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99화 (199/963)

199화. 정면 돌파 (3)

패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냐, 너희들?”

가득상이 포권을 취했다.

“사숙님을 뵙습니다.”

그의 뒤를 따라 세 남녀도 고개를 숙였다.

“……?”

패율은 당황했다.

의복 곳곳에 핏방울을 묻히고 온 것도 놀라운데,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을 듯 허리를 접으며 인사하는 모양새는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왜 너희 사숙이냐?’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올 뻔했다.

패율은 일행과 헤어지기 전 연호정의 말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우리는 무종문의 후예입니다. 저희는 사형제지간, 그리고 선배님은 사숙 역할이지요. 분위기는 저희가 만들 테니, 대충 장단이나 맞춰 주시면 됩니다.’

‘이게 무슨 애들 장난 같은 놀음이야?’

한데 막상 진짜로 사숙이라 불리니 기분이 좀 오묘하다.

패율이 헛기침을 했다.

“잘 왔다.”

어색함이 가득 느껴지는 말투다. 그제야 네 사람이 허리를 폈다.

“근데 그 피는 뭐냐?”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별 잡것들이 저희를 미행하지 뭡니까. 둘째가 거의 다 잡았는데, 남은 것들이 도망치려고 해서 각자 흩어져서 하나씩 잡았습니다.”

둘째가 누구지……?

당상아가 눈치 좋게 나섰다.

“죄송해요. 제가 더 철두철미했다면 굳이 손을 안 쓰셔도 되었을 텐데.”

“어허이, 사매는 그런 말 하지 말게. 워낙에 은밀하지 않았나. 그리고, 설마 우리 뒤를 밟는 놈들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나저나 누굴까요?”

“글쎄다? 쪼잔함으로 봤을 때는 백도 놈들인 것 같긴 한데, 이쪽 지방은 백도가 힘을 못 쓰잖아.”

“역시 흑도겠군요.”

“그렇겠지.”

제갈아연이 슬그머니 끼어들며 철없는 막내 역할을 했다.

“근데 이거 괜히 문제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지금 흑도 사람 만나러 가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더라? 양…….”

연호정이 곧장 제갈아연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갈아연이 숨 막힌다는 듯 연호정의 어깨를 퍽퍽 쳤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외비야, 사매.”

“읍읍!”

“전에 말했지? 입 잘못 놀리다가 패가망신한 사람 많다고. 사매도 좀 진중해질 필요가 있…… 컥!”

연호정이 비틀거렸다. 제갈아연이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갈긴 것이다.

제갈아연이 퉤퉤 침을 뱉었다.

“손도 안 씻었으면서 어디다 손을 대욧!”

“콜록!”

“어? 괜찮아요?”

“안 괜찮아, 인마!”

패율은 흐릿한 눈으로 네 남녀를 보았다.

이것들 신났군.

이럴 때는 문파의 어른이 나서 줘야 마땅하다. 패율이 다소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다. 자중들 하거라.”

“큽!”

패율이 도끼눈을 뜨고 가득상을 보았다.

재빨리 웃음기를 지워 낸 가득상이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사레가 들려서.”

“너는 따로 좀 보자.”

“……넵.”

연호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군.’

이곳 주루는 상당히 컸다. 늦은 시간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르르.

연호정의 손끝에서 청룡기가 올올이 흘러나왔다.

청룡기는 사신의 진기 중 가장 민감하면서도 현무기만큼이나 부드러워서 정교한 작업에 쓰기 좋다.

무형의 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아홉인가.’

널따란 주루에 내공을 익힌 자가 아홉이다.

생각보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게 정상이었다.

흑도가 암암리에 호남성 전체를 장악했다고는 해도, 이곳은 호남성에서도 서쪽 끝에 자리한 소도시였다.

게다가 흑도는 고수 층이 얇다. 이 정도 숫자면 오히려 많다고도 볼 수 있었다.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겠군.’

연호정은 문득 당상아를 보았다.

당상아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제갈아연과 호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집안의 수장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정작 그 자식들은 친자매처럼 친해 보였다.

‘미끼 역할 잘해 줘야 한다.’

연호정은 그녀의 존재가 일행의 임무를 한결 수월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 우리도 식사나 할까요?”

그날 밤.

후우우웅.

후원 외측 대숲에 나와 가부좌를 튼 연호정의 몸 주변으로 사색(四色)의 기운이 맴돌았다.

마치 정령(精靈)을 보는 듯했다. 흑백적청(黑白赤靑)의 네 가지 기운이 반딧불처럼 형형하게 빛나며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신비로운 광경이다. 그의 몸에서 나온 기운이 아닌, 대자연의 어떠한 의지가 그를 보호하는 것만 같다.

‘좋아.’

연호정은 흡족함을 느꼈다.

‘이제야 균형을 이루었어.’

과거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익힌 것이 현무기였다. 당연히 현무기의 농도가 가장 짙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신의 기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며 성장과 제어를 반복한다.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등의 이치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기운이 질적 양적으로 균형을 이루게 되면, 그때부터는 네 가지 기운이 함께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사신무에서는 이 상태를 ‘정식(貞式)’의 상태라고 한다. 모든 기운이 곧게 일어서 한데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하나의 단계를 넘었다.’

사신기(四神氣)를 완성한 이후 최초로 넘어야 할 관문이 바로 정식이다.

연호정은 그걸 무종지벽을 돌파한 이후에 완성했다.

육체와 진기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기운을 끌어내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같은 발전이라도 보다 높은 곳에서의 발전은 고도의 효율과 깨달음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연호정이 눈을 떴다. 그러고는 옆에 놓인 장창을 집어 들었다.

