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5)
“잘 다녀왔느냐?”
“네, 아버지.”
“다친 데는 없고?”
“물론이죠. 저는 군사잖아요. 선봉에서 싸우진 않아요.”
“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군사는 적의 최우선 공략 대상이다. 이유인즉, 군사가 사라지면 그 부대의 머리가 사라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없는 부대는 전투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지.”
“안타깝게도 멸사군에는 저 말고도 엄청나게 똑똑한 인간이 하나 더 있어서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 군장 말이냐?”
“네.”
제갈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략 전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닌데도 기가 막히는 전술을 구사하더라고요. 국소적인 전술에 있어서는, 어쩌면 본가의 석학들보다 나을지도 몰라요.”
“연 군장의 뛰어남은 모두가 알고 있지. 다만 적은 그걸 모르니, 군사인 너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어차피 마적단이었으니까요. 군사까지 딸린 부대를 상대해 본 전적은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제갈문호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해서, 회랑단은 어떠했느냐? 그들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았지?”
제갈아연의 대답은 압권이었다.
“힘센 개자식들이요.”
그 한마디에 회랑단을 향한 제갈아연의 분노와 혐오가 절절히 담겼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자들. 그런 자들이 약자에게 얼마나 끔찍해지는지 모르지 않아요. 하지만 놈들은 정도를 넘어섰어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 청해, 감숙 일대까지 수천 리를 활동 영역으로 삼은 놈들이다. 그것도 십 년이나. 십 년 동안 고인 물이라면, 그 악(惡)의 밀도가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키 어렵다.”
“어쨌든 속이 다 시원하네요.”
“하하하.”
워낙 당찬 딸이었지만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멸사군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일까? 이제야 세상의 악한 면을 제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일까?
제갈아연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보다 한층 날 선 기도, 악(惡)을 겨누는 군략의 안광이 시린 보검과도 같았다.
“해서, 당분간은 쉬는 것이냐?”
제갈아연이 눈을 끔뻑였다.
“글쎄요? 다른 명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잠정적인 휴식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물론 마냥 쉬고 있지만은 않겠지만요.”
“으흠.”
“아버지도 봉공회의에 들어가시잖아요. 오히려 제가 아버지께 여쭤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
제갈문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하지. 다만 이 말을 해 주고 싶어서 말이다.”
“네?”
“만일…….”
“……?”
“…….”
“아버지?”
제갈문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에 하나 연 군장이 또 다른 작전에 함께하자고 말한다면, 이번만큼은 함께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이래요?”
제갈문호 역시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성과 논리가 아닌 직감이 고개를 쳐든 탓이었다. 왠지 이번 흑도 관련 일을 처리할 때, 연호정이 전면에 나설 것 같다는 직감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조만간 연 군장이 또 하나의 임무를 따낼지도 모른다.”
“임무요?”
“그래.”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저는 멸사군 소속이에요. 호정은 제 친구지만, 동시에 상관이기도 해요. 군장이 함께하자고 명을 내린다면,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요.”
“안다.”
“아는데도 그러세요.”
“하지만 나는 무림맹의 군사다. 아직 맹주가 선출되지 않았으니 명령을 내리는 것은 봉공들이야. 덕분에 애비에게도 약간의 힘은 있다.”
제갈아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아버지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그 정도로 위험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네?”
제갈문호가 눈을 감았다.
‘내가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일까?’
양천을 찔러 보기 위한 전략을 다각도로 세우는 중이다. 그리고 그 전략들은 곧 하나로 좁혀질 것이다.
한데 왜일까?
왠지 그 전략에 연호정이 끼어들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무림맹 창설 후 연호정이 알게 모르게 많이 움직인 것은 맞지만, 그가 들여다보지 못한 곳에서도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 일이라고 연호정이 끼어들 거란 보장은 없었다. 애초에 멸사군은 유군 부대지, 특공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일까?
어쩐지 연호정이 이번 일에 눈독을 들일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 아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인데.’
고민하던 제갈문호는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았다.
‘모용군.’
그렇다.
이번 계획안의 핵심을 구상한 것은 모용군이다. 그리고 모용군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연호정이 있었다.
모용군과 연호정. 연호정과 모용군.
둘 중 누군가가 어느 한 곳에 발을 들이면, 그 반대편에 선 자도 그대로 따라온다.
그건 무림맹이 창설되기 전에도 그랬다. 구주명가를 무너트릴 때도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둘은 언제나 함께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고 있어.’
탕마군장 모용우?
그 역시 대단한 인재지만, 결국 연호정은 모용우를 통해서 모용군을 보고 있을 것이다. 즉, 모용우는 모용군이 부리는 장기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제갈문호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이 애비가 잠시 헛소리를 했구나. 잊어 다오.”
“……네.”
그가 창밖을 보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연 군장. 자네는 무엇을 위해서 그리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겐가? 정녕 모용군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함인가?’
* * *
쩌어어어엉!
후려치듯 허공을 때린 검격(劍擊) 속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는 굉음이 울렸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허공에 화려한 잔영(殘影)을 그려 낸 검뢰(劍雷)가 불꽃을 튀기며 사라졌다.
‘점점 커지고 있다.’
장검 곳곳을 누비며 방전하는 뇌광(雷光)이 점차 선명해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뇌전의 줄기 역시 한층 굵어졌으며, 검신(劍身)을 감싸고 도는 전력(電力) 자체가 크게 증폭했다.
