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고향으로 (6)
반나절 후.
“허허, 이 사람의 거처에 오신 것은 오랜만 아니오?”
“그렇소?”
“근래 소원하긴 했소이다. 탕마멸사군이 출정하기 전이 마지막 아닌가 싶소.”
“사소한 건 금방 잊는 주의라.”
여전히 까칠하구먼.
모용군은 빙긋 웃었다. 당관의 저 까슬까슬한 성격이 오히려 모용군에게는 활력이었다. 당관은 분명 나름의 지혜와 대처 능력이 상당한 편인데도, 굳이 스스로를 숨기려 들지 않았으니까.
평생을 숨기고 뒤를 치고 함정을 만들어 적을 유인했던 모용군에게 있어, 솔직하고 오만한 성정으로 한 가문의 정점에 오른 당관이란 존재는 꽤 신비로운 인간상이었다.
“자, 한잔하시구려. 용정이오.”
당관이 잔을 받으며 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시더니.”
“허허, 귀한 손님들께만 내드리는 차요. 개인적으로 즐기진 않소이다.”
“귀한 손님이라면, 제갈문호를 얘기하는 거요?”
제갈문호.
제갈가주도, 제갈 군사도 아닌 제갈문호다. 당관의 오만함은 여전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제갈가주 역시 귀한 손님이외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가만히 모용군을 주시하던 당관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전에 얘기된 거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모용군은 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이번 양천 건 말이오?”
“그렇소.”
“얼마 전, 제갈가주와 연가주가 이 사람을 찾아왔더이다. 양천을 조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을지 꾀를 빌려 달라 하더군.”
“그래서 알려 주었소?”
“그렇소.”
“왜? 이제는 그들과 화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소이까?”
확실히 예상외야.
성격이 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헤쳐 나온 아수라장이 다르기 때문일까?
이런 부분에서 이리도 날카롭게 반응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활력을 안겨 주는 사람이었다.
“화해라…… 화해하면 또 어떻소이까? 그들을 방심케 한 후, 화려하게 뒤통수를 치는 것도 나름 괜찮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오.”
모용군이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과연 방심할는지는 모르겠소이다. 오히려 더 의심하면 의심했지.”
학정홍(鶴頂紅)처럼 독하고 폭우이화침(暴雨李花針)처럼 날카로웠던 당관의 눈빛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들과 손을 잡으려 했던 건 아니다?”
“내가 손을 내민다고 잡아 줄 족속들도 아니외다.”
“귀하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소만, 보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라도 직관적인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소이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손을 잡지 않았소. 그들은 내가 거꾸러뜨려야 할 대상 혹은 내 권력욕을 위한 희생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외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시기라고 이해하겠소.”
“정확하오.”
당관이 재차 차를 마셨다. 묵직하고도 청량한 향이 심신을 편안하게 이완시켰다.
“한데 그가 그렇게 위험하오?”
“양천 말이오?”
“그렇소.”
“알 만하신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성천십삼좌는 하나같이 인간의 한계를 깨부순 괴물들이오. 그리고 양천은, 바로 그 십삼좌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최강의 투사외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니오. 다만 무력과 지략은 별개의 문제 아니겠소.”
모용군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실, 나 역시 양천을 싸움질만 잘하는 무뢰배라고 생각했었소. 그에 대한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오.”
“하면 머리가 있는 자란 말이오?”
“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영부영 상대할 만한 위인은 아닌 것 같소.”
당관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어영부영 상대할 자가 아니다? 모용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상대가 정말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껏 모용군이 괴물이라 평가한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하지만 그 둘은 가능성 넘치는 젊은이들일 뿐 완성된 대기(大器)는 아니었다. 진짜로 감당 못 할 재앙까지는 아닌 것이다.
즉, 양천에 대한 모용군의 평가는 굉장한 고평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선 것이오?”
“음?”
“그래서 이번 작전의 지휘권자로 앉게 해 달라고 그들과 교섭한 거요?”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교섭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먼저 제안한 것은 오히려 저쪽이었소.”
당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갈문호 쪽에서?”
“그렇소.”
“그 여우 같은 작자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꿍꿍이가 없소. 이번만큼은.”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이런 심각한 문제로 장난질을 칠 만큼 과감한 자는 못 되기 때문이오.”
“흠, 그렇다면 반대로 제갈문호 측에선 당신을 어느 정도 의심할 수 있겠군.”
당관이 보는 모용군은 필요하다면 충분히 과감해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의심의 눈초리야 거두지 않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들 역시 이 사람을 믿고 있을 게요. 그러니 직접 찾아왔겠지.”
“어째서?”
“제갈가주,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오.”
“양천이 그리 두려운 자란 말인가.”
모용군의 얼굴에 서리가 내렸다.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본디 자존심 강한 사자 무리를 휘어잡는 것보다 눈치 빠른 고양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이 백배는 더 어려운 법이오. 한데 양천은 그걸 해냈소.”
“흑도 규합.”
“아까 회의 때 제갈가주가 얘기했듯, 우리는 정보력 부문에서 흑도보다 한 수 아래외다. 하지만 지금껏 그걸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요.”
“놈들이 하나로 뭉치지 않았기 때문이오?”
“정확하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양천 홀로 했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중요한 것은 중원 전역에 눈을 드리운 치명적인 칼이 양천의 손에 쥐어졌다는 사실 자체에 있소.”
“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나, 나는 양천이란 작자를 믿지 않소. 대놓고 말해서 손을 잡을 만한 위인도 아니오. 즉, 내게 있어 그는 아군이 될 수 없는 폭탄 같은 자라는 뜻이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공동 전선을 펼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로구먼.”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권력이란 건 마물이오. 때마다 밥 주고 다독여 주면 권력도 개처럼 기를 수 있지만, 이곳저곳에서 빌어먹게 시키면 그때부터는 주인도 먹잇감으로 보는 게요.”
