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낭중지추(囊中之錐) (4)
쐐애애액!
화살이 쏘아지듯 내질러진 창날의 날카로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부에 닿지도 않았는데 목 전체가 시큰시큰하다. 짙은 살기와 섬뜩한 예기가 돋보이는 실전 창술이었다.
‘빠르다.’
빠르지만,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청호의 상반신이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터엉!
창대가 하늘로 솟았다.
짧고 탄력적인 반장(半掌)으로 창의 진로를 바꾼 것도 모자라 튕겨 내기까지 했다.
그 한 수로 알 수 있었다. 청호의 실력이 진짜임을. 그의 권박(拳搏)은 능히 경지에 달한 수준이었다.
‘강하군.’
청호의 눈이 빛났다.
‘강하지만, 경험이 부족…….’
그때였다.
파아아앙!
공기를 터트리며 날아오는 각법은 창술보다도 더 매서웠다.
청호는 깜짝 놀랐다. 기습에 가까웠던 창술보다도 더 빠른 속도에, 상반신 전체가 뒤로 밀릴 것 같은 파괴력은 덤이었다.
콰앙!
청호의 몸이 비틀거렸다.
무거운 일격이었다. 팔을 교차하여 막지 않았다면, 단번에 목뼈가 부러졌을 정도의 힘이었다.
‘박투술이 더 강해?’
창술이 주 무공이 아니었단 말인가?
타아앙!
그것만도 놀라운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동작이 크고 위력이 강한 각법을 구사했음에도, 그 짧은 순간 파고드는 보법은 경쾌하기만 했다.
연호정의 두 주먹이 불을 뿜었다.
타타타타탕!
쏟아지는 연환권법을 양손으로 모조리 받아 내는 청호의 실력 역시 굉장한 것이었다.
퍼어엉!
연호정의 장포가 공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찌이이익!
날카로운 관수(貫手)가 스치고 지나간 청호의 의복 어깨 부근이 길게 찢어졌다.
박빙의 승부였다. 물론 청호는 작정하고 살초를 쓰지 않고 있었지만, 근본적인 실력 자체가 비슷한 것 같았다.
후욱!
계속 물러서는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탄력적인 단타로 연호정의 주먹을 쳐 낸 청호가 일순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짐승 같군.’
격식 있는 백도의 무공과는 전혀 다르다.
형(形)이 자유롭고, 시전자의 감각에 큰 영향을 받는 박투술.
흑도의 무공이었다. 누구든 꾸준하게 익히면 큰 위력을 발하는 백도의 무공과는 달리, 타고난 재능과 억지로 발달시킨 반응 속도에 큰 영향을 받는 싸움법이었다.
청호의 권장이 연호정의 상체 곳곳을 노렸다.
퍼퍼퍼펑!
연호정은 신들린 움직임으로 청호의 공격을 막아 냈다.
초근접 거리에서 펼쳐진 탄력 넘치는 대결이었다. 미처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에 두 사람의 상체 의복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굉장하네요.”
가득상 옆으로 다가온 제갈아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난 실력이에요. 설마하니 셋째 사형과 대등한 승부를 벌이다니…….”
“그게 아니야, 사매.”
“네?”
제갈아연이 의아한 눈으로 가득상을 보았다.
뜻밖에도 가득상의 표정은 오묘했다. 놀란 것 같기도 했고, 감탄한 것 같기도 했으며, 은근히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셋째는 정말이지…… 못하는 게 없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때, 패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상대와 수준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다.”
제갈아연의 눈이 커졌다.
“맞춰 주고 있다고요?”
“그래.”
당상아 역시 홀린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셋째의 실력은 저 청호란 자보다 훨씬 강해.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박빙의 승부를 이루고 있지. 정말 대단한 거야.”
제갈아연은 내심 의아했다.
강한 무공을 지녔으니, 자신보다 약한 자와 박빙의 승부를 꾸며 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가득상이 말했다.
“바둑이 경지에 든 국수(國手)라도, 자신보다 하수가 동수(同手)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건 어려운 법이야. 그건 어떤 분야도 마찬가지지.”
“……아!”
