.”
문서를 훑어보던 곡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늘었군.”
“세상 모든 대업의 근간에는 자금이 있습니다. 자금이 확보되지 않은 대업은 곧 힘없는 정의를 부르짖는 것과 같지요.”
“자네 말이 맞네.”
“앞으로 수금량을 오 푼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점진적으로, 그러나 올릴 땐 확실하게 올려 줘야 윗선에서도 눈길을 줄 테니까요.”
“음, 그렇지.”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문사가 미소를 지었다.
“많이 답답하신 모양입니다.”
곡명이 입맛을 쩍 다셨다.
“충분한 시간을 들이는 것 또한 자금만큼이나 중요한 법이지. 하지만 조바심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구먼.”
문사가 고개를 숙였다.
“이전에 말씀드렸듯, 쉽게 얻은 힘은 잃어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 법입니다. 묵룡부는 그간 우후죽순처럼 일다가 사라진 여느 흑도 연맹과는 다릅니다. 부의 중추로 자리 잡기 위해선 꾸준함이 필수지요.”
“나도 아네. 아는데도 조바심이 나는 것을 어쩌겠는가.”
“부디 저를 믿고 조금만 더 인내해 주십시오. 지금껏 무수히 많은 소인배가 인내심이 부족해서 무너졌습니다. 저는 문주님께서 흑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는 분이라 믿습니다.”
곡명이 헛기침을 했다.
자신을 띄워 주려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울컥 올라올 때면 수하의 격려가 제법 큰 힘이 되어 준다.
“하기야, 조바심 낸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지. 그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문사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천안보(千眼堡)는 흑도에서도 제법 유명한 정보 문파였다.
그러나 그 유명세가 오히려 천안보의 능력이 애매한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흑도의 진짜 실력 있는 정보단은 대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다만 천안보가 유명한 이유는 정보력만이 아니었다.
바로 자금이었다. 천안보는 정보 외에도 불법 사업으로 상당한 자금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천안보의 무력 역시 상당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흑도엔 유독 자금을 노리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신경 써야 할 걸세.”
곡명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일 순위는 아니어도 괜찮아. 그러나 우리보다 못한 놈들보다 뒤처져서는 아니 되네.”
문사가 고개를 숙였다.
“만일 본보보다 먼저 묵룡에 드는 문파가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방파를 결딴내 버리겠습니다.”
“좋아.”
곡명이 미소를 지었다.
믿음직한 수하였다.
기실, 이 수하가 자신에게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반년 정도일까. 하지만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오른팔로 삼아 버렸다.
똑똑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에게는 다른 수하들에게는 없는 기품과 지혜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파격적인 대우는 금세 빛을 발했다.
“오늘도 고생했네. 나는 먼저 가지.”
“고생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십 층이나 되는 건물 꼭대기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곡명의 눈이 드물게 진지해졌다.
“본보는 정보 단체야. 우리가 호남성 최북단에 있는 이유를 잊어서는 아니 될 걸세.”
북부를 향한 경계.
자금을 모아 묵룡부에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보 단체로서 북부를 경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묵룡부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아예 묵룡부의 명령을 받고 하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놈이 보이면 무조건 개미들을 붙여라. 절대로 놓쳐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대답을 듣고도 한참이나 창밖을 보던 곡명이 몸을 돌렸다.
‘후우, 오늘은 좀 취하고 싶군. 오랜만에 술이나 거하게…….’
순간 곡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온몸의 털이 바짝 섰다.
입 안이 마르기 시작하고, 등허리는 축축해졌다. 소맷자락 속에 감춰 둔 철조(鐵爪)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것은 강제(强制)였다.
상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상대를 온전히 인식하는 순간 수염 한 톨까지도 경직되어 버렸다.
“흐음.”
느닷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문사 역시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헉!’
두 사람이 서 있는 십 층 건물 꼭대기 층.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의 한쪽 구석, 탁자에 걸터앉아 방금까지 곡명이 살폈던 문서를 훑어보는 중년인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외양이었다.
완벽하게 갖춘 의관. 걸친 옷도 상당히 화려했다. 거의 보의(寶衣)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요대에는 그 화려한 옷차림과 대비되는 새카만 장검을 차고 있었다. 길고, 두께도 상당한 그 검은 날렵하다기보다는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누, 누구?!’
문사는 흔들리는 눈으로 곡명을 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곡 보주가 이길 수 없는 상대!’
곡명의 얼굴은 극심한 긴장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만일 상대할 만한 자였다면 진즉에 철조를 빼 들어 상대를 난자했을 것이다.
‘누구지?’
대체 누구기에 절정고수인 곡명의 감각을 피해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굉장하군.”
중년 사내의 목소리는 참으로 듣기가 좋았다.
낮게 깔리는 저음. 습관인 듯 드리워진 웃음기가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물론 두 사람의 감상은 달랐지만.
“고작 이름 좀 알려진 정보 문파에 불과한 녀석들이 매달 벌어들이는 수익이 이 정도나 된단 말인가? 허허, 새삼 우리가 너희를 얼마나 얕잡아 봤는지 깨닫게 되는구나.”
사내가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탁상공론이란 말이 생기는 게지. 밟으면 밟는 대로 납작하게 짓눌려 죽을 놈들이라 생각했거늘, 알고 보니 흔한 벌레가 아니라 독충이었단 말이지?”
독충.
참으로 거슬리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곡명도, 문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시 시선을 내린 중년 사내가 들고 있던 문서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퉁!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문서 뭉치가 탁자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위압감이 넘쳤던 것이다.
