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4)
보름 후.
“칠십이라.”
모용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꽤 많이 잃었구나.”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다. 너도 이번에 느꼈다시피, 개인의 무력과 전술은 집단의 힘 앞에서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천하의 고수도 삼류가 날린 비수 하나에 죽는 것이 강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다 제 불찰입니다. 앞으로 이런 모습 보여 드릴 일은 없을 겁니다.”
“허허, 내 이미 너의 능력과 배포를 안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바. 너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실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모용우는 탕마군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고, 모든 일을 멸사군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러나 천하의 재인이라 한들 타인을 쥐고 휘두르는 걸 마음대로 해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게다가 모용우는 오백이나 되는 전투 부대를 운영해 본 것이 처음이다. 회랑단의 악명과 전투력, 숫자를 생각하면 오히려 칠십 명밖에 죽지 않은 것이 더 대단한 일이었다.
“일단 회랑단을 어떻게 공략했는지부터 들어 보도록 하자꾸나.”
모용우는 회랑단과의 조우,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싸웠는지를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허! 인질을?”
“그렇습니다.”
“하면 너는, 놈들이 그런 치졸한 짓을 저지를 걸 예상하고 멸사군을 우회시켰단 말이냐?”
“거기까지 내다보진 못했습니다. 다만 마을이 침공받고 있었고, 나아가 습격을 하기에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어 보냈을 뿐입니다.”
모용군의 얼굴에 작은 감탄이 일었다.
“대단하구나.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줄줄 외워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그중 일 할도 선보이기 힘든 법이거늘.”
“연 군장의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방법을 궁구했겠지요.”
“뱃속에 능구렁이 수천 마리를 품고 다니는 놈이지. 다만 네 말마따나 능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놈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볼 줄 아는 것도, 믿었던 것도 너의 안목이다.”
모용군이 흡족한 듯 끄덕였다.
“철저하게 수장으로서 움직였구나. 그거면 됐다.”
호언장담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지만, 내용을 들어 보니 이건 오히려 칭찬을 해 줘도 모자랄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번에 회랑단을 휩쓴 공(功)의 대부분이 탕마군장 모용우에게로 넘어갔다. 멸사군의 이름도 있었지만, 연호정의 이름은 없었다.
‘좋아.’
참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다. 이 정도면 최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월척을 낚았다고 봐도 무방하다다.
“어찌 되었든, 이번 작전에서 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했습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임무였습니다.”
“허허허! 네가 그리 생각한다면 되었다.”
모용군은 실로 즐거운 듯 대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모용우는 아니었다.
‘형님. 사람이 죽었습니다.’
의미 있는 임무다?
맞다. 이번 회랑단과의 전투는 분명 모용우에게 의미 있는 임무였다.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솟구치는 슬픔을 억누르고 이리 말한 것은, 전부 모용군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모용우는 새삼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죽은 부하들을 생각하면 결코 입 밖에 내선 안 될 말을 하는 지금의 상황이 서글펐다.
‘미안하다.’
짧게 마음을 다스린 모용우가 말했다.
“형님.”
“음?”
“죽은 군병들을 위해 따로 위령제를 열까 합니다. 크게 알리지 않고 탕마군끼리 조촐하게 할 생각이니, 사흘 동안 못 뵐 수도 있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위령제라?”
“예.”
“흐음, 그도 좋지. 어쨌든 그들 모두가 너의 수하였으니, 그들을 위해서 추모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이해해 주고 말고 할 것이 무에 있느냐. 탕마군장은 너다. 군장이 죽은 병사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 주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지.
‘이런 건 나쁘지 않아.’
모용군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죽은 군병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 줬을까?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럴 시간에 손실한 병력을 다시 채워 넣을 궁리를 할 것이고, 더 밀도 있는 힘을 얻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 모용군이기에 위령제를 열겠다는 모용우의 발언이 신선하게 들렸다.
동시에, 이것은 기회이기도 했다.
‘너의 그 행동이 무림맹도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탕마군장은 죽은 병사들을 제 몸처럼 생각하는 자다. 그는 책임감이 있는 대협이다.
그런 소문이 맹 전체에 파다하게 퍼질 것이다.
당연히 맹도들은 모용우를 주목할 것이고, 모용우의 존재감은 한층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빠진 병력은 이 우형이 직접 채워 주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거라.”
* * *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오냐.”
무뚝뚝한 연위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감돌았다.
“다친 곳은 없느냐?”
“전혀요.”
“너한테 물은 게 아니라 비아에게 물은 것이다.”
“아…….”
“너처럼 독한 철골이 다칠 일이 무에 있겠느냐.”
“이거 서운한데요.”
“시끄럽다.”
연호정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위는 하루하루 연호정의 안전을 기원했다. 탕마멸사군이 출정한 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든 날이 없었다.
묵비가 공손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버님.”
“그래. 안 다치고 성히 왔으니 그걸로 되었다.”
연위는 모용군과 전혀 달랐다.
그는 아들이, 그리고 딸처럼 여기는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임무?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인명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멸사군엔 사상자가 없다고 들었다. 그거면 되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산더미 같다만, 여로에 심신이 많이 지쳤을 것이다. 오늘은 우선 쉬고, 자세한 얘기는 내일부터 하도록 하자.”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피곤하면 너는 가서 좀 쉬어. 나는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럴까요?”
