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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07화 (207/963)

207화. 거짓된 왕 (1)

네 사람이 들어선 거처는 지하 공동에 마련된 방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안락했다.

딱히 화려하다거나 고풍스럽진 않지만, 상당히 넓은 데다가 침상과 탁자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공터와 마찬가지로 야명주가 박혀 있어서 무척이나 밝았다.

“오호?”

가득상은 감탄 어린 눈으로 벽에 박힌 작은 구슬을 쓰다듬었다.

“이걸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뭔데 그러냐?”

“피습주(避濕珠)입니다.”

“피습주?”

“예. 일정 영역 내의 습기를 제거해 주는 기물이죠. 같은 크기의 야명주보다 서너 배는 더 비싼 보물입니다.”

패율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피습주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구슬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심지어 그냥 피습주도 아니군요. 그저 습기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습기의 정도까지 조절해 주는 기물입니다.”

“그럼 더 비싼 건가?”

“야명주처럼 피습주 역시 질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입죠. 이건 최상급까지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부호도 쉽게 구하기 힘든 상품(上品)입니다.”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아는 게 많구만?”

“저야 워낙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보니까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그때, 제갈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네요.”

“음?”

“상품이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법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피습주는 비쌀 수밖에 없는 물건이죠. 애초에 중원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가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수다. 피습주는 서역(西域)에서 나는 물건이라고 들었소.”

“맞아요. 문제는, 이만한 피습주가 이 거대한 지하 공동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죠.”

“음…….”

“설령 이곳이 귀빈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해도 이 공동의 너비는 상상을 초월해요. 이런 피습주가 못해도 수십 개는 있을 텐데.”

“그렇군.”

제갈아연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드리워졌다.

“정말이지 궁금해요. 이상하다고요. 대체 양천에게 돈이 얼마나 많길래 이런 귀물들로 도배를 해 놨을까요?”

패율이 말했다.

“혹은, 누군가에게 지원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아무리 그래도…….”

“왜? 너무 규격 외인가?”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보기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야. 놀랍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세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패율을 보았다.

패율이 자신의 검집을 툭툭 건드렸다.

“강호 무림에서는 무(武)가 힘이고 별호가 가치이며, 전적이 곧 증명 아닌가?”

“……!”

“성천십삼좌는 무림 최고 전성기라는 삼백 년 전의 절대고수와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의 초고수라 일컬어지고 있어.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괴물들이란 뜻이지.”

지금까지 침묵했던 당상아가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양천에게 이 정도 지원은 충분히 받을 만한 수준이라는 뜻인가요?”

“그렇다고 생각하네. 말이야 바른말이지, 돈을 벌 방법은 많지만 양천만큼 강해지기란 불가능에 가깝잖나.”

패율이 당상아에게 물었다.

“그쪽은 더 잘 알 것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성천십삼좌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무(武)의 신(神)이라 불린다. 그중 십 인의 신선제왕보다 한 수 뒤진다는 삼군(三君)만 해도, 시대를 잘 만났으면 천하제일인이 되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존재 자체가 귀하다. 각자의 이념을 떠나, 충분히 이만한 지원을 받을 만한 위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만 남는군요.”

“음?”

제갈아연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만일 지원해 주는 사람 혹은 단체가 있다면, 그들은 양천에게 무엇을 바라고 이만한 지원을 해 주었을까?”

* * *

“여기다.”

연호정을 데려간 노인은 하나의 시커먼 돌벽 앞에 멈춰 섰다. 유독 거무튀튀해 보이는 돌벽은 그 크기가 어지간한 성문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현암문(玄巖門).’

혈룡맥, 아니 묵룡부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독립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지형이 높으며, 공기도 가장 잘 통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곧장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는데, 계단의 수는 총 아흔아홉 개다.

독특한 특성 때문에 아직도 기억에 남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 문을 여는 방법은…….

“부주님.”

노인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종문의 대표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였다.

쿠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현암문이 다섯 치 정도 안으로 움직였다.

콰르르릉!

안으로 들어간 현암문이 느릿하게 좌측으로 사라졌다. 미닫이문의 형태인 것이다.

연호정의 눈이 형형해졌다.

‘다르다.’

본디 현암문 우측에는 가슴께 높이에 커다란 돌출부가 있었다.

그 돌출부는 내공을 써서 누르지 않으면 눌리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리고 그 돌출부가 눌리면, 그때 현암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지금은 달랐다.

돌출부가 있던 곳이 움푹 파여 있었다. 그 부분을 뜯어내고, 새로운 기관진식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보통이 아니군.’

작은 부품부터 정교하게 만든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는 신기(神技)의 기관진식을 입맛대로 개조했다.

굉장한 공학 능력이다. 혈룡맥, 아니 묵룡부가 된 이곳에는 무수히 많은 기관 전문가들도 투입된 모양이었다.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연호정은 체감할 수 있었다. 이건 절대 양천 혼자서는 구축할 수 없는 영역이란 것을.

‘양천.’

연호정은 치솟는 의문과 살기를 다스렸다.

‘정말 당신 뒤에는 그 개자식들이 있는 건가?’

