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낭중지추(囊中之錐) (6)
“이곳이 바로 묵룡부다.”
묵룡부.
먹물빛 용이 똬리를 튼 곳이라는, 제법 거창한 이름을 가진 조직이었다.
하지만 실제 묵룡부는, 그 이름이 주는 인상보다도 훨씬 더 웅장하고 기묘한 곳이었다.
‘엄청나구나.’
가득상은 주변을 둘러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지.’
묵룡부는 지상 위에 세워진 성(城)이 아니었다.
지하(地下)다. 묵룡부는 지하에 존재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공동(空洞)으로 가득한 이곳의 규모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중앙 공터만 해도 무림맹의 대형 연무장 십여 개를 합쳐 놓은 것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그 널찍한 공터에는, 수백 명의 인부가 연신 뚝딱거리는 소음을 내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득상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말도 안 돼.’
천장까지의 높이만 오 장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그 높은 천장에 수백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줄줄이 박혀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저 많은 야명주를?!’
저 야명주 하나만 떼서 팔아도 어지간한 가정은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야명주가 수백 개다. 하물며 이곳은 입구 초입의 공터일 뿐이었다. 안쪽에는 얼마나 많은 야명주가 박혀 있을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가득상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난 자금력이다. 대체 양천은 어디서 이 많은 자금을 확보한 것일까?’
단순 유추만으로도 묵룡부의 자금력은 중원의 어떤 전장이나 상단에도 뒤지지 않을 듯했다. 아니, 오히려 능가했으면 모를까 결코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야명주도 야명주지만, 애초에 이런 지하 세계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때, 제갈아연에게서 전음이 왔다.
[오래되었네요.]
[엉?]
[이곳은 근래 만들어진 곳이 아니에요. 아무리 못해도 백 년은 넘죠. 제 생각에는 삼백 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눈으로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추측이 어렵네요.]
[그걸 어떻게 아슈?]
[지질(地質)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공부를 했었거든요. 이곳의 흔적과 습도 등을 볼 때, 절대 단기간에 만들어진 곳이 아니에요.]
[그렇군.]
[게다가 보세요. 닫힌 공간에서는 공기가 통하지 않아 생물이 살 수 없어요. 그런데도 이 많은 사람이 아무런 불편 없이 일을 하고 있죠.]
[아!]
[곳곳에 공기 통로가 많아요. 그리고 그 통로는 모두 외부와 연결되어 있죠. 제아무리 흑도 무림이 정보를 차단했다 하들, 이만한 대공사를 우리 측에 들키지 않고 진행할 수는 없어요.]
타당한 추리였다.
‘즉, 이 거대한 지하 세계는 이놈들이 작정하고 만든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져 있던 곳을 찾아서 써먹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 되는군.’
가득상은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연호정에게 전음을 날렸다.
[연 공자, 아무래도 조심해야겠소. 제갈 소저 말이, 이곳이 신설된 게 아니라고 하더이다. 그렇다면 필경 놈들의 준비가 더…….]
[신설일 수가 없지.]
[엉?]
[이곳은 절대 신설이 아니오.]
가득상은 고개를 돌려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
연호정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별 감흥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득상은 그의 눈빛 속에 드리워진 짙은 혼란과 알 수 없는 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연 공자?]
연호정은 대답이 없었다.
가득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러지? 설마 아는 곳일 리는 없을 테고…….’
가득상의 생각은 틀렸다.
연호정은, 흑암제는.
사신무(四神武)의 적통이자 흑도대종사로 만천하에 무적의 명성을 구가하던 그는, 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거대한 지하 세계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혈룡맥(血龍脈)!’
연호정의 두 눈에 격동이 어렸다.
‘혈룡맥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인가?!’
묵룡부. 아니, 혈룡맥.
신선에게 패퇴당한 악룡이 피에 젖은 몸을 이끌고 땅에 파고들어,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는 묘한 전설이 있는 이곳.
이곳은 분명 혈룡맥이었다. 혈룡맥이 아닐 수가 없다.
너무나도 오래된 기억이었지만, 연호정은 이곳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후의 결전 장소!’
그렇다.
이곳은 연호정이 흑제성을 세우기 전, 최대의 난적이었던 양천과 생사결을 벌였던 장소였다. 말하자면 흑도의 왕이 가려진 역사적인 장소란 것이다.
당시 연호정은 양천보다 분명한 하수였다. 사신무라는 희대의 신공과 상상을 초월하는 실전 경험으로도, 양천의 절대적인 무공을 감당키는 어려웠다.
그래서 연호정은 직접 나서서 그를 이곳으로 불렀다.
혈룡맥, 너무나도 넓고 깊어 그 끝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는 역사의 미로.
양천을 혈룡맥으로 끌어들인 연호정은 지형지물을 이용, 속임수와 암습 등을 수도 없이 퍼부은 끝에 기어이 양천을 잡을 수 있었다.
정정당당한 승부? 그따위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애초에 암습을 가해 양천을 죽일 수 있었다면, 굳이 혈룡맥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양천의 무공은 이미 암살자를 보낸다 한들 어찌할 수 없는 경지였기에 연호정이 직접 나선 것이다.
물론, 왕의 상징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목숨은 직접 끊어 놓아야 했지만.
‘변함이 없구나.’
수많은 인부가 공터 여기저기에서 제각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연호정의 눈은 이곳, 혈룡맥 전체를 훑고 있었다.
‘그래, 저기가 그곳이었지.’
과거 양천을 유인하기 전, 혈룡맥 곳곳을 조사했다.
너무나도 넓고 깊어서 연호정조차 이곳 길을 외우는 데에 보름이 넘게 걸렸다.
