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낭중지추(囊中之錐) (3)
“지금 뭐라 하셨소?”
당관의 두 눈이 위협적인 광채를 뿌렸다.
모용군은 생각했다. 이 사람은 생각보다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고.
당상아가 실무조로 들어간 이후, 당관의 기분은 최악에 가까웠다.
그것이 딸을 향한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명백한 정적(政敵)인 연호정 때문인지는 모용군도 몰랐다.
‘둘 다일 수도 있지.’
모용군이 차로 목을 축인 후 말했다.
“연호정이 가주의 딸을 데리고 간 이유가 바로 당가의 암기술 때문일 거라 하였소.”
쾅!
거칠게 내리친 주먹에 탁자가 흔들렸다.
당관이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즉, 놈은 본가의 공부를 이용하여 양천의 흥미를 끌고자 했다는 것이오?”
“그렇소.”
“흑도 놈들이 힘을 비축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전력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소.”
“……!”
“물론 내가 양천이라도 그리 접근했을 것이오.”
푸스스스.
당관이 주먹이 탁자를 관통했다.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맹렬한 독기가 나무를 녹여 버린 것이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비싸게 주고 장만한 탁자거늘.”
당관의 입이 열렸다.
“그 망할 놈이, 감히 본가의 암기술을 우습게 봐?”
암기는, 어떤 의미로는 권장 박투는 물론 병장기술보다도 익히기 어려운 공부다.
화살처럼 활대로 고정할 수 있는 장치도 없다. 암기를 다루는 데에 있어선 시전자의 섬세한 감각과 집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세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암기는 익히기 어려운 공부인 것이다. 당가 내에서도 매년 암기술을 익히다가 목숨을 잃는 혈족들이 최소 열 명 이상씩은 나왔다.
그런 극상승의 공부를, 고작 적의 흥미를 끄는 방편으로 쓴다?
당관으로서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놈이라고 당가의 암기술을 우습게 봤겠소?”
“그러다 상아가 놈의 구슬림에 빠져 당가의 비전을 가르치기라도 하면 어쩌오?!”
“그럴 일은 없소이다.”
“자신하시오?”
“자신하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잠시나마 손을 잡았다고 놈에 대한 악감정이 많이 수그러지기라도 한 것이오?”
순간 모용군의 눈이 서슬 퍼런 안광을 발했다.
번쩍!
번갯불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지금껏 당관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위압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당연히 당관 역시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주.”
“…….”
“우리 사이에, 앞으로 이런 얘기를 매번 하긴 싫으니 오늘 확실하게 말해 두겠소.”
모용군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내게 있어 연호정은 물론 연가주, 제갈가주 모두가 적이외다.”
“…….”
“때에 따라 손을 잡을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적을 죽이자고 훗날 내가 거머쥘 세상까지 난장판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파직! 파지직!
허공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모용군의 뇌정기가 방 안에 흐르던 독기를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모용군 자신이야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중독되어 골병을 앓을 수도 있을 만큼 독한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적인 내공 발출에, 당관은 무척 놀랐다.
‘엄청난 기운!’
진기의 밀집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간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준 적 없던 모용군의 진신진력이었다. 순간적으로 발출한 힘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작정하고 발산하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선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의지가 약해졌다는 둥, 꿈을 잊었냐는 둥 하는 소리로 날 떠보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처사외다.”
“…….”
당관은 말없이 모용군을 보았다.
싸늘한 표정을 고수하던 모용군이 일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가주께 손을 내밀려 했고, 가주는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었소. 우리 두 사람은 필요로 인해 얽혔고, 나아가 많은 이득을 보았잖소? 우리는 그 어떤 정치적 동맹보다도 끈끈한 사이외다.”
“음.”
“웃으면서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오. 우리끼리라도 서로를 의심하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물끄러미 모용군을 보던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하겠소.”
담백한 사과였다.
그 한마디에 당관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보면 이 사람도 과민 반응을 했소이다. 나야말로 괜스레 분위기를 망친 듯하여 면목이 없소.”
“필요한 말을 하셨소. 나 역시 근래 들어 심사가 복잡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라겠소.”
“아무렴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하나가 될 사이 아니오?”
모용우와 당상아의 혼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관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가문과 가문이 혼사로 얽히면 싫어도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모용군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본래 얘기로 돌아와서, 연호정이라도 가주의 여식에게 당가의 비전을 내어놓으라 종용할 수는 없소.”
“설명이 필요하오.”
“영역 싸움하다가 부딪친 상대 좀 살펴보자고 아군의 팔을 잘라 바칠 필요는 없기 때문이오.”
당관의 눈이 반짝였다.
“아군이라.”
“그렇소. 지금 우리는 정적으로서 싸울 게 아니라 하나의 아군으로서 움직여야 하오. 그 이유는 전에 설명해 드렸을 것이오.”
“우리가 백도 최고의 권력자가 된다 한들, 양천은 귀찮은 존재니까.”
“정확하오.”
당관이 눈을 빛냈다.
“당신도 같은 생각이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같은 생각이오. 하지만 지금 무림맹에는 연호정 그놈이 없구려.”
나름의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진즉 말해 주지 그랬소?”
“가주를 못 믿어서가 아니니, 언짢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런 걸로 언짢아하지 않소.”
“알고 있소이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오.”
“후우.”