중년 사내의 눈이 마침내 곡명에게로 향했다.
‘흡!!’
곡명은 순간 숨을 멈췄다.
번쩍! 번쩍!
자신을 보는 중년 사내의 안광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섬뜩했다.
흑백이 또렷한 맑은 눈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그 맑은 눈 속에 깃든 흉포하기 그지없는 야심은 마주한 이에게 만근의 압력을 선사했다.
‘……괴물이다.’
곡명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이 자는 괴물이야!’
내공을 발산한 것도 아니요, 칼을 뽑아 실력 행사에 들어간 것도 아니다.
그저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지극히 위험한 부류라는 것을. 그리고 품고 있는 흉포함만큼의 무공까지도 쌓아 두고 있다는 것을.
놀랍게도, 곡명은 상대의 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화의 그림자를 보았다.
지금껏 만나 본 어떤 고수보다도 막강한, 인간으로 태어나 신(神)의 반열에 오른 최강자의 그림자를.
‘부주님?!’
그렇다.
중년 사내에게는 곡명이 본 최강의 무신, 양천과 유사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실력? 그건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열등한 것은 우월한 것을 가늠할 수 없는 법, 무지막지한 고수라는 건 분명하지만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이자, 부주님만큼이나 위험하다!’
신선제왕의 일인, 투왕 양천.
이 이름 모를 중년 사내의 위험성은 그 절대자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엄청났다.
무공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 자체가 품고 있는 야망, 그 야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준비가 된 절제 없는 흉포함 때문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정보를 다루며 얻게 된 직감의 눈.
그 뛰어난 안목이, 하필이면 이런 피할 수 없는 위험의 순간에 발휘될 줄이야.
“참으로 흥미로운 놈이로다.”
중년 사내,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간덩이는 요만한데, 품은 이상은 높구나. 거기까지야 주제 모르는 놈들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네게는 사람 보는 안목이 있어.”
“……!!”
“아쉽군. 이상은 낮추고 배포는 좀 더 키웠다면, 내 밑으로 들어오라 제안 한 번은 해 봤을 터인데.”
한눈에 상대의 그릇을 파악한다.
곡명보다 훨씬 날카롭고 정확한 안목이었다. 선천적인 재능 외에도, 권력 싸움이라는 아수라장을 뚫으며 연마된 모용군의 안목은 이미 천하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데.”
모용군이 문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좋은 안목으로, 어째 호시탐탐 주인의 살점을 노리는 맹견을 키우고 있을꼬?”
곡명은 깜짝 놀라서 문사를 보았다.
문사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상대가 한눈에 자신의 목적을 간파하니 당황한 것이다.
모용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하기야, 꿈과 권력을 위한 여러 수단 중 타인을 이용하는 것만큼 손쉬운 게 없지. 쉬운 길이라고 항상 틀린 것도 아니고.”
“……!!”
“우리 실무조 좌장께서도 자네처럼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먼.”
곡명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워, 원하는 게 무엇이오?”
“원하는 것이라.”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아쉽군. 정체가 아니라 목적을 묻는다? 대개의 경우엔 그리 말하기 쉽지 않지. 이래서 환경이 중요한 게야. 십 년만 일찍 날 만났다면, 꽤 괜찮은 인재로 자랐을 것을.”
순간 문사가 천장에 달린 줄로 손을 뻗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훅!
힘차게 줄을 당긴 문사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잘려 버린 줄의 일부만이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다.
“반면에 네놈은 도무지 못 써먹겠다. 똑똑하고 욕심도 있다마는, 낯짝이 너무 어정쩡해.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놈이야.”
일순 모용군의 두 눈에 전광(電光)이 이글거렸다.
문사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자, 잠깐!”
스르르륵.
폭음이나 굉음, 심지어 절삭음이나 검음(劍音)조차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문사의 몸이 열여덟 조각으로 잘려 허물어졌다.
주르르륵.
순식간에 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허억!’
불안정한 떨림이 곡명의 온몸으로 퍼졌다. 그는 모용군이 어떤 무공을 썼는지는 물론, 출수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스르릉. 탁!
언제 꺼냈는지 모를 장검을 납검한 모용군이 웃으며 물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는가?”
“예, 예!”
“허허, 그래. 그리 겸손하게 나와야지. 자네, 갈수록 마음에 드는구먼.”
뒷짐을 진 모용군이 빠르게 퍼지는 핏물 위로 한 발을 내디뎠다.
푸스스스스.
역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모용군의 발끝에서 흘러나온 무시무시한 진기가 바닥 전체를 흥건하게 적시던 핏물을 모조리 증발시켰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기(神技)의 내공 운용이었다. 양강의 내공을 익힌 자라도, 한순간에 액체만 골라 증발시키는 건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곡명. 곡명이라 합니다.”
“그래, 곡 보주.”
모용군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음 같아선 단숨에 두 쪽을 내 버리고 싶은 범이 한 마리 있다네. 나이는 얼마 먹지 않았는데, 노회하기가 수백 년 묵은 구미호 저리 가라지.”
“예, 예?”
“언젠가는 꼭 잡을 놈이지만, 이번만큼은 송곳니를 갈아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네. 그 범의 등 위에 나도 올라타 있거든.”
“……?!”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이 거처를 내가 좀 써야 할 듯싶으이.”
“그, 그러십시오.”
“그리고 또 하나.”
미소 띤 모용군의 얼굴 위로 무시무시한 살기가 휘몰아쳤다.
“양천이 똬리를 튼 곳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 줄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