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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93화 (193/963)

193화. 고향으로 (5)

“투왕 양천이라.”

“그렇습니다.”

회의장에 침묵이 어렸다.

복호사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자의 제자들이 세상에 나섰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충분히 경계해야 할 상황이긴 하나, 그 많은 제자가 움직일 동안 투왕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습니다만, 근래 양천이 흑도를 규합하고 일대 지역 상권을 무서운 속도로 장악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허!”

“이 부분에 관련하여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워낙 급작스러운 정보였기에 부가적인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뒤늦게 알려 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용화진인이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제아무리 급작스러운 정보였다고는 해도 다름 아닌 신선제왕과 연관된 정보입니다.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딴지를 거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용화진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었다.

정보는 곧 힘이다. 그리고 백도의 힘이 집결된 무림맹의 정보력은 천하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하다.

그 힘을 최전선에서 다루는 사람이 바로 제갈문호요, 가득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중요 사안을 즉각 얘기하지 않은 것은 자칫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용화진인은 선례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었다. 혹여 정보라는 강력한 힘을 제갈문호 홀로 독식할까 봐 걱정한 것이다.

공공대사가 손을 들었다.

“제갈 군사는 우리 모두가 만장일치로 꼽은 군사부의 총책임자입니다. 바로 알리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볼 수 있으나, 이유도 없이 그랬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용화진인이 헛기침을 했다. 소림사의 주지가 나서서 두둔하니, 더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용화진인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정보를 재확인한다는 이유 외에, 필경 다른 이유도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탕마멸사군이 회랑단을 섬멸하러 출정했을 때, 은밀히 본맹 정보부에 접근한 모종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순간 회의장 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공공대사가 물었다.

“정보부에 접근했다는 것은……?”

“무림 전역에 걸쳐 있는 우리 백도의 정보망을 교묘하게 흐트러트리려 한 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

“그들의 움직임은 지독할 정도로 은밀했습니다. 가득상 고문이 아니었다면 수상함을 눈치채지도 못했을 정도였지요.”

“백도의 정보망을 흐트러트린다? 그리되면 정확히 어떤 문제가 생기는 거요?”

“거짓을 진실이라 오인하게 만들 수도, 진실을 거짓으로 꾸밀 수도 있습니다. 정보 하나로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봉공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갈문호가 원형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어지러이 얽힌 푸른 실선들을 가리켰다. 중원 전역을 가로지르는 복잡한 선들은 무림맹으로 향하는 정보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무수히 많은 푸른 선 중, 하나만 붉은 선으로 변해도 정보의 혼선이 벌어집니다. 본디 복잡한 구조물일수록 작은 문제에도 치명적인 결과가 나는 법, 정보망도 그렇습니다.”

“허어.”

공동파 장문인, 등천교가 말했다.

“무림맹이 창설된 지는 일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백도의 정보망은 수백 년 동안 쌓아 만든 견고함의 결정체입니다. 복잡하다 한들, 단순한 오류 하나로 그리 치명적인 결과가 나온단 말입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우리의 정보망은 복잡하면서도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적의 침투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으며, 하나의 망이 파괴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대체 정보망도 존재하지요.”

“한데요?”

“칠십이 개.”

“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의문의 무리가 본맹의 정보망에 혼선이 생기도록 침투, 교란한 거짓 정보망의 개수가 일흔두 개였습니다.”

등천교의 눈이 흔들렸다.

정보 쪽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였지만, 일흔둘이라는 숫자가 주는 심각함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즉, 의문의 적은 작정하고 본맹의 정보부를 뒤흔들 생각이었던 겁니다. 만일 이것을 시기적절하게 발견하지 못했다면, 새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갔음은 물론 엄청난 인적 자원이 소모되었을 겁니다.”

“…….”

“물론, 그 사이에 본맹의 정보망을 건드렸던 의문의 무리는 절대 들키지 않을 세작들을 박아 두겠지요.”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한 번 털려 버린 정보망을 두 번 못 털겠습니까? 아마 그러한 시도가 꾸준히 생겨났을 것이며, 그때부터는 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정보전(情報戰)이 발발했을 겁니다.”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더더욱 차가워졌다.

남궁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그 의문의 무리가 흑도입니까?”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투왕 양천 휘하에서 움직이는 정보부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무능력한 흑도 무리가 그처럼 고차원적인 공격을 어찌……?”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는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제갈문호가 봉공들을 둘러보았다.

“고래로 흑도는 언제나 백도의 아래였습니다. 가끔 불세출의 천재가 흑도를 규합하여 중원의 큰 해악을 끼치기도 했으나, 결국 악은 한때일 뿐이지요. 즉, 백도는 언제나 흑도의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흑도 놈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으리라고는…….”

