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90화 (190/963)

190화. 고향으로 (2)

“오셨소이까?”

“잘 지내셨습니까.”

“허허, 덕분에요.”

“앉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나저나, 금일 회의 때 뵈면 될 것을 어찌 또 이 사람의 거처까지 오셨소이까?”

제갈문호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당부의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려.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래도 손님이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지.”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 좋은 향이 올라오는 찻잔이 놓였다.

제갈문호는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금일 봉공회의에서 양천에 관한 모든 사항을 정리할 것입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소.”

“짐작하셨겠지만, 이번 작전의 지휘권을 모용가주께 인도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히겠지요.”

모용군이 씨익 웃었다.

“지휘의 필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속도 아니겠소. 머릿속에 모든 전략도를 그려 놓은 사람이야말로 지휘에 걸맞지. 당연히 짐작했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지요. 모용가주의 지략과 안목은 뛰어납니다. 어떤 의미로는 봉공 중 제일이라 할 수 있겠지요.”

“허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내 지략이 뛰어나 봤자 범부(凡夫)에게나 통하는 정도라오. 신기제갈의 좌장에 비할 정도는 아니외다.”

“아시겠지만,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제갈문호의 눈에 강렬한 빛이 떠올랐다.

“군사 작전에서는 군사가 최고 결정권자입니다. 다른 봉공들 모두가 모용가주를 지휘권자로 인정한다 한들, 제가 허가를 내리지 않으면 지휘권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용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소. 물론, 그만한 정치적 압박감을 감수하는 것은 군사의 몫이겠지만.”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모용군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이번 작전만큼은 맹의 권력 싸움과 얽지 않을 것임을.”

“허허, 그 무슨 섭섭하신 말씀이오?”

“이미 서로의 능력과 성격을 웬만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상당히 무례한 발언이지만 모용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갈가주의 혜안(慧眼)에 드리워진 이 모용군은, 그리도 경우가 없는 사람이었소?”

“경우 있는 분이라서 더 무섭습니다. 그런 분이 진짜로 경우 없이 나오면 대응키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허허허!”

그 말이 재미있어 모용군은 웃었다.

놀랍게도, 그 웃음에선 어떠한 불쾌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상대를 향한 호의마저 엿보일 정도로 호탕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제갈문호는 생각했다.

‘더 무서워졌다.’

과거 모용군은, 정도 이상의 비판에는 나름의 날 선 대응으로 맞서 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모용군은 신랄한 비난을 듣고도, 명백한 의심의 눈초리를 앞에 두고도 진심으로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독사가 이무기처럼 커져 버린 셈이다.

‘대체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런 괴물이 되도록 만드는가.’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연 군장…….’

정확히는, 연호정을 위시한 반대 당파 측의 파격적인 공격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모용군은 놀랐다고 움츠러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아, 그 자신의 문제점을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무섭고도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그 자기반성의 눈을 인격적인 부분으로 돌렸다면 좋았을 걸, 어찌 정쟁으로 돌렸을까 싶었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이 사람, 때에 따라선 협잡도 불사하는 소인배이나 적어도 싸워야 할 무대 정도는 가릴 줄 아는 사람이외다.”

“…….”

“투왕 양천의 존재는 신경 쓰지 않소. 하지만 그가 흑도를 규합하고 거대 세력을 쌓게 된다면, 그건 진정 문제가 되겠지.”

“그렇습니다. 설령, 훗날 모용가주께서 백도 제일의 권력을 쥐게 된다 해도 문제가 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소이다. 즉, 이번 싸움만큼은 당파의 이해관계와 무관하다는 것이지.”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믿어도 좋소. 그리고 앞으로의 이 사람도 믿어도 되오.”

“그건 자신하지 못하겠군요.”

“허허, 산을 넘든 관도를 타든 바다에만 이르면 되는 것. 내게 개인적인 욕심이 있음을 부정하진 않겠소만, 나 역시 백도 무림의 번영을 바라는 사람이외다.”

“딱 그 부분까지만 믿겠습니다.”

“허허허!”

제갈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가주.”

“말씀하시오.”

“이 사람이 왜 모용가주의 말씀을 믿는지 아십니까? 수결을 찍은 것도 아닌데.”

모용군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그래, 궁금하구려. 믿어 달란 말 한마디에 덥석 믿을 분이 아닐 터인데, 어찌하여 내 말을 믿소이까?”

“각오를 보여 드리기 위함입니다.”

“각오라…….”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저는 군사로서 중립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 중립을 위해서 가주를 위시한 당원들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허허.”

“하지만 만일, 이번 작전에 지극히 작은 의혹이라도 제기되는 순간.”

번쩍!

제갈문호의 안광에서 살기가 일었다.

“그땐, 중립이라는 가치를 내려놓은 군사의 공격이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되실 겁니다.”

모용군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 역시 제갈문호의 그것 못지않게 서늘해져 있었다.

제갈문호가 포권을 취했다.

“괜한 걱정에 많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일간 시간이 되면 제 거처에 들르시지요. 오늘 일에 대한 사죄로 좋은 술을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모용군이 크게 웃었다.

“사내들은 싸우면서 정이 든다 하지 않소? 너무 괘념치 마시구려.”

“그럼.”

제갈문호가 방을 나섰다.

