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정면 돌파 (2)
“으음.”
반백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넘긴 사내가 나직이 신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몸 여기저기를 네 명의 여인이 정성껏 주무르고 있었다. 어찌나 열심인지 네 여인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은 채였다.
“이제야 좀 시원하구만.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몸이 영 예전 같지 않단 말이야.”
낮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호리호리한 외양답지 않게 굉장히 묵직했다.
부르르.
여인들이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사내의 목소리는 참으로 묘했다. 듣기 좋은 저음인데도 듣는 이의 신경을 날카롭게 후벼파는 느낌이랄까.
마치 목소리 자체가 하나의 무공이라도 되는 양, 살벌한 위압감이 가득했다. 공격적인 인상이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해서, 회랑단은 그렇게 증발해 버렸다고?”
“그렇습니다.”
사내의 앞, 마의를 입은 중년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멸했다고 합니다.”
“쯧.”
사내가 혀를 찼다.
“십 년 동안 새외 일대를 휩쓸었다고 하더니만, 결국 근본은 마적이라 이건가.”
회랑단은 평범한 마적단이 아니었다. 그들이 작정하면 어지간한 군소 문파는 손쉽게 쓸어 버릴 수 있으며, 전략을 세우면 구대문파급 강자라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전투력 면에서는 이렇게 폄하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단 말이다. 그러나 사내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중년인은 슬쩍 사내를 보았다.
나른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빛은 공격적인 목소리와는 달리 지독할 정도로 무심했다.
‘다시 봐도 엄청나구나.’
우우우웅.
단전에 꽉 찬 내공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분의 말씀이 옳았어. 교(敎)의 대사제(大司祭)님 정도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더니, 성천십심좌는 다 이런 괴물인가.’
힘을 발산한 것도 아니요,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눈을 마주했을 뿐인데 보이지 않는 사슬이 사지를 결박하는 듯했다.
인간 본연이 가진 위압감에, 궁극의 경지를 엿본 절대자의 힘이 무의식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는 한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 자체가 재앙.’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중년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회랑단이 기대 이하였던 것도 맞습니다만, 무림맹에서 파견한 부대 역시 보통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멸사군이라고 했던가?”
“정확히는 탕마군과 멸사군, 두 개의 부대라고 합니다.”
“탕마와 멸사라. 이름 한번 노골적으로 지었군.”
사내, 투왕 양천의 얼굴에 작은 흥미가 일었다.
“그 멸사군이라는 놈들 말이야. 얼마 전까지 흑도 문파 여럿을 박살 내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그중에는 홍요회도 있었습니다.”
“홍요회라.”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한 끼 식사 거리도 안 되지만, 아해들이 상대하기에는 다소 버거운 놈들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무공이 강한 건 아닌데, 목표물을 죽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입니다. 금용(禁用)된 화기(火器)를 쓰는 건 물론, 관부 쪽 인사에 대한 의뢰까지 받는 놈들이니까요.”
“그건 마음에 드는군.”
양천의 눈이 반짝였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죽인다…… 남들 신경 안 쓰고 제 갈 길을 가는 게지. 그런 놈들이 그리 허무하게 당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중년인은 침을 삼켰다.
‘여전하구나.’
양천은 위험한 사람이다.
그가 사람을 판단하는 제일 척도는 무공도, 머리도 아니었다. 바로 ‘선(線)’이었다.
거리낌 없이 선을 넘을 수 있는 자는 능력이 없어도 아낀다. 하지만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머리가 굳은 자는 경멸한다.
양천이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였고, 단시간에 흑도를 이 정도 규모로 규합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회랑단이 그 지경이 되어 버렸으니 사도(師徒) 놈들도 똥줄이 타겠군.”
중년인의 안광이 반짝였다.
“한 번 더 숨어들 것 같습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신중한 건지, 아니면 겁이 많은 건지 모르겠어. 과감할 때는 과감할 줄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을 터인데. 녀석들은 그게 문제야.”
“…….”
“왜? 네 고향 사람들이라고 기분이 나쁜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르신을 모시겠다 다짐한 순간부터 제 혼은 이곳에 안착했습니다.”
“크하핫! 말은 좋구나.”
양천이 광소를 터트렸다.
쿠구구구궁.
중년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천의 몸을 주무르던 여인들이 일순 호흡 곤란을 겪더니,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엄청난 내공!’
웃음소리에 무지막지한 힘이 실렸다.
귀를 파고드는 위험천만한 기운이 몸의 균형을 무너트리고, 나아가 뇌까지 흔들어 버린다. 심지어 미세하게나마 건물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우우우웅.
중년인은 서둘러 내공을 끌어 올려 머리와 귀를 보호했다.
어느새 웃음을 멈춘 양천이 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좌우로 쓰러진 여인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흑양(黑羊).”
“예, 어르신.”
“오늘 아침, 내 앞으로 이런 서신이 왔다.”
스르륵.
어느새 양천의 손 위로 붉은 서신 하나가 떠올랐다.
중년인, 흑양의 눈이 흔들렸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극한의 내공을 이용, 손을 대지 않고 물체를 조종하는 경지다.
양천은, 그러한 경지에서도 끝을 본 모양이었다. 대기를 밀어 내는 진기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순수한 의지로 물체를 조종하는 듯했다.
가히 초능(超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경지. 저 정도면 이미 사람이라 불릴 까닭이 없다.
후우웅.
붉은 서신이 두둥실 날아가 흑양의 앞에 놓였다.
흑양이 고개를 조아리곤 서신을 펼쳤다.
그의 눈이 커졌다.
“재미있지 않으냐?”
“……!”
