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고향으로 (3)
“미정?”
“예.”
사질의 공손한 대답에 패율이 턱을 쓰다듬었다.
“즉, 당분간은 맹에서 지낸다는 뜻이렷다.”
“그렇습니다, 사숙님.”
“음.”
골똘히 생각에 잠긴 패율.
척강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사숙님.”
“왜 그러느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녀석은 변한 게 없군.
척강은 점창에서도 유독 호전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던 아이였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깍듯했고, 사형제들에게는 위험한 인물로 각인되었다.
그런 녀석이 멸사군으로 들어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나이의 청년이면 충분히 오만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척강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패율은 척강의 그런 면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다른 건 몰라도 일관적이긴 하다.
“물어봐라.”
“다른 사숙들께선 다 본산으로 돌아가셨는데, 사숙께서는 어찌 맹에 남아 계시는지요?”
패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왜? 하는 것 없이 빈둥거리는 꼴이 영 보기가 싫으냐?”
“헉! 아, 아닙니다! 정말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인데, 사질의 얼굴이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패율이 나른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댔다.
“본산으로 돌아가 봤자 달리 할 일도 없다. 수련의 연속일 뿐.”
“아…….”
척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패율은 무공광(武功狂)이자 전투광(戰鬪狂)이었다. 무공의 궁구와 수련을 숨 쉬는 것과 동일시했고, 싸움이라면 상대가 누구라도 가리지 않았다.
그런 사숙이 저런 발언을 한다는 게 의아했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것이겠지.’
척강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장문인께서 안 보이시네요? 봉공회의가 열린 모양입니다.”
“뻔하지.”
의논할 게 뭐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애초에 복잡한 일을 싫어하는 패율로서는 높으신 분들의 일 처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른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패율의 눈에 무기력함이 가득했다.
‘역시 무림맹에도 별달리 재미있는 일은 없군.’
딱히 보직을 얻을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다.
다만 헤아릴 수 없는 고수들이 모일 테니, 그들과 한바탕 멋들어진 승부를 나눠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오직 그것 하나만 보고 온 길이었다.
한데 지금까지 승부다운 승부를 겨뤄 본 적이 없다. 고수는 많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렸다.
괜히 튀어 봤자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은 싸우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한 자리 차지할 생각으로 왔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직 맹에 붙어 있는 건,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한 탓일까.’
패율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것도 심마(心魔)로군.’
심마가 별건가.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고 나답지 않은 언행이 튀어나오면 그게 바로 심마다.
‘안 되겠군. 조만간 맹을 떠야겠어.’
근래에는 그 좋아하던 수련도 띄엄띄엄했다. 그간 쌓아 놓은 실력이 줄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으니 유지만 하는 수준이랄까.
이제 와선 어떻게 해야 무공이 발전하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살면서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였다.
“여어!”
창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척강의 눈이 커졌다.
“어? 군장님이?”
패율의 눈이 번쩍였다.
‘군장? 연호정?’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졌다.
“척강 거기 있지? 나 좀 보자고.”
척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숙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척강이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나른한 자세를 고수하던 패율은 괜스레 호기심이 일어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헉! 군장님!”
“미안하다. 잘 쉬고 있는데 불러서.”
“아닙니다. 한데……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시네요?”
연호정이 어깨를 매만졌다.
“아버지랑 한판 했거든. 못 당하겠더라, 아직은.”
“연가주님이랑요?”
“그럼 내 아버지가 그분 빼고 또 있다더냐?”
패율의 눈이 반짝였다.
연가주? 판관검 연위?
‘비무라…… 부자지간이라 이건가.’
순간 패율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강렬한 호승심을 느꼈다.
판관검, 판관대협이라고도 불리는 연위의 무공은 패율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 연씨 부자가 무림맹 내성 연무장에서 비무를 벌였을 때, 그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연위의 무공은 패율이 추구하는 바와 완전히 달랐다. 격식 있고 품격을 지키는, 무공의 살상력보다 선연한 검도(劍道)의 완성을 추구하는 정통적인 검법은 일견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답답함 속에 깃든 검력(劍力)은 충격적일 만큼 대단했다. 일검, 일검에 실린 천근의 압력. 극도로 실전적인 연호정의 무공을 뿌리부터 무너트리는 완성형의 검법이었다.
‘그리고.’
패율의 눈이 연호정에게 닿았다.
‘그런 연가주의 철벽같은 검법을 흐트러트리며 철저한 살공(殺功)으로 몰아붙인 저 녀석의 무공은 더 인상적이었어.’
연위보다는 연호정이다.
연위와도 싸워 보고 싶지만, 연호정과는 정말 몇 번이고 승부를 가려 보고 싶었다.
단순히 연호정의 무공이 실전적이라서가 아니었다. 연호정의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벅찬 감정이 느껴졌다.
선천적으로 승부사의 기질을 풍부하게 지닌 놈이었다. 그러면서도 적을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는 전사(戰士)의 기질도 가졌다.
‘마치 나와 비슷해.’