묵비는 진심으로 쉬고 싶었다. 아니, 휴식 이전에 씻고 싶었다. 돌아오는 동안 한 번도 수욕을 못 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꾸벅 숙인 묵비가 부리나케 방을 나섰다. 혹시라도 연위에게 냄새를 풍겼나 싶어서 심장이 콩알만 해진 그녀였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이제는 묵비의 눈빛과 행동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괜히 놀렸나.”
언젠가 한 번 냄새 난다고 놀렸더니만 그 이후로 씻는 데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그녀였다. 사실 누구보다도 깨끗한 녀석인데, 자신 때문에 인생이 피곤해졌구나 싶었다.
연위가 물었다.
“너는 피곤하지 않으냐?”
“괜찮습니다. 제 다리로 달린 것도 아닌데요.”
“말을 타는 것도 일이다.”
“제가 독한 철골이잖습니까.”
연위가 피식 웃었다.
“그래, 이 애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연호정이 조심스레 말했다.
“기분은 안 나쁘십니까?”
“무슨 기분?”
“이번 임무 보고서에 제 이름이 누락되었잖습니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예.”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네가 일부러 누락시킨 것이냐?”
“그렇습니다.”
“이유가 있느냐? 물론 이 애비는 네가 공명심을 탐하는 못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만, 굳이 이름을 뺄 이유도 없지 않으냐.”
보고서에는 멸사군의 활약상에 대해서도 꽤 자세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군병 몇 명의 이름과 군사인 제갈아연, 묵비의 저격술에 관한 얘기는 나왔지만, 연호정의 이름 석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
연호정은 아버지께 모용우와의 관계를 밝히려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때가 되어서 말씀드리면 회초리로 끝나진 않겠지.’
연호정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쪽에 한 번 밀어 주려고요.”
“모용가주를 방심케 할 요량이냐?”
“이 정도로 방심할 위인이었다면 상대하기가훨씬 수월했을 겁니다.”
“하면?”
연호정이 쾌활하게 말했다.
“정치는 베푸는 것이지만, 정쟁(政爭)은 주고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간 많이 당해서 독이 바짝 올랐을 텐데, 기 한번 살려 줘야지요.”
연위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번씩 생각한다. 내가 네 머리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 이거는…….”
“되었다. 설명할 수 있었다면 진작 설명했을 거라는 걸 안다. 본디 이러한 문제는 이성과 본능이 어우러진 영역이라, 쉬이 설명키가 어렵겠지.”
“하하.”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저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한 번.’
연호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번 한 번만 더 참자.’
예전과는 달리, 점점 자신의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이해해 주신다.
이런 아버지께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이 괴롭다.
‘조만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연위가 물었다.
“해서, 내게 할 말은 그게 전부더냐?”
“일단은 그렇고요. 듣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듣고 싶은 것?”
“예.”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연위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
이제 아들은 진정 어른이 되었다. 자신과 같은 위치에서,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어른이.
단지 그것을 해석하는 게 다를 뿐 이미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니, 사소한 것 하나까지 함께 고민하는 것도 이제는 미안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잡스러운 일이야 많았다만, 굳이 네게 설명해 줄 만한 건 없다. 다만…….”
“……?”
“저 흑도 관련 일로 골머리를 좀 썩였다.”
“흑도 관련 일이요?”
연위는 양천에 관한 일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모용군에게 찾아갔다는 것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아버지도 달라지셨구나.’
과거의 아버지였다면 세상이 두 쪽이 나는 일이 있어도 탐욕스러운 소인배의 꾀를 얻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변하셨다. 티 없이 맑은 백도(白道)의 정정당당함만으로는 헤쳐 가기 어려운 판이라는 걸 깨달으신 것이다.
“해서, 모용군이 뭐라고 말했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대로 하여금 우리가 아니라고 오인을 시키면 되는 문제라고.”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들의 미소를 본 연위가 물었다.
“너도 그의 생각에 동의하느냐?”
“동의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는 현실. 그렇다면 일단 움직이고 봐야 한다는 건데, 쥐새끼처럼 숨지 않게 하려면 무림맹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
“예. 다만…….”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모용군이 어떤 의도로 그리 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뭐가 어찌 되었든, 양천을 공략하는 일이라면 희생자가 제법 생길 겁니다.”
“음.”
“전략적으로 봤을 때도, 협의를 생각할 때도 희생자가 나는 건 최대한 막아야겠지요.”
연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기특한 녀석.’
역시 아들은 모용군과는 다르다.
안목과 두뇌는 능히 박빙을 이루지만, 모용군과는 보는 곳이 다르다.
모용군은 목적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한다. 하지만 아들은 목적을 달성하기에 앞서 이쪽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너도 달라졌구나.’
연호정도 원래 이러진 않았다. 모용군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훨씬 거칠었다.
변한 것이다. 자신처럼.
연위는 아들의 이런 변화가 자랑스러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물었다.
“그 공략, 진행 중에 있습니까?”
“그렇다. 아직 흑도로 보내진 않았다만, 조만간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질 예정이다.”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러느냐?”
“저도 꾀주머니한테 볼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너 설마?!”
연호정의 얼굴에 사악한 웃음이 깃들었다.
“정쟁은 주고받는 것. 하나 줬으니, 저도 하나 받아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