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2)
쿵!
“헉!”
땅을 울리는 진동에 파사륵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크윽!”
정신이 들자마자 온몸에서 치미는 고통에 숨통이 턱턱 막혔다.
“으아아악!”
아팠다.
정말이지 이렇게 고통스러운 적은 없었다. 잘려 나간 무릎 아래쪽엔 벌레들이 꼬여 살점을 파먹었고, 망가진 왼손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다.
단전은 뭉개져서 내공 운용은 꿈도 꿀 수 없고, 과다 출혈로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런 와중에 고통은 선명하게 느껴지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아파! 아파!’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보통 이 정도 상태가 되면 죽어야 정상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한 생명력이, 오히려 그에겐 독이 된 상황이었다.
그때, 한 줄기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프냐?”
파사륵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번쩍! 번쩍!
그의 앞에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회흑색 쇠사슬이 사선으로 교차되어 상반신에 감겨 있다. 견봉에는 무지막지한 도끼를 걸치고 있는데, 호리호리한 몸에 사람 몸뚱이만 한 병기를 지고 있는 모습이 기괴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너, 넌?!”
연호정이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파사륵은 흠칫 놀랐다.
서역의 피가 섞인 그보다도 훨씬 새파란 안광을 뿜고 있는 연호정의 모습은 사신(死神)과도 같았다.
“당연히 아파야지. 아프라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내버려 둔 거야.”
“이, 이 새끼가!”
“더 썰어 줄까?”
파사륵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썰어 준다? 이게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던가. 마적단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써느니, 마느니 했던 적은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파사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귀신의 미소였다.
“한 번만 더 개소릴 지껄이면 눈알부터 뽑고 시작하려 했더니만.”
“……!!”
“확실히 생존 본능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군. 아, 그건 또 아닌가? 우리가 들이닥쳤는데도 끝까지 버텼으니.”
파사륵은 입을 다물었다.
‘이놈은 미친놈이다.’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평생 글이나 읽은 사람처럼 곱상하게 생겼지만, 이놈은 사람을 푸줏간의 고기처럼 다져 놓을 수 있는 놈이다.
이런 놈은 함부로 자극해선 안 된다. 눈알을 뽑아? 눈알은 말할 것도 없고, 산 채로 육포를 만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상황은 대충 짐작하지?”
“…….”
“네가 이끄는 회랑단은 전부 묻었다.”
파사륵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연호정이 고개를 모로 갸웃거렸다.
“반응이 없군.”
의미를 알기 힘든 말이었다.
다시 한번 침을 삼킨 파사륵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말투가 상당히 공손하다. 모용우와 싸울 때는 내뱉는 말마다 그렇게 거칠더니만, 이럴 때는 절대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그야말로 짐승이었다. 그만한 무공을 연마했다면 마땅히 정신력도 강해야 정상인데, 이놈은 뼛속까지 마적 놈이었다.
덕분에 다루기는 한결 수월할 것 같았다.
“널 어떻게 할지는 네가 무엇을 말해 주느냐에 따라 다르지.”
“……?”
“본인의 상태는 잘 알고 있지? 네놈의 생명력은 기가 막힐 정도더군. 하지만 아무리 생명력이 끈질겨도 그 상태로는 오래 못 버텨.”
“……!”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준다면, 치료도 해 주고 돈도 적당히 쥐여 주지.”
파사륵의 눈이 흔들렸다.
치료를 해 주고 돈도 쥐여 주겠다? 그 말은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그럴 리가 없어!’
교묘한 협상으로 상대를 농락한 짓거리는 자신도 많이 해 봐서 안다.
“정말로 그럴 거요?”
“그렇다.”
“당신은 치료도 해 주고 돈도 쥐여 준다고 했지, 살려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소.”
연호정의 눈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교활하군.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밥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더니, 덕분에 좋은 걸 배웠다.”
파사륵은 상대에게 속지 않았다. 아니, 상대는 진심일 수도 있지만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협상에 들어가야 했다.