‘괜찮군.’

식사를 마친 후, 근처 대장간에서 구한 철제 장창이었다.

철을 통째로 사용했기에 그 무게가 만만치 않았지만, 팔십 근이 넘는 광룡부를 휘두르던 연호정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호정이 창대의 중간을 잡고 돌렸다.

부웅. 부우웅.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창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묵직하면서도 시원했다.

‘무게 중심이 잘 잡혔어. 창날도 적당히 길고. 운이 좋았군.’

광룡부는 지나치게 화려한 무기였다. 그건 교룡쇄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산호장이라는 별호가 무림을 진동하고 있는 이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게 뻔한 두 기병을 들고 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병장기가 바로 창이었다.

도끼를 다루기 위해 가장 먼저 연마한 것이 창봉술이다. 창과 맨손 권박이라면 광룡부와의 전력 격차를 최소화할 수 있다.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파아아앙!

짧은 거리를 이동한 그가 힘이 넘치는 창술을 펼쳤다.

퍼버버벅!

한순간 십여 개로 늘어난 창날이 대나무 열 그루 중앙에 동일한 흔적을 만들어 냈다.

연호정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기색이 어렸다.

‘한동안 안 다뤄서 퇴보했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성장한 기분이구만?’

이 또한 사신무의 정식을 이루었기에 가능한 일일 터였다. 힘의 낭비가 없으니, 창술도 한층 정교해진 것이다.

파라라라락!

바람을 가르는 창날이 멋스러운 광채를 발했다.

연호정의 움직임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느슨하면서도 유려했다.

무공을 연마하는 게 아니라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베고 찌르는 창날의 공격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사사사삭!

땅에 떨어진 댓잎이 창날 끝을 따라 솟구쳤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쿵!

창대로 땅을 찍으니, 창날을 따라 허공을 유영하던 댓잎 수십 장이 산산이 조각났다.

“음, 좋아. 충분해.”

마음 같아선 한나절은 더 수련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했다.

“사숙이십니까?”

그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숲에서도 가장 짙은 그림자가 진 곳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도 없는데, 그 소름 끼치는 호칭은 집어치우지 그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자네야 말할 것도 없고, 내 감각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이 풀어질까 봐.”

“우리 둘의 감각마저 흐트러트리는 고수가 벌써 개입했다면, 이번 임무는 실패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호정이 창을 쥔 채 팔짱을 꼈다.

“밤이 깊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왜 나오셨습니까?”

“네 녀석에게 선수를 뺏긴 거다. 수련이나 할까 싶었지.”

“그렇군요. 저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쓰십시오.”

“그 전에.”

파아아아앙!

패율의 검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기가 막힌 기습이었다. 놀랍도록 빠르고 갑작스러웠지만, 거기에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검격이었다.

연호정이 팔짱을 풀고 창대 끝을 발로 차올렸다.

쩌엉!

창대를 스치고 지나간 검이 멈추었다.

피이이이잉!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창대를 따라 댓잎이 회전했다.

연호정이 창대를 쥐었다.

후우웅.

바람이 멈추었다.

패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안 되는군.”

“멋진 기습이었습니다. 살기를 그렇게까지 죽인 검격은 굉장히 오랜만이로군요.”

“건방진 말투군. 그나저나 오랜만이라니, 네놈 인생도 어지간히 살벌했던 모양인데.”

연호정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패율은 납검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따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하면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안 돼.”

“잉?”

그제야 연호정은 패율의 망설임을 읽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심각함이 어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게 뭡니까?”

패율은 또다시 말이 없었다.

망설임이 점점 커지는 게 확연히 보인다. 연호정은 긴장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패율이 입을 열었다.

“무종문이라면, 어찌 되었든 각자의 절기를 꺼내 들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당가의 딸내미를 데려온 것도 암기의 투로(套路)를 읽어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지?”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패율이 헛기침을 했다.

“일단 이것 좀 보게.”

“예?”

사라라락!

패율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뭐야, 이건?’

패율답지 않게 선이 부드러운 검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력이 낮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유려한 검로로 적을 끌어들인 후 일격필살의 공격으로 반격하는 기술이 일품이었다.

‘점창에 이런 무공이 있었나?’

하기야 구대문파 정도 되면 각 문파가 내세우는 대표 절기에 필적할 만한 무공이 여럿 있을 것이다.

‘기존보다 실전적인 맛은 떨어지지만, 검법의 수준 자체는 더 높아.’

잠시 후, 패율이 검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살짝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정도 무공 시연으로 숨이 찰 리도 없을 텐데.

“허험! 어떤가?”

“점창의 무공입니까?”

“뭐…… 그렇지.”

연호정은 솔직하게 말했다.

“뛰어난 검법입니다. 점창 특유의 날카로움과 극단적인 면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조화가 무척 탄탄합니다. 특히 반격술이 굉장하군요.”

“그, 그래?”

“예. 다만 연환(連環)의 흐름에 있어서 군데군데 빈 곳이 보이지만, 굳이 흠을 잡기에는 지나치게 매력적인 무공인데요? 상승의 경지에 오를수록 실전미(實戰美)도 보완이 될 것 같습니다.”

패율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통할 것 같은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께서는 그 검법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으신 듯합니다.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허허.”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패율이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렇게 봤으면 됐네.”

“예?”

“커험! 난 먼저 가네.”

“수련은요?”

패율은 대답도 안 하고 사라져 버렸다. 발걸음에서 왠지 모르게 흥분의 기색이 느껴졌다.

연호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갑자기? 일방적으로 고백만 하고 도망치는 머저리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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