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6)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바람은, 밤이면 사계(四季)를 가리지 않고 서늘했다.
거처로 돌아오는 길.
연호정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달라졌어.’
그는 모용군을 떠올렸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뇌광(雷光)을 검에 갈무리한 희대의 검사를.
그리고 그 검사의 짙게 가라앉은 눈빛을.
‘아버지나 나처럼, 모용군 역시 달라졌다.’
모용군은 지닌바 능력이 출중한 자다.
무공이면 무공, 지략이면 지략, 정치면 정치 등 어느 한 방면에서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모용군의 단점도 알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느긋하던 분위기가 사라졌어.’
그것은 바로 오만이었다.
그렇다. 모용군은 오만했다. 그리고 그는 오만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고 자란 곳이 하필이면 모용세가라, 형제자매들과 우애를 다질 시기에 상대를 무너트릴 방법부터 배운 사람이다. 모용군, 나아가 모용세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성이 결핍되어 있다.
모용우를 제외하면.
‘그 결핍에서 나오는 냉혹함. 덕분에 모용세가의 주인이 되고, 나아가 백도 무림의 정점에 서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겠지만.’
승승장구하던 삶.
그런 모용군의 인생에, 최초로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연호정이었다.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이었겠지. 입으로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었어.’
모용군은 연호정을 인정했다. 하지만 연호정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연호정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면, 지금껏 그리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를 더 철저하게 감추고, 확실한 한 방을 먹일 자신이 생길 때까지 가면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연호정이라고 그걸 두고만 보고 있진 않았겠지만.
‘그런 그가, 탕마멸사군이 출정한 시점부터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야 연호정을 진정한 적수라고 인정한 것일까? 아니면 그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용군이 더 음험해지고, 날카로워졌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할 거야. 하지만 겉보기에 잠잠하다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을 사람은 아니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양천 문제만 해도 머리가 아파 죽겠구만.’
투왕 양천.
과거 흑도를 제패하는 데에 마지막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이자, 연호정 인생에서 손에 꼽힐 만큼 위험천만했던 적.
놀랍게도 그 적은 새외와 선이 닿아 있었다.
‘그랬었단 말이지.’
자연스레 사고의 방향이 모용군에서 양천에게로 옮겨 갔다.
연호정의 눈에 흉광이 솟구쳤다.
‘이미 그쪽과 손을 잡고 있었단 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다.
양천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기실, 연호정 역시 과거에 그에 대해 캐내려 했지만 흑도의 정보력으로도 일정 부분 이상을 알아내진 못했다.
‘그렇다면 새외와 손을 잡은 걸 떠나, 출신지 자체가 그쪽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이번 일에 직접 뛰어들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분명 그에 대해서는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 실제로 양천은 무모하고도 거친 성정과 신중하고도 냉정한 성정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무력.
무섭도록 불어난 홍천기와 극도로 가다듬은 사신무로도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양천의 무력은 그렇게 무서웠다.
양천을 떠올리며 고요한 살기를 발하던 연호정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양천 그자, 이렇게 빨리 마각을 드러냈었던가?’
그렇지 않다.
과거 양천이 흑도와 함께 그 존재감을 드러냈던 건 연호정이 흑도에서 족히 몇 년은 구르고 난 후였다.
‘그때보다 훨씬 빨라. 제아무리 그때와는 시국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역사가 바뀌었다.
무림맹도 과거보다 훨씬 빨리 설립되었고, 양천의 등장도 과거보다 거의 칠, 팔 년은 앞당겨졌다.
그렇다면?
‘만일 양천이 진정 삼교(三敎)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삼교는 수십 년 전부터 중원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중원 최고수들을 몰래 암살하고, 절묘한 공습으로 초전부터 중원 전력 절반을 날려 버릴 순 없었을 테니까.
다만, 놈들이 중원 무림의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다는 게 확실해지니 새삼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신중하군. 그만한 전력을 갖고도.’
사음교 하나를 박살 내는 데에도 정파와 사파가 힘을 합쳤다.
물론 초전부터 순수한 전력으로 부딪쳤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삼교의 습격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치명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은 두 집단은 전쟁에 제대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제대로 대비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한다 한들 승패를 장담키 힘들거란 뜻이겠지.’
연호정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모용군. 참 안타까워.’
그 뛰어난 능력을 권력이 아닌 평화를 위해 썼다면,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됐을지도 모른다.
‘음?’
순간 연호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지금껏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그저 모용군이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라고 생각했던 한 가지 사실.
그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대체 뭘 믿고 나를 죽였지?”
흑암제, 흑제성주, 흑도대종사.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최초로 사파를 통일한 사도종주(邪道宗主).
나이 지긋한 노고수도 아니요, 천하제일인이라 공인받지도 못한 사람이 그리도 다양한 칭호로 불렸다는 건, 당사자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용군은 그런 자신을 죽였다. 사음교주를 죽이자마자.
“무슨 자신감으로?”
사음교 외에도 두 개의 조직이 건재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아군인 연호정을 죽일 필요가 없다. 아니, 죽여서는 안 된다. 아직 공동의 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걱정? 아니면……?’
그때였다.
“언제 뒈졌소?”
연호정은 깜짝 놀라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가득상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언제 왔소?”
“아까 왔소. 불러도 혼자 뭐라 중얼거리더이다.”
“아…….”
“근데 죽긴 뭘 죽어? 버젓이 잘 살아 있으면서.”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당장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었다.
“아니오. 한데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이긴.”
가득상이 헤벌쭉 웃었다.
“술친구가 돌아왔는데, 깔쌈하게 한잔해야지?”
서늘한 바람을 따라 휘날리는 나뭇잎.
달빛은 곱고, 별빛은 신비로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희미한 광채들이 멋들어진 운치를 자아냈다.