“…….”
“나는 양천이 쓸 만한 인간이라 해도 그이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소이다. 왜? 그와 손을 잡는 순간 내가 기르고 싶은 권력이란 개새끼가 미쳐 날뛸 게 분명하거든.”
“권력이라…….”
“나는 권력마저 다스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권력의 노예가 되어 추한 욕심쟁이로 남고 싶진 않소이다.”
역사상 수많은 권력자가 그랬듯 말인가?
당관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굳이 뱉지 않았다. 지금은 습관처럼 비아냥댈 때가 아니었다.
물끄러미 모용군을 보던 당관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흡족해하더이다.”
“음?”
“공공대사 말이오. 당신과 연호정, 그 애새끼가 웃으며 대화하는 걸 보며 그렇게 흐뭇해하더군.”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소?”
“공공대사는 봉공회의의 좌장이나 마찬가지요. 주인 없는 자리에서 대장 노릇 하는 인간에게, 권력 다툼이나 하는 아귀들이 얼마나 꼴 보기 싫었겠소.”
날카로운 사람이야. 생각보다 훨씬.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내게 찾아와 경고 한마디 해 주고 가더이다. 그러겠다 답해 주고 돌려보냈소.”
“태산북두의 위상 하나만 믿고 설치는 얼치기 땡중이오. 오래 상대해서 좋을 게 없어 보이더군.”
“맞는 말이오. 공공대사는 손잡이 없는 보검이거든. 쥘 사람도, 손잡이를 달아 줄 사람도 없소.”
“소림이니까?”
“소림이라서.”
모용군이 차를 들이켰다.
“그나저나, 내 문제는 그렇다 치고 귀하는 어떻소?”
“무슨 말이오?”
“연호정 말이오. 그놈이 귀하에게 부탁한 당가 장인의 능력 말이외다.”
당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어제 왔소.”
“음?”
“본가에서 보낸 물건이 도착했소. 그 망할 놈과 멸사군에게 건네줄 선물이.”
* * *
마차 몇 수레가 파군각으로 들어섰다.
“흐음.”
수레에 쌓인 물건을 살펴보던 연호정이 흡족한 듯 웃었다.
“좋아. 역시 최상품이군.”
연위가 물었다.
“당가에서 온 물건이더냐?”
“그렇습니다.”
“어디, 나도 한번 보자꾸나.”
먹물빛 둥그런 강철판을 들어 본 연위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굉장하구나.”
“그렇지요?”
“만년묵철(萬年墨鐵)을 이리 완만하게 가공할 수 있다니. 당가 장인들의 실력이 천하일품이라더니만, 그 말에 과장이 없었구나.”
“게다가 이 무게를 보십시오. 강도를 유지한 채 최대로 경량화했습니다.”
“합금인가?”
“그럴 겁니다.”
연위는 혀를 내둘렀다.
“멸사군 전체가 걸칠 수 있는 경갑이라니.”
중갑보다 경갑에 철이 훨씬 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통상의 경우, 경갑 갑주는 가죽이나 천을 겹친 것 위에 금속을 덧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레에 실린 경갑주는 달랐다. 흉갑(胸鉀)과 비갑(臂鉀), 견갑(肩鉀), 각반(脚絆) 모두가 만년묵철이 주가 된 당가비전의 합금제였다.
극상의 강도를 유지하고 무게만 줄인, 대(對) 무림인용(武林人用) 경장 갑주다. 움직임에 제약을 주지 않고 무게도 가벼워 몸이 날랜 무림인들이 쓰기에는 제격이었다.
묵비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흉갑과 견갑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요?”
“안 돼. 전부 차도록 해.”
“꼭 그래야 하나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게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 내에선 무조건 차는 게 좋다고 생각해.”
“왜요?”
“군(軍)은 물론 문파별로 제복(制服)이나 동일한 병장기를 양산하는 것은 소속감 때문이다. 더하여 훈련이 충분히 잘 되고 사기가 높아지면 집단응집성(集團凝集性)도 올라가거든.”
“집단응집성…….”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정의 말이 옳다. 멸사군은 구대문파와 육대세가의 자제들이 모인 무력 집단이다. 군장인 호정의 말을 잘 따르기는 해도, 아직 본인들의 소속을 멸사군이 아닌 자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많을 게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호칭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멸사군 전용 갑주와 호칭.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더 강해질 수 있어요.”
“좋은 생각이다.”
묵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네가 해야 해.”
“네?”
“내가 없을 때, 네가 녀석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묵비의 눈이 커졌다.
“내, 내가요?”
“훈련 일정이나 강도는 알려 줄게. 다만 강도의 점진적인 상향이나 적절한 휴식은 알아서 조절해야 할 거야.”
“나는…… 그, 그런 건 잘…….”
“자신이 없어도 해. 너는 멸사군의 부장이다. 내가 없을 때는 네가 멸사군의 수장이란 말이야.”
“윽.”
“하나만 말해 주마. 수장이란 아랫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줄 알아도 눈치를 봐선 안 되는 거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너는 충분히 능력이 있어. 스스로를 믿고 과감하게 이끌어 봐.”
“콜록.”
연위가 물었다.
“그나저나 출정까지는 닷새쯤 남았다만, 그 새에 준비할 게 있느냐? 있다면 말해라. 애비가 도와주마.”
“괜찮습니다. 몸 관리만 잘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러냐?”
“예. 다만…….”
연호정이 저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담벼락 너머 무수히 많은 전각이 즐비한 무림맹 내성.
그중 그의 의식이 향하는 곳은 바로 당가였다.
“한 명만 더 데려갈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