“단순히 손을 맞춰 주는 게 아니라, 아예 상대로 하여금 비슷한 실력이라고 오해하게끔 승부를 이어 가는 것. 엄청난 실전 경험과 자유로운 무공 구현 방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
가득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셋째랑 함께 다니면 심심할 일이 없다니까.”
제갈아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너, 정말 정체가 뭐야?’
평범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일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낸다. 지닌바 능력의 한계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갈아연이 긴장한 눈으로 여섯 고수를 보았다.
섬뜩한 살기를 발하는 여섯 고수는, 놀랍게도 저 결투에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위험해요, 저 방식은.”
“그래. 위험하지.”
“이런다고 우리가 무종문 출신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셋째가 그런 확신도 없이 나섰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제갈아연이 가만히 가득상을 보았다.
“역시 셋째는 대사형이 가장 잘 알고 있네요?”
“엉?”
“이틀 전에 꽤 심각하게 다퉜다면서요.”
가득상이 콧방귀를 뀌었다.
“셋째와 나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 만일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친분을 쌓긴커녕 시작부터 칼을 뽑았을 거다.”
“헤에.”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셋째잖아.”
가득상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든 잘 해낼 거야. 그 정도 믿음은 있지, 서로.”
파아아앙!
공기를 찢는 폭음이 유독 요란했다.
서너 걸음 물러난 청호의 눈이 깊어졌다.
‘굉장한 놈이로군.’
무서운 박투술이었다.
상하좌우, 어디에서 어떤 공격이 날아올지 도통 짐작이 되질 않는다. 짐승처럼 연마한 대응 능력과 실전으로 다져진 예측 능력으로도 놈의 다음 수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터어어엉!
낮게 치받아 오던 연호정의 몸이 일순 공중으로 떠올라 화려한 각법을 펼쳐 냈다.
퍼퍼펑!
연환삼각(連環三脚)이다. 변칙적인 공격술, 어지간히 실전에 능한 고수라도 아차 하면 당할 정도로 능수능란한 무공 교체였다.
‘여러 가지 무공을 익혔다.’
청호는 연호정의 공격을 받아 주며, 그의 박투술 종류만 무려 다섯 가지를 보았다.
권박에 능한 청호조차도 이리 많은 무공을 익힌 사람을 본 적은 몇 번 없었다. 그것도 비슷한 류가 아니라 특성이 전혀 다른 박투술이었다.
‘무종문이라 이거냐?’
특성, 종류, 목적이 전혀 다른 무공들의 연계기.
자신을 증명하는 데에 있어 이토록 직관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청호의 안광이 서슬 퍼런 빛을 발했다.
‘고작 이 정도 수준에서 멈춘다면, 절대 어르신을 뵐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르신, 양천의 말을 떠올렸다.
‘놈들이 무종문 출신이라는 걸 증명하는 건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바로 놈들이 얼마나 선(線) 없이 날뛸 수 있느냐는 거다.’
‘……?’
‘나는 놈들이 진정 무종문 출신임을 바라기 전에,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할 줄 아는 놈들이기를 바란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놈들이라면, 설령 정파 출신이라도 개의치 않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선 없이 날뛸 수 있는 인재. 거기에 머리도 있다면 무조건 데리고 와라. 다소 위험하더라도 상관없어.’
청호는 어르신께서 자신을 보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른 십이지신도 그렇지만, 그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특히 능했다.
그것은 그의 무공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맹수처럼 감각적인 무공을 익힐수록 이성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청호가 봤을 때, 지금의 연호정은 다소 애매했다.
‘무공의 종류로 무종문 출신임을 증명했다. 그거야 넘어가 줄 수 있지만.’
청호의 눈이 깊어졌다.
‘기어코 선을 넘느냐, 아니면 증명한 것만으로도 만족하느냐.’
그때였다.
퍼엉!
유독 강력한 권풍(拳風)으로 청호를 밀어 낸 연호정이 어느새 발치에 걸린 창대를 차올렸다.
‘창?’
청호의 눈이 흔들렸다.
‘창도 쓸 줄 안다고?’
초반 창격은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기 위한 한 수가 아니었단 말인가?