연호정이 정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성에 이런 데도 있었소?”
“이런 데 많소. 나도 아직 내성을 다 둘러보지 못했으니까. 하여간 넓기는 더럽게 넓어.”
가득상은 연신 히죽거렸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들뜬 모양이었다.
“자, 한잔 받으시구랴. 그 망할 마적 놈들 때려잡느라 고생 많았소.”
“고맙소.”
두 사람이 잔을 부딪쳤다.
별다른 안주는 없었지만 좋은 경치가 있고, 나이를 초월한 벗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잔을 비우기엔 충분했다.
“크, 독한 놈이군.”
“제갈 군사님께서 선물해 주셨소.”
“군사님이?”
“꽤 친해졌거든. 그 양반, 회의에서 몰아칠 때는 그렇게 냉정하고 무섭더니만 사석에선 참 친근한 사람이더라고.”
“그래 뵈더이다.”
“이래서 사람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몰라. 분명 전해 듣기로는, 능력은 좋아도 대가 약해서 이리저리 휩쓸리기 쉬운 성격이라 하였는데.”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중원의 무가(武家)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소. 그중 고르고 고른 여섯 가문의 좌장이오. 범상한 사람일 리가 없지.”
“맞는 말이오.”
가득상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며 그를 보던 연호정이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그래서, 그 제갈 군사님께서 내게 뭘 물어보라 하시더이까?”
순간 가득상은 흠칫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참으로 솔직한 반응이 아닌가.
“어떻게 알았대? 귀신이여?”
“넘겨짚어 봤소.”
“아니, 세상에 넘겨짚을 게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제갈 군사님을?”
“원래 자기 성격과 습관을, 정작 그 본인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소. 후개도 그렇지.”
“내 성격이 어때서? 습관은 또 뭔디?”
“하필 나를 찾아서 무려 군사님이 줬다는 술까지 대접해? 바빠서 휴가도 못 내는 사람이?”
연호정이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가득가득.
“후개는 얻어먹는 사람이지, 접대해 주는 사람은 아니잖소? 어울리는 짓을 해야 의심을 사지 않지.”
“허!”
가득상이 혀를 내둘렀다.
“당신, 이럴 때 보면 진짜 무섭다니까.”
“칭찬으로 듣겠소.”
“무섭다는 게 왜 칭찬이여?”
“그래서, 제갈 군사님께서 내게 뭘 알아보라 하시더이까?”
가득상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모용군을 만나고 온 길이오?”
“그렇소.”
“당신이 그 쌍놈 새끼와 이런저런 일로 얽히긴 했지만, 굳이 귀환한 날 바로 찾아가 만날 만큼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않소?”
“물론 그렇소. 오히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그 말인즉…….”
“맞소.”
“응?”
“후개 생각이 맞소. 양천을 찔러 보는 이번 작전, 총책임자로 나를 세워 달라 했소.”
가만히 연호정의 얼굴을 살피던 가득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갈 군사님이 그러더이다. 어쩌면 댁이 이번 일에 나설지도 모른다고.”
“군사에게는 방대한 지식만큼이나 감도 중요한 법이오. 그런 면에서 보면, 군사님은 대단한 분이오.”
답답한 듯 냉큼 잔을 비운 가득상이 한숨 쉬듯 말했다.
“알겠지만, 이번 작전은 위험하오.”
“…….”
“누구라도 위험하오. 실패해선 안 되기에 더더욱.”
“알고 있소.”
“모르는 것 같은데? 게다가 당신은 백도 무림의 유명 인사요. 사람 몸뚱이만 한 도끼를 휘두르고 다니는 양반이니, 분명 흑도 놈들도 당신 소문을 접했을 거요.”
“그럴 거라 생각하오.”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도끼를 놓고 가기라도 할 셈이오?”
“그래야지.”
평소와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얘기하는 연호정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초탈해 보이기까지 했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던 가득상이 일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양반아! 당신이 아무리 천재라도 상대는 양천이야, 양천! 당신 그러다 진짜로 죽어!”
뜬금없는 일갈이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연호정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다.
“성천십삼좌는 무림 최고 전성기였다던 삼백 년 전 최고수들과도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받는 괴물들이야! 심지어 상대는 투왕이라고! 그 새끼가 얼마나 독한 놈인지 들어서 알 거 아냐?!”
“상대를 가린 적 없소.”
“뭐?!”
“모용군은 나보다 강하오. 구주명가는 말할 것도 없지. 그래도 난 움직였소.”
“……!!”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일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한 인생이니까.”
“……어휴, 지랄맞은 인간 같으니라고.”
가득상이 씁쓸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사람 말을 들어 처먹어야 설득이라는 걸 하지. 참 나, 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걱정되시오?”
“그럼 걱정하지 마?”
“…….”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싸가지도 없는 주제에 무모하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 친구야.”
“……!”
“친구가 기어이 사지로 나서겠다는데 안 말리게 생겼냐고, 이 답도 없는 인간아.”
연호정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가득상이 술병을 거칠게 쥐고는 그대로 입 안에 들이부었다.
“크허어어! 콜록! 시벌, 거 더럽게 독하네.”
“…….”
“그럴 줄 알았어.”
“뭘 말이오?”
“당신이 이번 일에 끼어들 것 같았다고, 나도.”
“그렇소?”
“그래서 나도 휴가 냈지.”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설마, 함께할 생각이오?”
“그럼 이 답답한 무림맹에 평생 갇혀 있으라고? 미쳤어?”
“…….”
가득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명가 조질 때 제법 손발이 맞았잖아, 우리?”
“…….”
“잘 부탁하외다.”
멍하니 가득상을 보던 연호정이 이내 못 말린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발목이나 잡지 마시구려.”
“지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