까딱 잘못하다간 목숨이 날아간다. 다리? 손? 그런 것쯤이야 차후에 걱정해도 충분한 문제다. 일단은 살아남는 게 중요했다.
“질문에 대답하겠소. 대답할 테니, 날 치료해 주고 걱정 없이 살 만큼의 돈도 주시오. 그리고……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은 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시오.”
무척이나 뻔뻔한 말이었다.
연호정이 볼을 긁적였다.
“이거야 원, 너무 당당하게 요구하니 내가 다 기가 죽는구만.”
“그러지 않으면 나 역시 대답하지 않겠소.”
그럴 리가 없다.
대답을 듣지 않고 죽이겠다고 말하면 파사륵이 지금까지 요구했던 모든 것이 날아간다. 연호정이 조금만 강하게 나가도 파사륵은 고개를 처박을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연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순순히 대답해 주면 돈도 주고, 치료도 해 주고,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지.”
“다시 날 죽이러 오는 건 아니오?”
“내가 너 같은 마적 나부랭이 하나 죽이자고 시간 낭비할 사람으로 보이나?”
“…….”
“걱정하지 마라. 중원을 거닐다 우연히 다시 만나지 않는 한,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놈을 애써 찾아가 조리할 생각은 없다.”
파사락은 안도의 한숨을 뱉어 냈다. 연호정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읽은 것이다.
“……알았소. 질문이 뭐요?”
참으로 가벼운 입이다.
연호정은 상대가 진실만을 대답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 왔어?”
“……?”
“너희는 서장, 청해, 감숙 북부 일대에서 말썽을 일으키던 놈들이라 들었다. 그런 놈들이 왜 산동까지 와서 분탕질을 쳤지?”
파사륵은 재차 침을 삼켰다. 입이 말라서 더 이상 삼킬 침도 없었지만.
“영고위라는 놈을 아시오?”
“영씨면 해룡상단 소속인가?”
“그렇소. 놈은 해룡상단주의 동생이오. 그놈은 과거, 상단의 물건을 수차례 빼돌려 우리와 거래했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놈이 빼돌린 홍옥은 산동성 밖으로 유출이 불가능했소. 그래서 우리가 직접 왔소. 최상급 홍옥을 무려 두 포대나 가져왔기에…….”
“죽고 싶어?”
파사륵의 눈이 커졌다. 뜬금없이 죽고 싶냐니, 이게 무슨 말인가.
“왜, 왜 그러시오?”
“네 눈에는 내가 단순한 미친놈 정도로 보이나 보지?”
“……?!”
“되지도 않는 거짓말로 상대를 파악하려 든다……. 제법이군. 배포가 있어. 목숨이 걸렸는데도 장난질을 친다? 다시 봤다, 마적 두목.”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진짜요! 진짜란 말이오! 그 영고위란 놈과 대면시켜 주면……!”
그때, 연호정이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내공을 소실한 파사륵의 눈으로는, 흐릿하게 적힌 종이의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회랑단주 파사륵. 서장 소뢰음사 출신. 십여 년 전 모종의 이유로 파문당한 후 회랑단 창설. 이후 십 년 동안 새외 제일의 마적단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 잔혹하고 교활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 보는 전형적인 소인배.”
“……!”
“고작 홍옥 두 포대에 천 명이나 되는 회랑단이 산동까지 기어 들어와? 천하의 회랑단주께서?”
시퍼렇게 빛나던 연호정의 동공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화르르륵.
파사륵이 입을 떡 벌렸다.
일순간 화광(火光)을 뿜는 연호정의 눈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내공 운용도 제대로 못 하는 몸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살기를 받으니 호흡이 턱턱 막혔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기분 탓일까? 파사륵은 그의 송곳니가 맹수의 그것처럼 길쭉하다고 느꼈다.
“거래 내용을 바꾸겠다.”
“허억! 허억!”
“네놈은 무조건 죽인다.”
“커헉!”