“다만, 흑도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요. 잡초처럼 끈질긴 그들의 저력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정보. 정보로군.”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장강 이남 쪽, 중원 남부의 정보망을 가리켰다.

붉은 선과 하얀 실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그 복잡함은 무림맹의 배 이상이었다.

“힘없는 자들의 생존 방법. 그것은 정보입니다. 힘으로는 밀리니, 눈치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지요. 흑도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존한 겁니다.”

“…….”

“감히 말씀드리건대, 정보력에 있어서 우리는 명백히 흑도보다 한 수 아래입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백도 무림인 중 흑도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도가 약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위험했지만, 무너트리려고 작정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 관한 관심이 적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런 그들이 양천이라는 절대강자 밑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강한 긴장이 드리워졌다.

“세력의 힘 이전에, 중원 제일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는 강자가 무림 최고의 정보력까지 휘두르게 된 셈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향후 지독한 위협이 될 겁니다.”

잠시간의 정적이 일었다.

말이 제법 많았지만, 결국은 이것이다.

백도는 흑도를 없애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없애지 못한 것이다.

그들에겐 언제, 어느 때라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천이라는 괴물이 그 눈을 훔쳤다.

“말씀만 들어도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모두의 눈이 승현진인에게 몰렸다.

승현진인이 다소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군사께서 왜 이 정보와 문제를 즉각 알리지 않으셨는지.”

“……짐작하고 계시는군요.”

“그런 이유가 아니기를 바랍니다만.”

“승현진인의 짐작대로입니다.”

제갈문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제가 무림맹의 수뇌부들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응은 격렬했다.

“뭐, 뭐라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오!”

“설마하니 우리 중에 세작이라도 있다는 뜻이오!”

공공대사가 재차 손을 들었다.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주춤했다.

“빈승은 자극적인 언사로 우리의 신뢰에 금이 가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하나, 지금은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

“우리 봉공들이 이런 식으로 일희일비를 하니, 군사께서도 입을 열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화를 내던 봉공들이 헛기침을 뱉었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제갈 군사의 발언은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들읍시다. 듣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래도 문제가 된다 생각하면 그때 열을 올려도 늦지 않습니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군사라는 직책은 천하제일의 협객에게도 십 할의 신뢰를 건넬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 버리는 순간 적에게 빈틈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괜한 의심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만, 저는 앞으로도 봉공분들은 물론, 훗날 선출될 무림맹주조차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봉공들이 연신 헛기침을 했다.

공공대사가 나서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가장 의심받을 사람은 당신이다.’ 따위의 소리도 꺼냈을 것이다.

당연히 쓸데없는 의심만 불러일으킬 게 뻔한 발언이다. 공공대사는 말 몇 마디로 괜한 싸움을 일으키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의심스러운 정황은 없었습니다. 여기 계신 봉공분들은 물론이거니와 맹의 수뇌부 중 누구도 적과 내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는요.”

“…….”

“적의 노림수를 안 시점부터 가득상 고문은 즉각 대응했습니다. 적들은 물러났고, 적어도 당분간은 우리를 노리지 못할 겁니다.”

제갈문호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래서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승현진인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적기라는 말씀은?”

“투왕 양천. 그에 관해 철저히 조사하기에 적기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허어.”

남궁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듣기로 양천은 독하고 흉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하였습니다. 눈치도 빨라서 이쪽에서 조사를 감행하려는 순간 더 깊이 숨어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남궁 가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건드려 보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인물인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타초경사의 우(愚)를 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해서 최고가 필요합니다.”

“최고?”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모용군을 보았다.

지금껏 눈을 감고 대화를 경청하던 모용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요원 침투, 정보 교란, 때에 따라서는 요인 암살까지도 능숙하게 해치울 수 있는 전문가. 그리고 그러한 전문가와 함께 탄력적인 지략을 선보일 수 있는 지휘권자가 필요합니다.”

남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말은 않겠습니다. 하면, 그 중요한 임무를 맡을 만한 자를 생각해 두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회의장 밖을 향해 외쳤다.

“들어오시게.”

덜컹! 끼이익.

문이 열리고,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청년을 본 봉공들의 눈이 커졌다.

“강력한 무공과 수준급의 안목은 물론, 필요하다면 어떤 술수라도 쓸 수 있는 과감성과 응변의 기지를 갖춘 자.”

제갈문호가 청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선택한 실무조의 좌장입니다.”

청년,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봉공들께 인사드립니다. 멸사군장 연호정입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