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85화 (185/963)

185화.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3)

“얼추 정리가 끝난 모양이군.”

“그렇다네.”

모용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룡상단에서 벌어진 전투는 상당히 험하고 지독했다. 전각이 수도 없이 무너졌고, 담벼락도 곳곳이 부서져 폐허처럼 변했다.

귀신도 무서워서 얼씬거리지 않을 만큼 엉망이 되었던 상단이, 지금은 제법 정리가 된 모양새였다.

연호정이 탕마군 쪽을 보았다.

탕마군은 제각기 흩어져서 쉬고 있었다. 아직 동료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누구?”

“머지 않아 모용 군장의 처가 될 사람.”

모용우는 당황했다.

“여, 연제!”

“보는 눈 많아. 호칭 주의해.”

“아…….”

너무 당황해서 사람이 많다는 것도 잊었다.

“설마 전투에 휩쓸려 죽은 건 아니겠지?”

“커험! 그건 아닐세.”

모용우가 한쪽을 가리켰다. 그 손끝으로 시선을 돌리니, 탕마군 삼 조(三組)의 여성 조원들과 함께 쉬고 있는 당상아가 보였다.

연호정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저 양반 조원으로 들어간 거야?”

“그렇다네.”

“왜? 그 정도 실력이면 조장 자리를 꿰차도 부족함이 없을 텐데?”

“집단전에 있어 독과 암기는,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

“그러니까.”

“하지만 독과 암기를 다루는 자의 성품이 독하지 않다면, 조장이 되어 봤자 휘하 조원들만 혼란스러울 뿐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 때는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할 때는 하는 사람이지. 다만 내가 말하는 독한 성품은, 수장으로서의 독기를 뜻하는 걸세.”

“수장으로서의 독기라.”

“윗사람은 수하를 내 가족처럼 여겨야 한다는 게 내 신조일세. 그러나 임무를 위해선, 때로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릴 줄도 알아야 하네.”

연호정은 모용우의 말에 동감했다.

고개를 돌린다는 건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수하를 위험한 작전에 내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며, 수하 걱정에 임무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상아에게 부족한 점이 그거였다. 그녀는 당가 사람답지 않게 정이 많았다.

“그래도 얼추 잘 살아남긴 했군.”

“강하니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제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긴 한가 보지?”

“여, 연 군장!”

“뭐 어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뒷일 생각 말고 가까워져도 괜찮다고 보는데.”

모용우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함세.”

하긴,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억지로 밀어 넣는다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서로의 마음이다. 연호정이 나름의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두 사람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정 마음이 안 간다? 그럼 거기서 끝내면 된다.

하지만 마음이 가면? 그때부턴 진지하게 접근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모용우가 주제를 돌렸다.

“얼추 마무리되었으면 슬슬 이동해 볼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거야 대수(大帥)인 당신이 판단할 일이지. 맹에서는 따로 연락 안 왔어?”

“아직은 없었네.”

“하기야 싸움 끝난 지가 얼마 안 됐으니까. 따로 연락이 안 오면 이대로 귀맹하면 되겠지.”

“그러세.”

탕마군에게로 돌아가려던 모용우는 문득 신경 쓰이는 바가 있어 물었다.

“연 군장.”

“왜?”

“무슨 일 있나?”

“무슨 일이라니?”

괜한 말을 꺼내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모용우는 이내 결심했다. 어찌 되었든 의형제지간인데 이 정도도 묻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사륵을 만나고 온 후부터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가.”

“그렇다네.”

“별거 아니야. 그놈이 워낙 쓰레기 같은 놈이잖아. 낯짝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서.”

상당히 거친 답변이었다.

연호정의 언변이 거친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유독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뭐라고 하던가? 아니, 그에게 무엇을 추궁했는가?”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괜찮을까.’

괜찮을 것이다.

모용우에게는 이 모든 걸 말해 줘도 상관없다.

당연하다. 모용우는 한번 믿음을 준 자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괜스레 망설임이 이는 까닭은,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리라.

‘그것도 그렇고.’

연호정은 순순히 인정했다. 삼교(三敎)를 향한 자신의 분노 외로, 그들의 힘이 너무나도 거대하여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실, 지금쯤이면 아버지께 말씀드려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야.’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명백하다.

아버지는 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다. 그러나 과감함보다는 신중함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분이었고, 결정적으로 사건을 대하는 자세가 자신과는 달랐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미지의 적과 조우하면 당황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단 당황하면, 타인을 믿기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사건을 헤쳐 나가게 된다.

그래서 연호정은 아직 연위에게 모든 걸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모용군의 경우엔 먼저 이쪽을 공략하려 들었기에 자연스레 대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모든 걸 말하고 나면 도움을 얻을 수도 있겠지. 공동의 적이니까. 하지만 문제가 발생할 여지도 크다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

뭐가 어찌 되었든 튀어서는 안 된다. 무림맹, 나아가 중원 무림 전체가.

연호정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아직은 이 부분에 관해서 섣불리 얘기할 때가 아니라는 걸.

다만.

“당신에게는 얘기해도 될 것 같군.”

“음?”

“당신은 아버지와 다르니까.”

믿음과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성향의 차이다.