“깔끔하게 죽고 싶으면 진실만을 얘기해라. 만일 그 역겨운 주둥이에 약간의 거짓이라도 담는 순간.”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소름 끼치는 살기가 창고 전체를 꽉 채웠다.
“그땐, 난 널 죽이지 않을 거다. 오히려 천수를 누리게 해 주지.”
실로 섬뜩한 협박이었다.
죽이지 않는다? 파사륵은 그 말을 편히 살려 두겠다는 말로 해석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츠츠츠츠.
시뻘건 살기가 그의 팔만사천 모공으로 흘러들었다.
“산동에 왜 왔어.”
파사륵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불가항력이었다.
“부, 부탁을 받았습니다.”
“누구의?”
“투왕, 투왕 양천입니다.”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두 배는 더 진해졌다.
‘양천!’
성천십삼좌.
중원 무림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열세 명의 고수.
그중 그나마 신진(新進)이라 할 수 있는 삼군(三君)을 제외한 열 명을 따로 신선제왕(神仙帝王)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투왕 양천은 바로 그 신선제왕의 일인이었다. 육순이 훌쩍 넘은 나이로 파괴력 넘치는 박투술을 구사하는 실전 박투술의 일인자가 그였다.
그리고 그는, 과거 연호정이 흑도를 통합하기 전 마지막으로 쓰러트린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
‘양천의 부탁을 받았다? 이놈들이?’
그럴 리가?
양천은 야심이 강하고 독선적이며, 잔혹한 성정을 가진 인물이다.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는 걸 할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명령이라면 모를까.
순간 연호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냐?”
“예, 예?!”
“네놈의 뒤를 봐주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헉!”
“한 사람은 아니군. 단체야. 새외의 어떤 단체가 너희의 뒤를 봐주고 있어.”
파사륵의 눈이 미친 듯이 떨렸다.
연호정은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을 단숨에 읽어 냈다.
파사륵은 흑도의 쓰레기들과 똑같은 놈이다. 이런 놈의 심리를 읽는 건 술잔을 비우는 것보다도 쉬웠다.
“소뢰음사는 아닐 텐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이상하군. 소뢰음사는 새외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다. 파문된 문도가 마적질이나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는 없어.”
“……!”
“누구냐? 누가 너희의 뒤를 봐주고 있는 거지?”
“그, 그게…….”
연호정이 버럭 외쳤다.
“똑바로 말해!”
파사륵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도 모릅니다!”
“뭐?”
“그, 그들의 정체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다만?”
“그들이…… 어, 엄청나게 강하고 잔인한 놈들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걸 네놈이 어떻게 알지? 그쪽 놈들이랑 접선이라도 했나?”
“그렇습니다.”
“……접선을 했다고?”
당연히 접선했을 것이다. 이 치졸한 놈이 상대의 역량도 모른 채 휘둘렸을 리는 없으니까.
다만, 그와 별개로 연호정은 충격을 받았다.
혹시나 하는 의심은 있었다. 정말 혹시라도 이놈들이, 새외의 ‘어떤’ 단체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바람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을 테지만, 이왕이면 연결된 놈들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찾기가 쉬워질 테니까.
한데, 진짜로 연결이 된 모양이었다.
“이름.”
“예?”
“그 단체의 이름이 뭐냐.”
“모, 모릅니다! 정말 몰라요! 그들은 한 번도 자신들의 조직명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연호정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파사륵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지만! 놈들에게는 특성이 있었습니다!”
“특성? 그게 뭐지?”
“이, 이상한 피풍의 같은 걸 둘러쓰고 있었습니다! 만났던 자들은 하나같이 전부요!”
“……!!”
“마치…… 어느 종교 단체의 일원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정말이에요!”
연호정이 몸을 일으켰다.
우웅! 우우웅!
창고 벽이 부르르 떨리는 듯했다.
“종교 단체?”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연호정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을 보는 그의 얼굴에 지극한 환희와 극심한 분노가 어렸다.
부르르르.
꽉 쥔 주먹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떨려 왔다.
연호정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찾았다.