텅 빈 의자를 바라보던 모용군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허! 사람 참. 기껏 비싼 찻잎을 우렸거늘 어째 한 모금도 마시지 않나그래?”

그만큼 자신을 조심한다는 뜻이리라. 아예 이쪽에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 하나 제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알고 있소, 제갈가주? 당신이 나의 모든 걸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당신과 당신을 따르는 이들 모두를 구렁텅이에 빠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용군의 거처에서 나온 제갈문호는 제갈아연을 불렀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혹 들었느냐? 연 군장 얘기.”

제갈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들었어요.”

“아무래도 내 예상과는 달리, 연 군장은 멸사군을 대동하지 않을 작정인 듯하다.”

“……적을 섬멸하기 위한 작전은 아니니까요.”

설령 섬멸전이 아니더라도 멸사군 정도의 병력이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특히나 멸사군은 연호정의 말에 절대복종한다. 사석에선 친구처럼 지내지만, 임무에 돌입하는 순간 군장의 명령에 즉각 반응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 정도 믿음을 주는 병력이라면, 함께 싸우진 않더라도 심리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연호정은 그조차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 너답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도 상대지만, 작전 자체의 난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 딸을 보며, 제갈문호가 말했다.

“함께하겠느냐?”

“네?”

“너도 연 군장과 함께 가 보겠냐는 말이다.”

제갈아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래도 돼요?”

권력을 남용해서라도 자신만큼은 빼겠다고 하셨던 아버지가 아닌가.

한데 지금은 반대로 말씀하고 계신다.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는 분이기에 더더욱 놀라웠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연 군장의 능력은 분명 뛰어나다. 무공도, 지략도 그 연배의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지.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결정적인 순간에 빈틈을 드러내기 쉽다.”

“아…….”

“기실, 나 역시 딸을 사지(死地)에 보내고 싶진 않다. 그러나 가장 우려했던 문제 하나를 치웠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우려했던 문제요?”

“그런 것이 있다.”

제갈문호의 눈이 빛났다.

“해서 묻겠다. 연 군장과 함께, 이 위험한 작전을 이끌어 보겠느냐?”

제갈아연이 씨익 웃었다.

아리따운 얼굴에 호걸의 웃음이 깃들었다.

“멋지게 완수하고 돌아올게요, 아버지.”

* * *

“헉! 헉!”

호흡이 흐트러졌다.

호흡이 흐트러지니 내공 운용이 잘 되질 않았다. 체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확연히 빨라졌고, 반응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하지만 연호정의 집중력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더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굉장해.’

우우우우우웅.

찢어진 소매 속, 무형의 검기(劍氣)를 밝히는 벽산연가 최강자의 위엄.

‘엄청난 무공!’

연호정은 확신했다.

과거 흑암제 시절은 물론, 회귀하여 손속을 나누었던 모든 적을 통틀어 가장 힘든 상대가 눈앞에 있다고.

무공의 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무공의 경지라면 양천도 강했고, 무림맹주 시절의 모용군은 물론 사음교주도 천하제일을 논할 만했다.

연위는, 그들에 이르지 못한 무위로도 연호정에게 최악의 위기감을 안겨 준 것이다.

‘실전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야. 한데도 반격이 불가능하다.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몰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심지어 연호정 역시 살수를 가하는 상황이었다.

한데도 건드리지 못했다. 연위는, 벽산연가의 가주 판관대협은 이미 아들의 무공과 능력을 훤히 꿰뚫어 보곤 철저하게 약점만 공략하고 있었다.

약점을 공략한다. 정정당당함을 미덕으로 삼는 백도인답지 않은 처사였다.

“알겠느냐?”

“헉헉! 예?”

스르륵.

연위의 손을 감싸고 있던 검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너의 실전 능력은 탁월하다. 하지만 흑도는 또 달라. 흑도 무림엔 온갖 비겁한 수가 난무한다. 오늘 이 애비가 선보인 치졸한 공격들은, 그들의 수법에 비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맞는 말이다.

다만, 흑도의 어떤 고수와 붙어도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을 것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의 무공과 습관을 하나하나 보고 기억한 아버지이기에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승부에서 어지간하면 상대를 살려 두지 않는 이유, 타인의 앞에서 수련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눈썰미와 실력을 갖춘 이라면,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승부의 추를 기울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정점에 선 사람이 양천이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여 그와 손속을 나누게 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연호정의 호흡이 점점 안정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기지도 못할 상대와 멱살잡이를 할 만큼 멍청한 놈이 아닙니다.”

“그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었다.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것은 무인의 수치라지만, 감당키 힘든 힘에 억지로 맞서는 것은 만용이다.”

“예.”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이번 작전에 참여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네게 무엇을 해 줘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어차피 네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애비는 이런 것밖에 해 줄 수가 없구나.”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라. 이것이 바로 흑도의 방식이다.

연위는 아들에게 바로 그것을 깨우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임무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명이며, 그 인명에는 너도 포함된다.”

“알겠습니다.”

“임무지에 침투하기 전까지, 충분히 먹고 자 두어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낼 수 있느니라.”

“예.”

“그리고…… 그리고…….”

연위가 눈을 감았다.

“죽지 마라.”

“…….”

“그간의 네 불효는 다 눈감아 줄 수 있다. 하지만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는 용서할 수 없다.”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믿겠다.”

연위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연호정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등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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