“시대를 대표하는 영웅은 본신의 능력 외에 시운(時運)과 인복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있지. 그 말대로라면, 나 역시 영웅의 조건에 부합하는 이가 아니더냐.”
흑양의 두 눈에 강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너도 알다시피 어중이떠중이까지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말이다. 소문대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놈들이라면 휘하에 두어야겠지.”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네가 한번 놈들을 시험해 볼 테냐?”
흑양이 고개를 숙였다.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흑양이 자리를 떴다.
흑양이 사라지자 양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도 자취를 감췄다.
“무슨 짓을 해도 내 사람이 되진 않겠군.”
흑양은 능력 면에서 확실히 휘하에 두고 싶은 인재다.
그러나 놈에게는 충심(忠心)이 없었다. 교(敎)와의 연을 끊고 자신에게 왔다고 하지만, 양천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과장된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흑양은 교의 사람이니까. 자신의 성격과 능력을 그대로 교에 보고할 테니까.
마음 같아선 한 주먹에 때려죽이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양천의 얼굴에 나른한 빛이 떠올랐다.
‘믿을 만한 놈이 없어.’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놈에게 편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현실에 새삼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양천은 그것이 감수할 만한 일이라고 믿었다. 소인(小人)은 눈앞의 일에 집착하지만, 대인(大人)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법이니까.
다만, 슬슬 피곤하긴 했다.
“쯧, 흑도는 이게 문제야. 키워 볼 만한 놈이 드물다는 것. 진정 내게 혼을 바친다면, 능히 전부를 안겨 줄 것을.”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우우웅.
기절한 네 명의 여인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뒷짐을 지고 회랑으로 들어가는 양천의 뒤를 네 명의 여인이 따랐다.
* * *
충분한 휴식을 취한 일행은 곧장 호남 서부로 진입했다.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편안했다. 굳이 은밀하게 움직이지도 않았고, 주변을 신경 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연호정은 일행의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모두에게 농담도 많이 걸었고, 필요할 때는 함께 수련도 했다.
가득상은 그런 연호정의 언행에 내포된 의도를 간파해 낸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함이군.’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일행의 좌장은 연호정이다. 그런 연호정이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니, 자연스레 일행의 분위기도 밝아졌다.
그리고 그 노력은 결실을 거둬, 호남에 들어섰을 즈음에는 당상아 역시 웃음이 잦아졌다.
가득상이 미소를 지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야.’
계산이든 본능이든.
연호정은 임무마다 본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웃고 떠드는 것이라도 무리 없이 수행해 냈다. 친한 사람 앞에서야 장난도 곧잘 치지만 기본적으로 과묵한 편에 가까운데, 지금 보여 주는 모습에서는 또 위화감이 없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엉?”
연호정의 말에 가득상이 씨익 웃었다.
“잘생김이 가득 묻었구나.”
“저도 압니다, 대사형.”
“우리 셋째는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하하!”
어느새 일행은 서로를 향한 호칭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분위기가 이끌어 낸 변화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새 일행은 진정 서로를 사형제지간처럼 여겼다.
“그나저나, 사숙은 어디 계신답니까?”
가득상의 눈이 반짝였다.
사숙이라 함은 바로 패율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앞으로 얼추 이백 리가량 남았으니, 쉬엄쉬엄 가면 내일 저녁쯤에는 뵐 수 있을 것 같다.”
“빨리 뵙고 싶은데, 수련도 할 겸 뛰어 볼까요?”
“우리 셋째는 어찌나 단련을 좋아하는지.”
가득상이 당상아와 제갈아연에게 말했다.
“몸도 풀 겸 살살 뛰어 볼까?”
“네, 대사형.”
“가자.”
투우우우웅!
네 남녀가 경쾌하게 신법을 펼쳤다.
일행 중 가장 무공이 떨어지는 사람은 제갈아연이었다. 그러나 제갈아연의 무공도 그 나이대에서는 상당한 편이었으며, 특히 신법에 관해선 당상아 못지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관도를 돌파한 일행이 어느새 백오십 리를 주파했을 때였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시작됐군.’
그는 일행을 훑는 시선을 느꼈다.
굉장히 은밀한 시선이었다. 은신술은 별것 아니었지만 보는 듯 마는 듯 묘했다.
‘오랜만이야.’
연호정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흉포함과 그리움, 약간의 긴장과 편안함 등의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소였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이런 시선은.’
백도 무림에서 사람을 미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
비로소 연호정은 체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알던 그곳, 반평생을 몸담았던 오물 가득한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그동안 한 점의 그리움도 느끼지 않았던 그 세계에 막상 발을 들이자,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향수에 잠기게 된다.
하지만 향수는 향수고, 일은 일이었다.
“사저.”
“응?”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주변에 벌레가 왱왱거리는군요.”
순간 당상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니? 난 모르겠는데?”
“제가 원체 예민하잖습니까. 방위를 알려 드릴 테니 좀 치워 주십시오.”
당상아가 빙긋 웃었다.
“셋째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제 역할과 완벽하게 동화된 그녀였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을 가장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호정의 눈에 은근한 살기가 일었다.
“후방부터 시작할까요?”
“좋아.”
“좌측 후방 네 번째 소나무 뒤, 우측 후방 가장 큰 바위 옆 그림자.”
순간 당상아의 두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피피피피핑! 퍼버벅!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쏘아진 암기가 피 보라를 만들어 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서늘한 미소를 본 당상아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멋진 솜씨입니다, 사저.”
“고마워.”
“본격적으로 시작하시죠. 하나도 놓치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
파파파파팡!
비수가 그물처럼 사방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