모용우는 선하지만, 진심을 숨기고 모용군 밑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깨어 있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연호정을 의지하는 정도도 연위보다 컸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래, 놈들의 움직임이 확실하게 포착된 상황이다. 그렇다면 모용우에겐 말을 해 놓도록 하자.

나아가 가득상에게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돼. 우리끼리만 아는 극비 사항이라고 생각해.”

* * *

“허허허.”

모용군이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또 있구려. 명성이 자자한 판관대협과 무림맹 군사님이 직접 거처로 찾아오시다니 말이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호탕한 웃음에 진심 어린 유쾌함이 어려 있었다.

모용군이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아직 날이 밝긴 하지만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소? 제법 질 좋은 술을 구비하고 있소만.”

제갈문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나눌 얘기는 아니라서.”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술을 마시면서 나눌 얘기가 아니다. 그 말인즉슨 이쪽을 흔들려는 의도가 일절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구려. 하면 차나 한잔 나누면서 얘기해 봅시다.”

“그러지요.”

모용군이 힐끔 연위를 보았다.

“연가주께서는 용정을 좋아하시오?”

연위가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소.”

“허허, 해상 무역으로 만만찮은 부(富)를 쌓으셨을 터인데 용정도 안 드셔 보셨소이까? 과연 소탈하시구려.”

나름의 뼈가 있는 말이지만 연위는 반응하지 않았다.

모용군의 웃음이 짙어졌다.

‘역시 보통이 아니군.’

과거의 연위였다면 분명 지금 이 발언에 반응했을 것이다.

연위는 스스로를 숨길 줄을 몰랐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 생각이 표정과 눈빛에 어느 정도 드러나는 부류였다.

지금은 달랐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고, 자세에도 일절 흐트러짐이 없다. 상대의 발언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공이 발전해서인가?’

아니다.

저런 변화는 무공이 발전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 연호정 때문이로군.’

그렇다.

연호정의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그 나이에 무림에서 난다 긴다 하는 노강호들 뺨치는 정치력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드러낼 땐 화려하게, 숨길 땐 음험하게.

연호정의 정쟁 능력 중 많은 부분이 연위의 성품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독해졌고, 더 과감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행보가 무림맹의 판도를 바꾸는 것을 보며, 연위 역시 깨닫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아들을 보며 성장하는 아비라? 허! 배움은 때도, 사람도, 상황도 가리지 않는다지만.’

모용군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부자지간일세그려.’

잠시 후, 다탁 위로 용정차 석 잔이 놓였다.

제갈문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향이 정말 좋습니다.”

“허허, 최상품 용정이외다. 얼마 남지 않은 걸 꺼내 놓은 것이니,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전부 드셔야 하오.”

“잘 마시겠습니다.”

한 모금 차로 목을 축인 모용군이 물었다.

“그래, 두 분 가주께서는 어인 일로 이 사람을 찾아오셨소?”

연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찾아왔소.”

“골치 아픈 일? 허어, 무림맹 봉공분들이 골머리를 썩일 만한 일이 대체 무엇일꼬?”

마치 본인은 봉공이 아닌 것처럼 얘기한다. 이 상황을 여전히 유쾌하게 보고 있는 듯했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투왕 양천에 관한 문제로 왔습니다.”

모용군의 눈빛이 돌변했다.

투왕 양천. 천하의 모용군이라도 장난으로 넘기기 힘든 이름이었다.

“양천이라…….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그만한 인사가 얽혔다면 골치가 아플 만도 하지.”

“그렇습니다.”

“일단 들어나 봅시다.”

제갈문호는 현재 양천에 관한 사항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들은 모용군이 말했다.

“즉, 그자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 봐야 할 상황이다. 한데 들키면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향후 이쪽에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정확히는, 무림 전체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양천은 분명 괴물이외다. 그뿐만이 아니지.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이들 모두가 괴물이라 할 수 있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게다가 그자의 성품은 독하고 잔인하며, 한번 원한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쫓아올 만큼 악랄하다?”

“그런 성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허허, 그렇기야 하겠지.”

가만히 있던 연위가 끼어들었다.

“기실, 이런저런 방법은 많소. 하지만 어떤 식의 방법인들 사상자가 크게 날 것이며, 결정적으로 양천이 숨어 버리면 더 골치가 아플 것이오.”

“그렇구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봉공회의를 소집하지 그러셨소?”

“그럴 순 없었소.”

“왜 그렇소?”

연위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모용가주의 당원들이 판을 흐려도 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제갈문호가 당황하여 연위를 보았다.

반면 모용군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선뜻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랬겠지. 과연 두 분도 보통이 아니시오.”

“칭찬 감사하오.”

“그래서, 이 사람의 꾀주머니를 빌리러 오신 게요?”

“그렇소. 만에 하나 훗날 모용가주가 큰 힘을 손에 넣었다 한들, 양천이라는 고민거리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오.”

“허허허!”

모용군이 크게 웃었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구려. 그래, 그렇겠지. 말하자면, 우리에게 있어 양천은 공동의 적이 되는 셈이구려.”

“비슷하오.”

“음, 양천에 대해서 알아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하는 이유를 모르겠소만?”

두 사람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 정도 거물급 인사를 파헤치는 것이니 사상자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소. 중요한 건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상대로 하여금 우리의 짓이 아니라고 오인(誤認)을 시키면 되는 거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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