따로 연성하지 않아도 뇌정공(雷霆功)의 화후가 깊어졌다. 뇌정공의 화후가 깊어지니, 검력을 끌어 올리는 즉시 뇌정지기(雷霆至氣)의 밀도도 올라갔다.
지이잉! 지이이잉!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검신을 내려다보며,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타인의 수련을 몰래 들여다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을 터인데?”
기다렸다는 듯 젊고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온 거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하길래 봐도 되는 줄 알았소이다.”
모용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얼마 안 본 새에 자네 혓바닥은 더 독해진 것 같군.”
“내 혀가 독해질 동안 당신 검은 더 매서워진 것 같소.”
“그런가? 그때의 비무로 내 실력을 전부 간파해 내진 못했을 텐데?”
“전부는 아니고 조금은 봤지. 그때 당신의 내공 밀도는 그 정도로 깊지 않았소.”
정말이지 못 당하겠군.
‘천재는 천재야.’
자신보다 수준이 높은 자가 품은 내공의 밀도까지 들여다볼 정도면 얼마나 날카로운 안목을 지녀야 하는가.
문득 모용군은 한 줄기 호승심이 이는 걸 느꼈다.
“어떤가? 이왕지사 내 검을 보았는데, 자네 도끼로 한번 받아 보시겠는가?”
“싫소.”
“겁이 나나?”
“그렇소. 그 파괴적인 뇌기(雷氣)에 당하면 몇 달은 골골 앓을 것 같아서.”
“오호.”
“안 그럴 거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한판 붙으면 작정하고 몰아칠 생각 아니오?”
모용군이 크게 웃었다.
“정말이지 못 당하겠군.”
후우우우웅.
위협적인 뇌광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러자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스르릉.
납검한 모용군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연호정이 있었다.
“오랜만이오.”
“그러게나 말일세.”
“그간 얌전히 지내셨다고 들었는데.”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별수 있나. 어떤 분께서 무림맹 부맹주직이라는 희대의 난제를 던져 두고 갔으니, 그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로선 꼬리를 말고 잠이나 잘 수밖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제대로 한 방 맞은 것 같아 다행이오.”
“지금껏 휘두른 주먹 중에서 가장 아픈 주먹이었다네. 순간 정신이 다 아찔해지더군.”
“그러니 야망 내려놓고, 같이 손잡고 화단 한번 잘 꾸며 봅시다.”
“본가 가주실 후원 화단에는 잡초 한 줄기 없지. 내가 보는 화단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꽃잎 한 장, 벌레 한 마리도 용납하지 않는다네.”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소?”
“그렇다네.”
“그래서 도움을 준 거요? 양천이 세(勢)를 모으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테니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맹주가 되었든, 누가 권력을 손에 넣든 양천은 문제야.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도 힘을 보태야지 않겠나?”
“그 의도가 순수한 것 맞소?”
모용군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그럴 줄 알았소.”
“자네나 나나, 아무런 의도도 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숙맥은 아니잖나?”
“미안하지만 같은 급으로 엮지 마시오. 내게는 아직 당신에게 보여 주지 않은 순수함이라는 게 남아 있거든.”
“나만 너무 나쁜 놈 만들지 말게. 자네는, 어떤 의미로는 나보다 더 독한 사람이야.”
모용군이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연호정 역시 팔짱을 낀 채 나무 한 그루에 몸을 기댔다.
“그래, 여로에 지쳤을 텐데 어인 일로 예까지 방문하셨는고?”
“알지 않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자네, 그러다 제 명에 못 살 걸세.”
“음?”
“자네 실력은 나도 알고 자네 부친도 알고, 나아가 무림맹 전체가 알아. 하지만 천재가 단명한다는 말이 왜 나왔겠나?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날뛰다 보면, 어느새 삼도천에 빠져 버린다네.”
“그럴 수도 있지.”
모용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번 작전의 핵심이 되고 싶나?”
“그렇소.”
“왜지?”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그럴 필요가 있다? 나는 모르겠군. 양천을 들쑤시려는 이번 작전이 자네에게 어떤 선물을 안겨 주는지.”
“짐승은 먹잇감을 쫓을 때만 움직이는 게 아니오. 상대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도 움직이지.”
“뭔가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렇소.”
“자네가 아니더라도 고수는 많아.”
“알고 있소.”
물끄러미 연호정을 올려다보던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분명하게 말하지. 이번 전략의 주체는 제갈 군사가 아니라 나일세. 그리고 나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생각일세.”
“…….”
“알고 있었나?”
“몰랐다면 제갈 군사에게 갔지, 왜 당신에게 왔겠소?”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를 믿나?”
“당신의 능력은 믿지.”
“아닌 척하면서 자네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트릴 수도 있다네. 내 감히 자신하건대, 이번만큼은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할 게야.”
“어련하시겠소.”
“한데도 내 휘하에서 싸워 보시겠다?”
“그래야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으니까.”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성인군자 납셨군. 자네답지 않게 그러지 말게나.”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판국 아니오. 이번 건은 당신을 물 먹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가려는 거요.”
“……진심인 모양이군.”
“그럼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연호정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당신은 나를 믿소?”
가만히 연호정을 주시하던 모용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믿지 않네. 그러나 자네의 능력은 믿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잘 부탁드리겠소. 이번만큼은.”
모용군이 손을 저었다.
“잘 날뛰어 보게. 이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