점창의 무공은 구파 중 가장 실전적인 편에 속한다.
그리고 패율은, 그 실전 무학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척강 역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깊이가 달랐다.
‘싸워 보고 싶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던 나른함과 공허함이 씻은 듯이 날아갔다. 연호정을 보는 패율의 눈빛이 점점 뜨거워졌다.
“한데 무슨 일로…… 아! 일단 들어오세요. 차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괜찮다. 금방 갈 거라서.”
“아, 예.”
“그나저나, 너 바쁘냐?”
“전혀요.”
“내상은 아직 안 나았고?”
“조금 남아 있긴 합니다만, 얼추 열흘이면 다 나을 것 같긴 해요.”
“그래?”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 좀 그런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리고 양천과 삼교의 관계를 자세히 파헤쳐 보기 위해 직접 나선 임무다.
하지만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일 처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나서야 한다는 뜻이다.
실력이 뛰어난 자와 함께하면 좋다. 하지만 그보다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 이번 임무는 그러한 임무였다.
‘게다가 백도의 무공을 구사하는 걸 들켜서도 안 돼.’
물론 흑도 무림에는 온갖 군상이 모여 있는 만큼, 정파의 무공을 쓰는 놈들도 많다.
그래도 웬만하면 안 쓰는 게 좋다. 괜히 이목을 집중시켜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척강이 제격이었다. 점창파의 무공은 유독 실전적이었고, 조금만 변형하면 오히려 사파의 무공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연호정은 척강의 얼굴을 보았다.
그간의 임무로 제법 어른스러워졌지만, 아직은 소년티가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거친 손속과는 달리 순한 눈망울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척강은 내 명령이면 설령 불바다라도 주저 없이 뛰어들 놈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함께하기에 좋겠지만…….’
연호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역시 안 되겠군.’
척강은 꼭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얼굴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면에서 적격이지만…… 이 녀석,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어.’
척강은 열이 오르면 시야가 좁아진다. 상황에 따라 멋진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이번 임무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보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임무를 하나 받았거든. 멸사군 임무는 아니고, 단독으로 따낸 임무야.”
“헛? 어떤 임무죠?”
“좀 위험해. 흑도를 파고들어야 하거든.”
척강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흑도요?”
“그래. 단독 임무긴 하지만 같이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는데, 역시나 너는 안 되겠다.”
“왜요? 왜요? 저는 괜찮은데요? 내상이야 좀 더 신경 쓰면 닷새 안에도 고칠 수 있는데요? 진짠데요?”
연호정이 척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척강이 까마귀 같은 소리를 냈다.
“무공보다 중요한 게 있거든. 네 실력이 부족해서 이러는 건 아니니까 자존심 상할 거 없다.”
척강이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럴 거면 뭣 하러 여기까지 오셨대요.”
“쩝, 그러게나 말이야.”
연호정이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여하간 당분간 쉬고 있어. 수련 빼먹지 말고.”
몸을 돌리려던 연호정이 문득 척강의 처소 이 층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패율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호정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선배에게 나름의 예를 취한 것이다.
그때였다.
파라라락!
일순 창밖으로 몸을 날린 패율이 대문 앞에 내려섰다.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선배님?”
무림맹 성문에서 봤을 때와는 대하는 게 다르다.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패율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무를 받았다고?”
“그렇습니다.”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이 위험하다 할 정도면 보통 임무는 아니겠군.”
“많이 위험하지요.”
“무슨 임무기에?”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건 철저하게 공적인 일이다. 제아무리 무림의 선배라도 공무를 선뜻 알려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가.”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강이에게 왔다는 건, 저 녀석 정도면 나름의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해서였겠지?”
“그렇습니다만.”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만난 건 한 번뿐이고, 당연히 친분이라곤 나눈 적도 없는 양반이 왜 자꾸 이러나 싶었던 것이다.
패율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임무, 뭔지는 몰라도 함께하고 싶군.”
“예?”
“왜? 나 정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연호정은 솟구치는 의문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패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떤 부분에서? 설마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번 임무는 실력 외적으로 여러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선배님께서는 이번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듣고 싶다.”
“이번 임무, 지휘권자는 따로 있지만 실무에서의 책임자는 접니다. 그리고 떨어진 명령에 즉각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님께서는 까마득히 어린 후배의 명령에 뒤도 안 돌아보고 사지로 뛰어드실 수 있겠습니까?”
패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그가 패율의 옆을 지나쳐 대문을 열었다.
그때였다.
“까마득한 후배의 명령을 듣는 건, 제아무리 공적인 임무 수행 중이라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
“……?”
“그러나 날 이긴 상대라면 얘기가 달라.”
연호정이 순간 멈칫했다.
뭉클뭉클.
등 뒤에서 맹수처럼 거친 기파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승부에 관해서만큼은 나처럼 깔끔한 사람이 없어. 만일 자네가 날 이긴다면, 적어도 이번 임무에서만큼은 자네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르겠네. 죽으라면 죽는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죽어 줄 수도 있어.”
“……!!”
“어떤가? 나와 한판 붙어 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