순간 청호의 날카로운 눈에 연호정의 손바닥이 보였다.
무언가를 쥐고 휘두르지 않으면 생길 리 없는, 알이 제대로 박인 굳은살이.
‘창술가!!’
파아아앙!
연호정이 여섯 고수가 선 자리로 뛰어들었다.
청호가 외쳤다.
“흩어져라!”
그의 외침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퍼버버버벅!
두 명의 호귀(虎鬼)가 창봉술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강하고 탄력적인 창술이었다. 창대가 아니라 창날로 맞았다면 그대로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려 죽었을 것이다.
연호정의 창이 불을 뿜었다.
퍼벅! 티이잉! 서걱!
남은 네 호귀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신음도,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단련된 이들이었다.
그러나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간 청호의 몸이 불가사의한 속도로 움직였다.
번쩍! 터어어어엉!
연호정의 창이 한껏 옆으로 치워졌다.
퍼억! 퍼어억!
둔중한 울림과 함께 두 사람이 제각기 다섯 걸음씩 물러났다.
청호는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작게 구멍이 뚫린 의복 위로, 벌겋게 핏물이 번졌다.
‘위험했다.’
순간적으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배에 바람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이토록 위력적인 창술이라니. 주무공은 권박이 아니라 창술이었나?’
그때, 연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청호가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리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역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제법 아픈데.”
청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짓이냐?”
“뭐가?”
“왜 내 수하들을 건드린 거지?”
연호정이 비릿하게 웃었다.
“무종문 출신임을 증명하라며?”
“증명이라 하였지, 살초를 쓰라 한 적은 없다.”
“웃기는 소리. 증명하지 못하면 죽인다고 하는 놈들을 고이 살려서 보낼까?”
“……!”
“그리고 이건, 그 어르신한테도 나쁘지 않은 일이잖아?”
“뭐?”
연호정이 창대를 견봉에 걸쳤다.
여유로운 몸짓 속, 적아 구분이 흐린 맹수의 포악함이 절절히 묻어 나왔다.
“투왕의 무공은 중원 정점을 논한다. 한데 그분 휘하에서 싸우는 놈들이 내 손에도 버티지 못할 정도면, 오히려 약자를 치워 줬다고 고마워해야지?”
“…….”
“겸사겸사 신고식 같은, 쓸데없는 실력 증명도 피할 수 있지 않겠나?”
청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영악한 놈이군.’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다음 일까지 생각해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똑똑한 놈이다. 적어도 멍청하지는 않은 놈이었다.
게다가 당연히 어르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저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까지.
청호는 판단을 내렸다.
“합격이다.”
“음?”
“묵룡부로 데려가겠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그렇다.”
“검증이 너무 대충인 것 아닌가?”
청호가 몸을 돌렸다.
“모든 판단은 그분께서 내리실 것이다. 내가 맡은 임무는 여기까지다.”
“…….”
“곧장 출발할 것이다. 준비해라.”
“좋아.”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청호는 대답 없이 쓰러진 호귀들을 깨웠다.
가득상이 연호정 곁으로 다가왔다.
“어때? 괜찮을 것 같냐?”
이대로 곧장 양천에게 가도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이 아니라 전음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저들의 대응을 보니 확실하오. 양천은 현재 인재가 부족하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능력과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만나고자 할 거요.]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그간 지지부진하더니 이리 한순간에 만남이 성사될진 몰랐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현재 개방도들은 어디에 있소?]
[근처에 있다는 것 말고는 모르오. 혹시 내가 잡혔을 때 방도들의 위치를 불게 될까 봐, 일부러 머리에 담지 않았소.]
[그들에게 연락할 방법은?]
[지금처럼 해 왔던 것처럼 하면 되오. 다소 수동적인 방법이지만.]
[이곳에 가는 도중에 계속 흔적을 남기시오.]
[걱정하지 마시구랴. 고생했소.]
[그리고 후개.]
[엉?]
[엊그제는 미안했소.]
가득상이 한마디를 뱉었다.
[지랄.]
연호정이 피식 웃으며 패율에게 말했다.
“준비하시지요, 사숙님.”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