당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헝클어졌던 기분은 제법 진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심사는 복잡했다.
모용군이 물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소이다.”
“말씀하시오.”
“이건 내가 암기에 문외한이라 드리는 질문이오. 암기술에도 저마다 독특한 특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기본기에도 각 종파의 흔적이 묻어 나오는 게요?”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기도 검법과 똑같소. 던지고 맞출 뿐이다? 검 역시 찌르고 베는 기본 원리는 같잖소.”
“그렇지.”
“손목의 미세한 변화, 손가락의 움직임, 안법(眼法), 팔을 휘두르는 각도, 허리의 탄력 등 어느 곳에서라도 종파의 흔적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소.”
모용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기본공을 가르칠 때도 그런 특성이 묻어 나온다…….”
“그렇소. 심지어 지역적 특색과 암기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르오. 암기의 세계는 그렇게나 복잡하지.”
“결국, 실무조에게 있어 최상의 결과는 이것이로군. 적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침투하여 정보만 뽑아내는 것.”
“그게 가능하겠소?”
“글쎄. 그거야 실무조의 몫이고, 워낙에 변수가 많은 일이라 예측하기는 쉽지 않소이다.”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연호정 역시 모르지 않겠지.”
* * *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강하다.’
일곱 고수 중 중앙에 서서 서늘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자.
그자의 무공은 점창의 장로인 패율조차 깜짝 놀랄 만큼 강했다.
우우웅.
일부러 내공을 발산하거나 살기를 드리운 게 아닌데도 공기가 부르르 떨린다.
태생적인 분위기인지, 배우고 익힌 무공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만히 있는데도 느껴지는 거친 기파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흑도에도 인물이 있었군.’
순간적으로 호승심이 치솟았다.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가득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중년 사내는 흥분하지 않았다. 특유의 거친 기파는 그대로였지만, 생각보다 훨씬 냉정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나는 청호(靑虎)다.”
청호.
너무나도 흔한 이름이지만, 놀랍게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천하의 가득상조차도.
“흑도 무림의 최강자, 앞으로 천하 무림을 석권하실 양 어르신 밑에서 일하고 있다.”
“……!”
“양 어르신, 곧 묵룡부주(墨龍府主)님의 명을 받고 왔다는 말이다.”
가득상의 눈이 빛났다.
‘알려 준다?’
당당하게 양천을 입에 담는다. 나아가 그가 세운 단체의 이름까지도 묻기도 전에 알려 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조심스럽지 않아. 하지만 저쪽 역시 머리가 없지는 않을 터. 조심스럽지 않은 게 아니라, 조심스러울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겠지.’
그 이유는?
“곧 세상에 알릴 생각인가?”
가득상이 옆을 보았다.
어느새 연호정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묵룡부라? 지금껏 듣지 못했던 이름인데.”
“…….”
“꽤 조심스럽게 움직였던 것 같은데, 너무 쉽게 알려 주는군.”
청호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두 가지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죽거나, 살거나?”
“그렇다.”
수틀리면 죽일 것이니 아군 단체명을 알려 주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연호정이 가득상에게 물었다.
“대사형.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틀 전에 갈등이 있었지만, 가득상은 찰떡처럼 말을 받았다.
“글쎄다? 어차피 우리도 저 양 어르신이란 분을 뵈러 온 거잖아? 죽고 싶지는 않으니, 살길을 찾아봐야겠지?”
“역시 그렇군요.”
“당연하지. 난 죽기 싫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가 청호에게 물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데?”
“증명.”
“무슨 증명?”
청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너희가 진정 무종문 출신이라는 걸 증명한다면, 묵룡부로 데리고 가겠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종문이 어떤 문파인지 알고 있나?”
“안다.”
“알면서 그따위 개소리를 해?”
뭉클뭉클.
일순 청호 뒤에 선 여섯 고수의 몸에서 살벌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보던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강하다.’
연호정, 패율, 가득상, 당상아.
이들 중 고수 아닌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특히나 연호정의 무공은 진즉에 일가(一家)를 이루어, 실력만 보면 문파 하나를 세워도 무방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특수한 경우라고 봐야 한다. 나아가 패율 역시 점창파 최연소 장로였고, 가득상과 당상아는 소속 문파 최고의 후기지수였다.
말하자면 백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재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건데, 저들은 그게 아니었다.
‘양천 휘하 최강의 고수는 아닐 거야. 거의 확실해. 한데도 저 정도 강자들이라니, 정상이 아니야.’
제갈아연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집단이구나.’
더 대단한 것은 저 무리의 수장인 청호의 대응이었다.
“그런 상식은 다른 데서 찾아라.”
“…….”
“무종문 출신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너희 앞에 놓인 길은 죽음뿐이다.”
가득상이 연호정을 힐끔 바라보았다.
세게 나오는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야 하지.”
“그렇다면 증명해라.”
“괜찮겠나?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데.”
“한 입으로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그 말, 마음에 드는군.”
연호정이 한옆에 세워 둔 장창을 들었다.
순간 가득상이 입을 쩍 벌렸다. 패율은 물론, 당상아와 제갈아연도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저 인간, 설마?’
부우웅.
공기를 가르는 창대에서 흘러나온 진기가 공기를 묵직하게 밀어 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자, 증명한다.”
터어어엉!
청호의 눈이 흔들렸다.
어느새 창날이 그의 목젖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