그래서일까? 몇몇 가물가물한 부분을 빼면 길 대부분이 기억이 났다.
‘역시나.’
혈룡맥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연호정은 바뀌어 버린 역사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역시 달라졌어. 당시 양천은 혈룡맥의 존재는 알았어도, 이곳에 터를 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음침하고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아가 그에겐 거대한 야망만큼의 과시욕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는 당당함이 있었다. 굳이 숨어서 세력을 끌어모을 필요는 없다는 당당함.
만천하에 건재함을 알리지도 못할 힘이라면, 흑도를 규합해 봤자 백도와 일장 난투를 벌일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의지.
‘그랬던 당신이, 이번 생에서는 혈룡맥을 거처로 삼았군.’
연호정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대체 뭐지?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렇게 조심스레 움직이게 한 거지? 단순한 심경의 변화인가? 그도 아니면 뒤바뀐 역사 속에서 내가 모르는 사건이라도 겪은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양천이 이곳 혈룡맥에 자리를 잡은 것 자체가 연호정에겐 크나큰 놀라움이자 아련함으로 다가왔다.
가득상이 패율과 당상아,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연호정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연신 그를 힐끔거리는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때, 청호가 입을 열었다.
“부주님께서 곧장 너희를 보고자 하신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드리워졌다.
그녀가 각자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제 제가 드렸던 은형단(隱形丹) 갖고들 계시죠? 다들 그거 삼키세요.]
연호정이 말했다.
“대표로 내가 가지.”
예상 밖의 발언에 깜짝 놀란 일행이 연호정을 보았다.
청호가 무감각한 목소리로 일축했다.
“부주님께서는 너희 모두를 보고자 하신다. 부주님의 명령에…….”
“말을 똑바로 하도록 해. 우리는 너희가 부주님이라 부르는 그 사람을 만나 보고, 그와 손을 잡아도 될지, 혹은 휘하로 들어갈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온 거다. 아직 그의 수하도 뭣도 아니야.”
“…….”
“이해하기 어렵나? 그렇다면 분명히 말해 주지. 우린 너희의 명령이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 역시 청호 못지않게 싸늘했다.
“손님으로 모셔 왔으면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도록 해. 쓸데없는 수작으로 우리 기분 잡치면, 너희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상식은 밖에서나 찾아라. 부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명을 받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너부터 죽인다.”
청호의 눈에 은은한 살의가 떠올랐다.
와중에도 살기는 제어한다. 놀라운 인내심이었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개소리하면 너부터 죽이고, 네가 어르신이라 부르는 분에게 단단히 따지러 갈 것이다. 알겠나?”
“……이놈.”
“우리는 이미 묵룡부에 들어왔다. 나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나가기는 힘들겠지?”
“…….”
“그것으로 이미 우리는 충분한 성의를 보인 거 아닌가? 뭐가 그리 무서워서 명령 하나에 죽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너의 상식과 우리의 상식이 다르다는 건 알아야지.”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우리가 죽으면 너희도 곤란하지 않겠나? 인재랍시고 데려온 손님들의 요구 하나 때문에 죽이니, 살리니 개지랄 떨다가 멋진 기회를 날려 버리는 격인데.”
“…….”
“웃기지도 않는 논리로 신입들 휘어잡을 생각 말고, 수족이면 수족답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움직일 줄도 알아야지.”
청호의 볼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움직여라? 양천의 휘하 중 가장 명령에 철두철미하기로 유명한 자신이 들을 말이 아니었다.
“안 되겠군.”
푸스스.
기어이 청호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선을 넘었다. 부주님과 마주할 가치가 없는 놈들이야.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선을 넘는 거 좋아하는 분 아니었나, 너희 어르신이란 분?”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나저나, 전에는 부주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라더니 지금은 왜 너 따위가 우릴 판단하고 있는 거지? 그새 어르신의 명령을 잊었나 봐?”
“이놈이……!”
그때였다.
“청호.”
순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패율과 가득상, 당상아와 제갈아연 역시 느닷없이 들려온 울림 가득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다른 네 분은 거처로 모셔라. 그리고 부주님께는 그 청년만 데리고 간다.”
청호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네가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게 되었지?”
순간 청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모습을 본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겁에 질렸다?’
그렇다. 금세 특유의 무표정으로 되돌아왔지만, 청호는 분명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청호가 좌측으로 몸을 돌렸다.
“네 사람은 날 따라와라.”
연호정이 네 사람을 보며 말했다.
“다녀오겠소.”
그에게 말을 걸려던 네 사람은 동시에 움찔했다. 연호정의 말투가 달라진 것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검지를 들었다.
‘일계(一計)로.’
계획 변경이다.
실제로 묵룡부에 들어가거나 양천을 만나게 될 시, 문파 내의 사형제지간으로 위장한 게 발각되면 어떻게 대처할지를 고민했었다.
여러 가지 안건이 나왔고, 총 세 개의 계획을 짰다.
연호정이 보낸 신호는 그중 첫 번째 계획으로 관계를 변경하자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 첫 번째 계획의 핵심은?
‘기존 관계의 붕괴와 양천 공략.’
가득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오슈.”
청호가 멈칫했다.
연호정의 말투도, 가득상의 말투도 바뀌었다.
강렬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네놈들……?”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뭐 해? 얼른 모셔들 가. 여로에 지쳤다고, 다들.”
가만히 서서 연호정을 노려보던 청호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네 사람이 따랐다.
제갈아연이 연신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연호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아연은 나직이 한숨을 쉬곤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혼자가 된 연호정 앞에, 어느새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청호에게 경고했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가지.”
연호정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갑시다.”
흑도 무림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숙적.
드디어 투왕 양천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