아직은 모른다. 속단할 일도 아니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연호정은 이번 임무에 있어서 무엇 하나 섣불리 넘겨짚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육감과 본능조차도 잠시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투명하고 확실하게.

합당한 추론과 확신할 만한 사실 관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넘겨짚지 않을 것이다.

쿵!

마침내 현암문이 활짝 열렸다.

연호정의 눈에 곧장 위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완만한 각도여서 오르기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노인이 말했다.

“들어가라.”

연호정은 말없이 한 발을 떼었다.

그때, 노인이 말을 이었다.

“노파심에 한마디 해 두지.”

“…….”

“그분께 어떠한 무례도 저지르지 마라.”

연호정은 노인을 힐끔거렸다.

이 노인은 과거 양천과 싸울 적에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청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강하다.

놀랍게도 노인의 강함은 아버지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그 폭발적인 힘을 완벽하게 갈무리하니, 지금의 연호정으로서는 내공의 연원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나도 하나 묻고 싶군.”

“…….”

“당신, 중원인인가?”

노인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물끄러미 노인을 보던 연호정이 계단을 올랐다.

쿠구궁!

그가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현암문이 닫혔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연호정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연호정이 한 발, 한 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양천.’

서슬 퍼런 안광 속, 무서운 욕망을 품고 세상에 나섰던 자.

백도와는 다른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길을 찾아 헤매던 흑사자(黑獅子).

‘참 얄궂은 운명이군. 당신을 묻어 버린 이곳에서,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되다니.’

흑도의 젊은 고수의 패기 넘치는 도전 앞에서, 양천은 분노보다도 기꺼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쩌면 상대할 자가 없는 강자의 고독함에 몸부림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자신을 휘하로 둘 생각에 흥분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건, 양천의 그릇도 보통은 아니었다.

‘비록 내 손으로 죽였지만, 당신을 증오한 적은 없었어.’

추진력은 강했지만 본인의 이상을 이루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했던, 그저 투왕으로서 존재했다면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었을 강자.

연호정이 기억하는 양천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랐다.

‘다시 돌아온 세상의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나쁘지 않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당신을 새삼 증오하고 싶지 않아.’

우우우웅!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올라갈수록 느껴졌다.

전신을 압박하는 상대의 존재감이. 스멀스멀 흘러나와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막강한 힘이.

파삭!

계단 끝이 살짝 부서졌다. 막강한 압력을 버티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그 빌어먹을 놈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니기를 빈다.’

후우웅.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파라라락.

상당한 세기의 바람이었다. 연호정의 의복이 그 바람에 부딪혀 펄럭거렸다.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육체가 받는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 양반아.’

연호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뭐가 그리 궁금하고, 뭐가 그리 심심해서 날 시험하고 있나?’

잠시 직감을 내려놓기로 했지만, 그래도 그는 직감이 부르짖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양천은 이런 자가 아니었다. 이보다 더 배포 넘치고, 묵직한 맛이 있는 사람이었다. 간웅(奸雄)보다는 효웅(梟雄)에 가까운 사람이었단 말이다.

지금처럼, 날뛰는 젊은 고수를 시험해 본답시고 본신의 힘 아까운 줄 모르고 발산하는 자가 아니었다.

‘벌써 권좌가 주는 맛에 취한 건가?’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파삭!

아흔일곱 번째 계단을 밟았다. 계단 끝이 또 부서졌다.

콰득!

아흔여덟 번째 계단을 밟았다. 발바닥 전체가 계단을 반 치나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흔아홉 번째 계단.

우우우웅!!

공기가 요동쳤다.

츠츠츠츠츠.

연호정의 몸에서 은은한 청록빛 광채가 피어올랐다. 청룡기(靑龍氣)의 발현이었다.

청룡은 용랑(龍浪)이며, 회피와 반격에 능하다. 그것은 초식만이 아니라 진기의 특성 역시 비슷하다.

후웅.

쏟아지는 압력의 상당 부분이 해소되었다. 청룡기가 몸 전체에 퍼져 나가며 압력의 틈새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쿵!

연호정의 왼발이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스르륵.

천근의 압력을 자아냈던 묵직한 기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굉장하군.”

연호정이 감았던 눈을 떴다.

마침내 그의 시야에, 빛바랜 갈기를 휘날리는 흑사자가 보였다.

“청호 그 녀석, 더 연마해야겠어. 동수(同手)?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호무(虎舞)를 해방한다 한들 이십 합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거늘, 쓸 만하다는 평가 한 줄로 끝이었단 말인가?”

태사의에 앉은 사내, 양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양천!’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된 멀고 먼 인연이다.

“청년기란 무수히 많은 장점만큼이나 치명적인 단점 또한 안고 살아가는 시기지.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타인의 평가에 쉽게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거든.”

“…….”

“그걸 알면서도 이리 말하지 않을 수 없군.”

양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참으로 대단한 젊은이로구나. 근래 누군가를 보고 이만큼 놀란 적은 없었도다.”

연호정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의미를 알기 힘든 그 미소에 양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양 부주를 뵙소. 무종문의 정(定)이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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